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코스믹 호러 고전에서 발견한 인류의 원초적 불안·공포

2021.08.20 14:02 입력 2021.08.20 21:02 수정
이종산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H P 러브크래프트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100년 전 코스믹 호러 고전에서 발견한 인류의 원초적 불안·공포

나는 왠지 옛날부터 H P 러브크래프트가 어렵게 느껴졌다. 유명한 고전 작가이자 공포소설 작가여서가 아니었다. 제인 오스틴이나 애거서 크리스티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 친근하게 느끼고, 에드거 앨런 포도 좋아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H P 러브크래프트는 에드거 앨런 포보다 81년이나 늦게 태어난 작가다(에드거 앨런 포는 1809년생, H P 러브크래프트는 1890년생이다). 단순히 현대 장르문학의 조상님 격인 작가라서 거리감을 느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아마 장르문학의 세계에서 조상님 격인 여러 고전 작가 중에서 H P 러브크래프트가 유난히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진 것은 내가 그를 마니아들이 사랑하는 작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H 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자체가 그의 사후에 팬들이 그의 세계관을 넓히고 재창조하는 놀이를 즐기면서 유명해진 것이라 내가 느끼기에는 어쩐지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듯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크툴루의 부름’이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에 비해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그때 ‘H P 러브크래프트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생겨버렸다.

이제는 ‘크툴루의 부름’이 후대에 끼친 복잡하고 다양한 영향을 떠올리며 그 작품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다른 작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주에서 온 색채>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야기다. 어느 날 어떤 농장에 운석이 떨어진다. 과학자들은 이 운석을 가져가 여러 실험을 해보지만 현대 문명의 과학 기술로는 이것이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아낼 수 없다.

운석이 떨어진 후, 농장에서는 계속 해괴한 일들이 벌어진다. 식물들이 괴상한 모양으로 자라고, 무르익은 과일에서는 역겨운 맛이 나고, 동물들은 서서히 미쳐간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도 있다. 더 해괴한 것은 농장 땅이 은은하게 빛난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농장의 우물물을 마신 가족들의 몸에서도 빛이 난다. 이렇게 해괴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농장에서 이 농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평범한 한 가족은 완전히 붕괴해버리고 만다.

만약 이 가족이 어떤 죄를 저질렀다면 <우주에서 온 색채>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무언가 사악한 존재가 이 가족을 겨냥해서 괴롭히는 것이었다면 이 소설은 훨씬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전자라면 권선징악 이야기가 되고, 후자라면 엑소시즘 이야기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주에서 온 색채> 속 가족이 겪는 고통은 그들이 어떤 죄를 지어서 받는 벌이 아니다. 또 악마가 이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운석은 아무 이유 없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이 무엇인지 절대 알아낼 수 없다. 특히 운석이 하필 그 평범한 가족이 사는 농장에 떨어진 것은 그저 우연이다. 한 가족의 삶이 이유 없이 파탄나는데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운석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왜 농장에 이상한 일들이 생기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우주의 존재를 발견했고, 지구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현대의 인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는지도 거의 알아냈다. 인류는 이러한 발견에 자부심을 갖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인간은 왜 태어나는지, 왜 죽는지,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건지, 신이 있는지. 인간은 생물이기 때문에 죽고, 운명은 착각이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직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모르고, 우주가 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세상에 인간이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그 아득함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공포가 바로 코스믹 호러다. 코스믹 호러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우주에서 온 색채>는 바이러스에 피해를 입는 인간의 모습을 예견한 수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이상한 ‘색깔’이 농장을 돌아다니며 동식물과 인간을 모두 초토화하는 장면들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주에서 온 색채>가 나온 지 거의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 인류가 느끼는 불안과 이 소설 속 인물들이 느끼는 공포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은 든다. 이상기후로 인한 여러 변화와 연일 일어나는 대형 화재, 거기에 세계를 덮친 전염병까지. 다만 <우주에서 온 색채>의 재앙은 초자연적인 일이지만, 이상기후와 코로나19는 인간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일이라는 점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불러온 재앙이라 해도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 인물이 가진 공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대한 세계에 비하면 한 인간의 존재는 너무 미약하기에. 소설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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