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도 로맨스도 가정도 사라진 ‘소멸세계’···‘정상’은 이미 깨지고 있다

2022.10.14 15:06 입력 2022.10.14 19:03 수정
이종산 작가

소멸 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최고은 번역│살림│ 292쪽 │1만3000원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섹스도 로맨스도 가정도 사라진 ‘소멸세계’···‘정상’은 이미 깨지고 있다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소멸세계>의 세계관은 섹스가 사라진 세상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다. 인공수정이 보편화되어 섹스로 임신하지 않게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성욕을 혼자 처리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사람과 연애를 하기보다는 만화 속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이 더 보편적인 것이 되고, 부부끼리도 섹스를 하지 않아서 연애를 한다면 가정 밖에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잡는다.

언뜻 황당하게 들리지만 이 소설의 배경은 백 년 뒤다. 백 년 전 사람에게 지금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우리 사회가 보편이라고 생각하는 생활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무척 황당해하거나 믿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백 년 전이나 그보다 옛날 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으니 말이다. 가령 사촌끼리 결혼하는 것이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지만 현대 한국의 기준으로는 보편이 아닌 것을 넘어 좀 징그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백 년 뒤의 세상이 꼭 <소멸세계>처럼 될 거라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섹스와 젠더, 사랑의 이야기는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섹스를 하지 않아도 번식을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사랑의 의미는 어떻게 변할까?

작가는 이 소설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상상한 세계의 다양하고 복잡한 풍경을 보여준다. 비혼이 크게 늘어서 혼자 살거나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부부는 로맨스가 분리된 가족의 개념이 되어서 부부가 섹스를 하면 근친상간이라고 비난받는다. 이 사회의 사람들에게 섹스란 인공수정 기술이 발전하기 전의 인류가 어쩔 수 없이 했던 구시대적 행위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주인공 아마네는 쉴 틈 없이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한다.

왜? 아마네는 사회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위에서 한 발짝 떨어진 자신에 대해 혼란을 느끼며 자신이 왜 사랑과 연애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지 고민한다. 또, 백 년 전이라면 정상에 속했을 자신이 현재의 시대에는 평범하지 않는 축에 속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상함을 느낀다. 어렸을 적부터 그러한 혼란과 고민을 안고 어른이 된 아마네는 여러 경험을 거치며 사회는 어떤 것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규정하지만, 그것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정상성이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네는 결혼하고 나서도 연애를 한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소설 속 세계에서 이것은 불륜이 아니다. 남편 역시 애인이 있다. 심지어 아마네의 연인과 남편의 연인이 결혼식에 참석해 함께 사진까지 찍는다(환하게 웃으며!). 남편은 오래 만난 연인이 있고, 아마네는 연인이 여러 번 바뀐다. 결혼을 위한 단체 미팅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부부가 된 것인데, 그 비슷한 점이란 둘 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타입이라는 것이다.

아마네의 남편은 연인을 너무 사랑해서 괴롭다. 상대방을 사랑하면 할수록 부족한 느낌에 애가 타는데 상대도 마찬가지라 연애 관계가 서로를 갉아 먹는다. 그렇다면 헤어져야 할 것인데 사랑하기에 헤어지지 못한다. 이런 관계를 오래 끌고 있는 아마네의 남편에게 가정은 휴식처다. 아마네 역시 남편과 있을 때는 로맨스에서 벗어날 수 있어 편안함을 느낀다. 두 사람은 결혼 생활을 함께하며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이가 된다.

이러다 결국 남편과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닐까 싶은데 소설의 전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아마네와 그녀의 남편은 각자의 연애에 지쳐 로맨스가 없는 도시로 떠난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인공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하고, 남성의 임신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또, 누가 아이를 낳든 모두가 함께 공동 양육을 하는 시스템이다. 가정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다. 모두가 혼자 살고, 직장에 다니는 시간을 제외한 저녁이나 주말에 공공시설에 가서 아이들을 돌본다. 막 태어난 아이는 바로 시설로 가기 때문에 부모가 따로 없다. 아이는 도시의 모든 사람을 ‘엄마’라 부르며 자란다.

<소멸세계>의 인류는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공동으로 돌보는 것이 진화라고 말하지만, 아마네에게는 그 진화의 풍경이 기괴해 보인다. 독자에게도 <소멸세계>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연애와 섹스를 하고 가정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아직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 맞을까? 우리는 이미 그것이 보편이고 정상이라는 개념이 깨어지기 시작한 시대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설정을 극단으로 끌고 가는 소설이라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말이 안 되는 부분들이 다소 있지만, 가족의 형태가 다양화되고 전통적인 성 역할이 깨어지기 시작한 현대 사회에서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져 흥미롭다.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섹스도 로맨스도 가정도 사라진 ‘소멸세계’···‘정상’은 이미 깨지고 있다

이종산 작가. 이준헌 기자

이종산 작가.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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