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두만강 북쪽은 누구 땅인가? 한·중·일 근대는 ‘국경 만들기’에서 시작됐다

2022.05.06 15:04 입력 2022.05.06 22:57 수정

1712년 조선과 청의 분계강 역할을 했던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 1931년 불가사의하게 사라졌다. 너머북스 제공.

1712년 조선과 청의 분계강 역할을 했던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 1931년 불가사의하게 사라졌다. 너머북스 제공.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쑹녠선 지음 | 이지영·이원준 옮김 | 너머북스 | 464쪽 | 2만8000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불러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안다. 백두산은 ‘우리 땅’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 천지 중앙을 국경으로 확정한 1962·1964년의 북·중 국경 조약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민족의 영산’이라는 수사는 한국 국민과 북한 주민을 포괄하는 한민족이라는 오래된 정체성을 소환한다. 그런데 1712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지 조선 사람들은 “백두산은 오랑캐의 땅”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 땅, 우리 민족’을 만드는 경계들은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유연한 것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는 1881년부터 1919년 사이 두만강 경계 획정과 중국 조선족 집단 형성 과정을 다룬 책이다. 기존 한·중·일의 연구들은 이 시기 두만강 양안을 둘러싸고 청과 조선, 일본, 러시아 등이 벌인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했다. 이 책은 황무지에 불과한 작은 변경으로만 치부됐던 두만강 지역이 국가 간 경계로 획정되는 과정 속에서 “한·중·일 삼국이 모두 국가와 국민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흥미로운 통찰을 내놓는다.

저자는 두만강 국경 획정을 둘러싼 경쟁이 “중국의 변경 건설사업을 촉진했고, 한국의 민족주의적 상상을 추동했으며, 일본의 식민사업을 자극”했고, 이 과정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고 주장한다. ‘국경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고전적 근대국가 기원론에는 반기를 든다. 대신 뚜렷한 국경을 갖고서도 오랫동안 지리적·역사적 연결성을 지녀온 3국이 근대국가·국민의 개념을 만들어가는 ‘상호작용’과 ‘다층적 경쟁’에 주목한다. 한·중·일 근대 국가의 형성은 단지 서구에서 유입된 제국주의·식민주의·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와 지역적 교류를 승계한 측면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미국 UMBC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중국 칭화대 교수로 있는 저자 쑹녠선이 국경 경쟁을 둘러싼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의 자료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동아시아의 초지역적 네트워크, 역사·지리, 국제관계 등을 주제를 주로 연구하는 저자는 전작인 <동아시아를 발견하다>에서도 국민국가를 초월한 통합적 역사 단위로서의 동아시아를 그려냈다.

[책과 삶]두만강 북쪽은 누구 땅인가? 한·중·일 근대는 ‘국경 만들기’에서 시작됐다

1881년 조선인 빈농 수천명이
만주 동남부 황무지 개간하며
공식적으로 시작된 영토분쟁

이곳에서 일어난 3국의 투쟁은
중국 변경 건설사업을 촉진했고
일본 식민사업을 자극했으며
한국 민족주의적 상상을 추동했다

책은 백두산 정계비(중국에서는 ‘목극등비’)라 불리는 역사적 비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1712년(숙종 36년),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세워졌던 이 비석은 “한국과 중국의 경계를 가르는 두 강, 즉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과 동쪽으로 흐르는 두만강의 원류를 표시”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어쩌면 가장 안정적인 기점”이었다. 이 시기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몰래 넘어가 청나라 사람을 살해하는 월경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자, 청과 조선의 지리적 구분을 명확히 하라는 강희제의 지시에 따라 세워졌다.

1931년 7월 이 비석은 불가사의하게 사라진다. 그러나 비석은 사라지기 전부터 이미 두만강 국경 획정을 둘러싼 온갖 ‘모호한’ 논쟁의 주된 이유가 됐다. 1712년 만주족 지방 관리 목극등이 이끈 청과 조선의 조사단은 전통적으로 두 나라를 가르는 ‘분계강’으로 기능한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찾기 위해 백두산을 올랐다. 조사단은 나흘간의 고된 탐사 끝에 찾아낸 작은 물줄기를 두만강의 최종 수원지로 결정하고 그곳에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비석을 세웠다. 이 과정에 실수가 있었다. 사실 그 물줄기는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송화강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두만강을 잇는 목책·흙무더기로 국경을 표시한 1880년대 북관장파지도. 18세기와 19세기 조선의 지도 중에는 북관장파지도처럼 비석과 두만강을 연결하는 울타리로 국경을 표시한 것도 있었지만, 상당수 지도들은 비석이 토문강 또는 분계강이라는 다른 강과 연결되는 것으로 표시해 국경 인식에 혼란을 야기했다. 너머북스 제공.

두만강을 잇는 목책·흙무더기로 국경을 표시한 1880년대 북관장파지도. 18세기와 19세기 조선의 지도 중에는 북관장파지도처럼 비석과 두만강을 연결하는 울타리로 국경을 표시한 것도 있었지만, 상당수 지도들은 비석이 토문강 또는 분계강이라는 다른 강과 연결되는 것으로 표시해 국경 인식에 혼란을 야기했다. 너머북스 제공.

