책과 삶

대만 동성혼의 거센 물결 된 ‘작은 손짓’

2019.05.31 21:09 입력 2019.05.31 21:23 수정

악어노트

구묘진 지음·방철환 옮김

움직씨 | 364쪽 | 1만5000원

[책과 삶]대만 동성혼의 거센 물결 된 ‘작은 손짓’

“뾰족한 수가 없다.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 바람을 쐬면서, 나처럼 맨몸으로 테라스에 나온 다른 인류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만약 베스트셀러도 못 되고, 진지하지도 못할 바에는 놀라게 할 수밖에. 한 글자에 5각(20원) 이건 졸업장과 글쓰기에 관한 일이다.”

대만의 작가 구묘진(1969~1995)의 장편소설 <악어노트>의 도입부는 강렬하다. 세상을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바꾸기는 힘들다. 세상을 놀라게 한 대가를 잔인하게 돌려받기도 한다. 혐오나 차별, 폭력과 같은 형식으로. 하지만 세상을 놀라게 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진다면, 언젠가 세상은 바뀐다. 1994년 구묘진이 발표한 <악어노트>는 대만의 혼인평권 운동을 촉발시켰고,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대만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이 합법화된 국가가 됐다. 동성혼을 인정하는 법률이 시행된 지난달 24일, 동성 부부 526쌍이 혼인신고를 했다.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소설가였던 구묘진은 26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삶을 살았지만, 그의 작은 손짓이 거센 물결이 되어 세상을 바꿨다.

<악어노트>는 놀랄 만한 재능을 지닌 소설가였지만, 삶과 불화했던 구묘진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구묘진은 타이베이의 명문 여고를 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수재였다. 대학 시절부터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며 재능을 드러냈던 그는 스물다섯인 199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해 발표한 <악어노트>로 중국시보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이듬해 유작이 된 <몽마르트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몽마르트 유서>는 오랫동안 대만 베스트셀러 순위 안에 들며 인기를 얻었다.

2017년 5월 대만 타이베이 시내에서 동성결혼 지지자들이 동성결혼을 금지한 민법이 위헌이라는 사법원의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2년 뒤인 지난달, 대만 입법원은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특벌법안을 통과시켰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7년 5월 대만 타이베이 시내에서 동성결혼 지지자들이 동성결혼을 금지한 민법이 위헌이라는 사법원의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2년 뒤인 지난달, 대만 입법원은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특벌법안을 통과시켰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설이 쓰인 시기에 방송국 기자가 레즈비언 바의 손님들을 비밀리에 촬영한 뒤 보도해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대만에서 발생했다. 이 중 두 여학생은 구묘진의 모교 학생이었다. 동성애에 혐오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소설은 탄생했다.

소설은 주인공 ‘라즈(拉子·Lazi)’의 대학 시절 4년간에 관한 이야기로 ‘일기’ 형식으로 쓰였다. 청춘의 욕망과 좌절, 자기분열, 사회에 대한 비판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진다. 라즈는 동성인 수령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반인반마’로 느끼며,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수령과 멀어지려 한다. “내면의 진실과 외부의 현실이 거의 완전한 평행선을 그으며 한 자락 무늬조차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다” “나는 아직 다른 사람에게 나를 내보이기도 전에 스스로 그들 대신 먼저 ‘폐기’의 장을 덮고 잘게 찢어버렸다”는 라즈의 말에서 고통이 생생히 느껴진다.

라즈는 후배 탄탄과 지유, 친구 몽생, 초광 등과 함께 청춘의 아픈 시기를 통과한다.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는 욕망과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욕망에 솔직했다가 불에 데인 듯 상처받고, 자기파괴적 행동을 하다가 사회적 규범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들은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별이 여성과 남성으로 고정돼 있지 않다고 느끼는 ‘논 바이너리(Non-binary)’ 등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는데, “우리 셋이 성적 동지로 함께 지내면 어떠니? 어차피 세 사람 모두 변형된 성별로 재갈이 물려 있다”며 ‘무성화 공영권(성별이 없는 사람들끼리 함께 번영할 구역)’을 만들자고 말하기도 한다.

구묘진 작가

구묘진 작가

소설엔 대학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도 녹아 있다. “대학은 세 가지 사회 제도인 강요된 교육, 강요된 일자리, 강요된 결혼이 첩첩이 잘 맞물린 교차점에 있다” “대학은 왕왕 어떤 이의 몸에서 비인도적으로 착취한 기름을 다른 누구의 몸에 인도적으로 발라준다”는 구절 등이다.

일기 가운데엔 인간의 탈을 쓰고 외출하는 ‘악어인간’이 등장해 우화적으로 사회의 모습을 풍자한다. 악어는 부화 당시 물의 온도에 의해 성별이 지정되는 동물로, 성소수자를 은유한다. 미디어의 선정적 보도와 사회의 차별적 시선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라즈’라는 주인공의 별칭은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란 뜻이다. 중화권에서 ‘라즈’는 레즈비언을 뜻하는 은어로 광범위하게 쓰인다. 구묘진의 작품이 대만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혼인법 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이끄는 사람’이라는 라즈의 뜻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은 1980년대 후반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성소수자들의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뉴욕타임스는 <악어노트>가 가부장제, 여성혐오, 동성애혐오, 성별이분법,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며 “미래적인 소설”이라고 평했다.

<악어노트>는 무엇보다 사랑과 욕망, 청춘의 방황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적 편견과 자기검열 속에 고통받던 라즈는 “살아가면서 이상적인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보다 차라리 황당하고 결핍된 사랑의 의미를 하나하나 직면하면서 책임지는 편이 낫다”고 깨닫는다. 사랑은 선악, 미추로 나눌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며 허용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은 사람 사이의 잘못된 대우에서 오는 것이다.”

지난달 아시아에서 최초로 대만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됐고, 한국에서도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확대되고 있다. 1일엔 20주년을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서울광장에서 열린다. 출간 25주년을 맞은 <악어노트>는 어쩌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때에 한국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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