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왕산 아래 술 빚는 집…멍석 깔고 나누는 잔엔 흥이 넘친다

2016.04.22 20:28 입력 2016.04.22 23:14 수정
한윤정 선임기자 ·사진 박기호 사진가

전통주 명인 박록담 ‘내외주가’

서울 서촌은 직장인과 관광객, 나들이 인파로 늘 붐빈다. 조선시대 중인들이 모여살던 이곳은 수려한 인왕산 아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과 시인 이상, 화가 이상범·박노수 등 예술가들의 흔적, 그리고 최근 들어선 아기자기한 카페와 레스토랑, 디자인 가게들이 어우러져 활기차고 시끄러운 동네가 됐다. 회식 명소인 금천교시장과 꼬마부터 노인까지 방문객이 붐비는 통인시장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인왕산 쪽으로 좀 더 올라가다 보면 조용한 주택가가 나온다.

박차원 대표가 내외주가 마당에 전통막걸리와 두부김치, 부추전이 어우러진 술상을 차렸다.

박차원 대표가 내외주가 마당에 전통막걸리와 두부김치, 부추전이 어우러진 술상을 차렸다.

내외주가는 인왕산 바위가 바로 올려다보이는 골목길 안에 숨어 있다. 2층짜리 양옥은 얼핏 살림집 같지만 열린 대문 앞에 ‘우리 술 문화공간’이란 입간판이 있다. 마당이 넓고 손님을 맞는 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에 누구 계세요?”라고 외치게 된다. 이 집은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57)이 아내 박차원씨와 함께 운영하는 주점이다. 지난해 9월 문을 열었고 최근에는 살림집도 2층으로 옮겨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에 좌탁 4개가 펼쳐져 있다.

박 소장은 30년간 우리 술을 연구해온 전통주 전문가다. 대학 시절부터 전라도 일대의 전통주 담그는 노인들을 찾아다녔던 그는 현장에서 채록한 술 빚는 법 130여가지에다 주방문(酒方文)이 실린 고서를 연구해 추출한 870여가지를 합쳐 1000여가지 레시피를 정리해 발표했다. 그가 1999년 설립한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술 빚는 교육을 받은 수강생 수만 2만3000명에 이른다. 그런 그가 내외주가를 연 것은 자신의 방식대로 빚은 전통주의 확산을 위해서다.

“우리 전통주가 좋다고는 하는데 직접 맛본 분들은 생각보다 적어요. 수제 전통주가 아니거나 맛이 못 미치는 술을 전통주라고 믿고 마셨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저와 제자들이 빚은 술맛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을 열었습니다.”

내외주가의 차림표를 보면 내외주가 탁주는 2만원, 내외주가 청주 3만원, 자희향 탁주 1만8000원, 자희향 청주는 3만원이다. 박 소장의 가르침에 따라 아내 박차원씨, 그리고 첫 제자 노영희씨가 각각 빚은 술이다. 그가 빚은 세상만사(호산춘) 탁주는 3만500원, 청주는 5만원, 청산별곡(송순주)은 12만원, 나비의 꿀단지(백화주)와 달빛여로(감홍로)는 20만원으로 가격대가 올라간다. 공장에서 만든 술에 비하면 비싸지만 수입주류인 와인이나 위스키에 비하면 비싸다고만 할 수 없다. 대신 술맛을 제대로 느끼도록 슴슴하게 가정식으로 만든 안주들은 착한 가격이다.

술을 빚는 데 필요한 재료는 작목반에서 구하거나 바로 채취한다.

술을 빚는 데 필요한 재료는 작목반에서 구하거나 바로 채취한다.

“보통 안주는 비싼 걸 먹으면서 술은 싼 걸 고르지요. 특히 국산술일수록 그래요. 그렇지만 좋은 술을 마셔야 숙취가 적고 건강을 해치지 않습니다. 어떤 첨가물도 없이 쌀과 누룩, 물만으로 빚어낸 전통주가 바로 그런 술입니다.”