1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는 정계비와 북쪽으로 흐르는 이름 없는 강으로 연결되는 ‘책문’이 묘사돼 있다. 지도에는 강의 중간 부분이 완전히 빠져 있어 한국 북쪽 경계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암시한다. 너머북스 제공

1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는 정계비와 북쪽으로 흐르는 이름 없는 강으로 연결되는 ‘책문’이 묘사돼 있다. 지도에는 강의 중간 부분이 완전히 빠져 있어 한국 북쪽 경계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암시한다. 너머북스 제공

조선 관리는 실수를 굳이 청에 알리지 않고, 비석을 두만강의 실제 수원과 연결하는 목책을 세우는 것으로 무마했다. 시간이 흘러 썩어버린 목책과 함께 경계 획정의 기억도 사라졌다. 양국의 경계를 이루는 것이 두만강인지 송화강인지 아니면 ‘토문강(두만강의 중국식 발음일 뿐이다)’ 혹은 ‘분계강’이라는 강이 따로 있는 것인지 논란이 지속됐다. 1881년, 조선인 빈농 수천명이 두만강 건너 만주 동남부의 황무지를 개간하자 이러한 모호함은 결국 공식적인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두만강 북안 황무지를 무단점거한 조선의 농민들이 이 지역을 ‘간도’라 부르며 청의 관리에게 땅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중원의 땅을 경작하므로 중원의 백성입니다.” 그해 말, 청의 관료들이 내린 결론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뜻밖이다. 이들은 “조선인은 근본적으로 청의 속민”이라는 ‘종번’ 논리를 활용해 조선 농민이 간도에 계속 머물며 지방(길림) 정부에 세금과 소작료를 내게 해달라고 황제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이 포용적인 제안의 배경에는, 간도 조선인들을 포섭하며 호시탐탐 만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팽창적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견제 의도가 있다. 당시 청에게 두만강 국경은 “제국의 포용성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을 차단하는 제국의 배타성을 모두 보여주는 이중적 상징”으로 기능했다.

한국과 중국의 두만강 국경 획정 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애초 두만강의 수원으로 표시된 정계비와 두만강 사이를 잇는 여러 물줄기 중 어떤 것을 국경으로 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1887년 조선과 청나라의 2차 국경회담에서 조선은 두만강의 가장 북쪽 물줄기인 ‘홍토산수’를, 청은 남쪽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가운데 물줄기인 ‘석을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09년 청·일간의 이른바 ‘간도협약’에서 청의 타협안인 ‘석을수’를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받아들이며 경계가 획정됐다. 너머북스 제공

한국과 중국의 두만강 국경 획정 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애초 두만강의 수원으로 표시된 정계비와 두만강 사이를 잇는 여러 물줄기 중 어떤 것을 국경으로 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1887년 조선과 청나라의 2차 국경회담에서 조선은 두만강의 가장 북쪽 물줄기인 ‘홍토산수’를, 청은 남쪽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가운데 물줄기인 ‘석을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09년 청·일간의 이른바 ‘간도협약’에서 청의 타협안인 ‘석을수’를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받아들이며 경계가 획정됐다. 너머북스 제공

국경이 모호하게 남아 있는 사이, 공간을 둘러싼 각국의 서사는 한층 경쟁적으로 변모해갔다. 1885~1887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조선과 청의 두만강 국경회담은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까지 거친 일본은 1907년 두만강 국경 분쟁에 개입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간도가 동아시아 지배의 관건인 만주를 차지하는 열쇠”라고 인식했다. 일본은 간도가 버려진 황무지 즉 ‘무인지대’로서 중국과 한국 어느 곳에도 영유권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으며 간도 침략을 본격화했다.

청과 중화민국에 있어 이제 연길(간도)은 러시아·일본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만주족·한족 통합을 촉진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불가분한” 땅이 됐다. 중국 동북지역을 국가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연길을 지켜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청(중국)은 이전처럼 너그러운 ‘종번’의 논리에 머물지 않고, 본격적으로 ‘변경 건설’에 집중하고 이 지역에 ‘국경’과 ‘국민’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도입하는 데 집중했다. 1907년 일본의 간도파출소 설립을 계기로 청·일 양국은 간도의 군사화, 관료화, 인구조사, 치안유지, 공교육, 공공의료 등 근대적 통치 기제를 경쟁적으로 적용했다. 결국 두만강이 최종적으로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획정된 것은 1909년 청·일 간의 이른바 ‘간도협약’이었다.

양국의 경쟁 국면에서 “한국인들은 전혀 침묵하지 않았다”. 간도 지역의 경계와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국가 권력뿐만 아니라 이곳을 개간한 한국의 농민과 이주민, 그리고 친일파·독립운동가 등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비국가 행위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910년 이후 한국인에게 간도는 민족주의적 결집의 상징적 공간이 됐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기자조선’ 서사를 부정하고 “단군-부여-고구려” 계통을 강조하고 나선 신채호 등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에게 간도는 “위기에 빠진 ‘상상된 공동체’의 모든 옛 영광을 품은 가상의 고향”이자 “국가를 잃은 민족을 위한 영혼의 안식처”였다. 실제로 간도에 세워진 학교 대다수에서는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한국어와 한국 역사·지리 수업을 제공하며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장소로 기능했다. 저자는 1919년 3·1운동과 연변 3·13운동의 역동적 연관성을 설명하며 “3·1운동이 ‘근대’라는 이름이 붙는 한국 민족주의의 시대를 출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근대’의 시대가 실제로는 한국 국경 너머 두만강 이북의 연변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책은 이처럼 두만강 국경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된 청의 ‘내지화(內地化)’, 일본의 ‘식민화’, 한국의 ‘독립’ 서사가 결국 국민, 국경, 국가, 영토 등에 대한 각국의 ‘근대적’ 이해를 등장시켰다고 주장한다. 경계는 “무엇인가 멈추게 되는 지점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국경에서부터 동아시아의 근대가 창출된 것이다. 이 창출은 단순히 국가 권력의 주도나 서구 개념의 이식이 아닌, 농민과 관료, 지식인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경쟁하고 충돌한 각국의 다양한 주체들이 써내린 서사다. 옮긴이의 말에서 두 역자는 이 책이 “민족국가를 초월한 대안적 역사 연구의 모범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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