내외주가는 박 소장 내외가 운영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특별한 형태의 전통주막을 가리키던 명칭이다. 가난한 양반가 여인들이 자신의 집에서 빚은 가양주(家釀酒)를 팔던 곳이다. ‘술 내오라 여쭈어라’ 하면 ‘여기 있다 여쭈어라’ 하는 식으로 안주인과 손님이 내외하며 술상을 내었다 해서 내외주가라고 했고, 안주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팔뚝만 나와 술을 준다는 뜻으로 팔뚝집이라 부르기도 했다. 반가에서 운영하던 곳인 만큼 술과 음식에 격조가 있고 드나드는 손님 역시 일반 주막과는 달랐다. 이런 이름을 택한 현대판 내외주가는 지은 지 50년이 가깝지만 여전히 튼튼한 양옥에다 넓은 마당이 자랑이다. 나무와 화초가 자라고 인왕산을 올려다볼 수 있는 정원에서 날씨가 좋으면 테이블이나 멍석을 펴놓고 손님을 맞는다. 특별한 메뉴와 위치 때문에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거실에서는 ‘보리밭’ ‘비목’ ‘선구자’ 같은 우리 가곡이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한국전통주연구소의 술방에서 2차 발효를 하고 있는 술 항아리들

한국전통주연구소의 술방에서 2차 발효를 하고 있는 술 항아리들

내외주가에서 판매되는 술은 자하문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한국전통주연구소 부설 술방 ‘양온(釀온)’에서 온다. 생쌀가루를 뭉쳐 만든 떡누룩과 고두밥, 물을 섞어 25도 방에서 2~3일 1차 발효를 시키고 다시 18도 방으로 옮겨 2차 30일, 3차 40일간 발효를 시킨다. 이 밑술을 맑게 걸러내면 청주, 흐리게 걸러내면 탁주, 증류하면 소주가 된다. 도수를 낮추고 양을 늘리기 위해 물을 탄 게 막걸리다. 발효과정에서 다양한 꽃과 열매를 넣어 향기를 더하면 여러 이름의 가향주가 된다. 말은 쉽지만 제대로 술맛을 내는 데 30년이 걸렸다.

박 소장이 술을 빚기 시작한 건 유독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무안 박씨 해남파 종손으로 일찍 결혼해 장남인 박 소장과 스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아버지는 목포 일대에서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늘 술과 함께 살았다. 인근 섬에 사는 친척들이 자식들이 공부하는 대처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나와 자신의 집에 머무는 바람에 어머니가 손님에게 약주를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 것도 그가 술 문화에 가까이 다가선 계기가 됐다.

대학생이 돼 광주로 간 그는 친구들에게 수소문해 가양주 빚는 노인들을 찾아다녔다. 집에 갈 때 맛있는 술을 들고 가면 아버지가 용돈을 많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오고가느라 하루씩 걸리는 시간이 아까워 조금씩 술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광주일보 신춘문예,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전공인 전기공학 관련 일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와 잡지사 기자가 됐다. 기자일을 하면서 시를 쓸 요량이었다. 월간 ‘청소년’과 ‘식생활’에서 13년간 기자로 일했다. 이때도 술 빚는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배우는 일은 그치지 않았다. 특히 ‘식생활’에서 일할 때는 술 전문기자가 돼 전국을 돌아다니며 취재와 공부를 함께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양주 전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집집마다 김치나 된장 맛이 다르듯 술맛도 달랐는데 일제가 세금을 매기기 위해 가정에서 술 빚는 걸 금지하면서 술맛이 획일화됐고 빚는 법도 모두 잊어버린 거죠.”

‘식생활’이 문을 닫으면서 그는 전통주 복원과 교육을 전업으로 하게 됐다. 그런데 다시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2002년 베이징에서 열린 술박람회에 우리 전통주를 들고 나갔는데 외국 기자로부터 “이 술 상한 것 아니냐. 곰팡이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난다”는 지적을 받았다. 우리는 미처 느끼지 못하던 누룩향이 그들에게는 역겨웠던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온 술 빚는 법이 잘못됐다는 회의에 빠졌다. 과거에 밀주를 빚다 보니 빨리 발효시키기 위해 누룩을 너무 많이 넣었고 그걸 그대로 배웠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때부터 고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주 기록인 <산가요록>을 비롯해 <언서주찬방> <산림경제> <음식디미방> 등 80여종의 문헌에 부분적으로 수록된 술 이름과 주방문을 토대로 일일이 실험해 보면서 자신만의 전통주 레시피를 만들었다. 기록으로 남은 전통주가 520여종, 여기에 현장에서 채록한 술 빚는 법과 같은 술이라도 빚는 방법이 조금씩 다른 것까지 합쳐 1000여가지 주방문이 나왔다. 30여년에 걸친 연구성과를 담아 그는 지난해 말 <한국의 전통주 주방문>(바룸)이라는 5권짜리 5000쪽의 책을 냈다.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 전통주가 단맛이 나는 건 과음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반주로 두세 잔이 가장 바람직한 음주 방법입니다.”

내외주가가 있는 곳은 송석원 자리이기도 하다. 마당 안쪽 담장이 가파른 인왕산 바위와 바로 연결되는데,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로 보강하면서 가려진 바위에 ‘松石園’이란 당호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암각돼 있었다. 송석원은 조선 정조 때의 위항시인 천수경의 집이며 1786년 송석원 시사회가 결성된 이후 1818년까지 333인의 시인들이 위항문학을 전개해온 곳이다. 위항문학이란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 서얼, 서리, 평민 출신 문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이다.

당시 송석원 시사회는 ‘세상에 시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송석원 시사회에 참가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1791년 김홍도가 달밤에 열린 시사회를 ‘송석원시사야연도’라는 그림으로 남겨 더욱 명소가 되었다. 이런 장소에 내외주가가 들어섰으니 술집 위치로는 최고 명당 자리다.

내외주가는 많은 이들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졌다. 여러 문화 관련 단체의 사무실로 쓰이던 이 집 마당에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집안 식구와 전통주를 배운 제자들이 쓰레기를 치우고 마당을 가꾸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내외주가란 이름을 짓자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글자를 써주었다. 추사의 송죽원이란 글씨와 어울리는 서체였다. 그걸 서예가 김기상씨가 각자해 외벽에 걸어주기까지 했다.

지난 삼월삼짇날에는 이 집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박 소장과 가까운 이들인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장, 강병인씨, 박금준 편집디자이너, 김수진 음식영화 감독, 윤진철·손미나 명창, 신규열 한국화가, 하선호 서예가, 김홍렬 한국음식인문학연구소장 등이 모여 술과 안주를 음미하고 현장에서 시화를 그려 경매까지 열었다. 이 집 커튼에 그려진 매화는 그날 여흥의 흔적이다. 앞으로 부부의 날, 오월단오(5월5일), 칠월칠석(7월7일), 9월9일, 11월11일에 정기 행사를 이어갈 생각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박 소장은 자신의 술 인생을 시에 담아 술시를 쓴다. ‘술잔에 떨어지는/ 꽃그림자/ 가득하고,// 꽃방석에 앉았으니/ 향기도 흥도 새로운데,// 청명에/ 찾아주는 이 없어,/ 수계의 술을/ 홀로 기울인다.’(시 ‘청명주를 마시며’, 수계란 술을 끊거나 마시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한산 소곡주, 전주 이강주, 금산 인삼주, 해남 진양주, 완주 송화주, 담양 추성주, 아산 연엽주, 파주 감홍로 등 술을 소재로 쓴 시로 시화전도 열고 해당 지역에 보내주기도 한다.

“술 문화가 바뀌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술 빚기를 가르칠 때는 50대 후반 여성이 많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술을 먹이려는 것이었지요. 지금은 40대 초반 남성들로 옮겨왔습니다. 직접 빚어 즐기는 쪽으로 변했다는 뜻이죠.” 술 실력과 술을 즐기는 일은 아무 상관 없다. 그의 주량은 소주 석 잔이다. 글

■박록담

[집이 사람이다] (15) 인왕산 아래 술 빚는 집…멍석 깔고 나누는 잔엔 흥이 넘친다


본명 박덕훈. 1959년 전남 해남생으로 조선대 전기공학과, 고려대 대학원 식품공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등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현장 탐방과 고서 연구로 1000여종의 전통주를 복원했다. 1999년 한국전통주연구소를 설립해 3000여명에게 전통주 빚는 법을 전수했다. 술방 ‘양온’, 우리술 문화공간 ‘내외주가’를 운영하며 <한국의 전통주 주방문>(5권)을 펴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