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 뼘 무대 위, 단 한 명의 배우…온 세상을 펼친다

2016.06.03 20:59 입력 2016.06.03 21:03 수정
글 한윤정 선임기자 , 사진 박기호 사진가

배우 심철종의 ‘한평극장’

저녁 7시 30분 서울 한복판 아파트가 극장으로 바뀌는 시간. 배우와 관객의 삶이 현실과 연극이 뒤섞인다. 배우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분명 그의 이야기인데 그것은 또한 나의 이야기다. 타인의 삶을 보러 왔다가‘나’를 발견하게 되는 곳 가장 작은 극장에 모두의 삶이 들어있다.

서울 한복판 주상복합 아파트 철문 옆에 ‘세상에서 제일 작은 한평극장’이란 작은 팻말이 내걸렸다. 가구나 살림이 일절 없는 거실에는 하얀 광목천이 양쪽 벽과 천장 사이에 세겹으로 드리워졌다. 오후 7시30분 공연시간이 다가오자 아직 석양이 남아있는 창문에도 검은 장막이 내려왔고, 원통형 스탠드의 불이 켜졌다. 검정 바지에 하얀 티셔츠와 남방을 입고 목에는 노동자처럼 수건을 두른 배우 심철종씨(56)가 일인극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공연 준비를 마쳤다.

공연시간이 다가오면 거실 천장과 벽에 하얀 천을 두르고 방석을 깔아 무대를 만든다. 이어 광화문대로 방향으로 난 창문에 검은 장막을 드리운다.

공연시간이 다가오면 거실 천장과 벽에 하얀 천을 두르고 방석을 깔아 무대를 만든다. 이어 광화문대로 방향으로 난 창문에 검은 장막을 드리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그는 “어서 오세요”라며 반갑게 맞이한다. 관객들은 어색함과 기대로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이들이 방석에 앉자 배우는 네 가지 색깔의 리본을 골라 손목에 묶어주면서 “이 끈이 풀리는 순간 행운이 찾아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헤드폰과 안대를 나눠준다. 이어 시작된 연극. 이웃처럼 행동하던 심씨는 갑자기 35년차 배우가 된다. 굳은 표정으로 꿇어앉아 바닥에 놓인 해골을 보면서 치매에 걸린 엄마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엄마,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숫자는 잊어버리면 안돼. 9번 버스 타고 전철 1호선 타고 덕수궁 앞에 와서 철종아 나 데리러 와라 하면 되잖아. 내가 누군지 알아? 그렇게 예뻐하던 큰아들이야. 이 바보 같은 엄마야, 다 잊어버려도 되는데 숫자는 안되는 거야. 따라해 봐, 하나 둘 셋 넷.”

한평극장을 찾은 몇몇 관객 앞에서 배우 심철종씨가 일인극을 공연하고 있다.

한평극장을 찾은 몇몇 관객 앞에서 배우 심철종씨가 일인극을 공연하고 있다.

그 독백 속에서 남자의 과거가 하나씩 드러난다. 빨간 태양과 파란 바다, 그 앞에 서 있던 꼬마, 초등학교 때 크레파스를 안 가져가서 선생님에게 혼나던 일, 그림만 그린다고 화내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지켜주려 애쓰던 엄마의 눈빛, 도쿄 여행에서 저녁 메뉴를 놓고 아버지와 다투던 기억, 7년 전 죽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따라나선 듯 기억을 놓은 어머니. 남자는 마침내 “나는 햄릿이었다”고 외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관 위에서 어머니는 외간남자와 교미를 한다”는 대사를 수없이 반복한다. 스스로 비추는 조명 속에서 민머리 심철종의 부릅뜬 눈은 그로테스크하게 관객을 직시한다.

이어 파헬벨의 캐논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주제는 사랑으로 넘어갔다. 나눠준 헤드폰을 끼자 레너드 코헨의 굵은 저음으로 ‘Famous Blue Raincoat’가 들리는데 배우의 읊조림이 노래 사이로 끼어든다. “나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다던 그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랑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구나.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구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대본이 따로 없다. 한동안 공연을 쉬었기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순서를 메모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대본이 따로 없다. 한동안 공연을 쉬었기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순서를 메모했다.

마지막 장은 안대를 끼고 듣는 죽음의 드라마다. “죽음이란 뭘까. 도대체 뭘까. 배고플 때 혀끝에 닿는 짭짜름한 라면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로구나. 덕수궁 돌담 앞에 기대서서 활짝 핀 장미를 바라보면서 저 가시에 찔리면 아프겠구나 생각할 수 없는 것이로구나. 미워할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로구나.” ‘Over the Rainbow’의 선율 속 마지막 대사. “당신들은 죽음 이후에 뭐가 되고 싶으세요? 나는 파란 하늘이 되고 싶어요.”

한 시간 공연이 막을 내린 뒤 실내는 침묵. 삶과 사랑, 죽음까지 한시간에 압축시킨 연극 속에서 각자의 몫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기 때문이다. 50대 관객 정석규씨는 “배우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대사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다시 이웃으로 돌아온 배우는 “보느라 수고하셨다”면서 주방에서 생수를 내왔다.

한평극장은 2012년 5월 ‘광화문시대’라는 오피스텔에서 시작됐다. ‘경희궁의아침’을 거쳐 지금의 ‘대우아파트’로 옮겨오면서 5년째 이어지고 있다. 심씨가 극, 연출, 무대, 조명까지 모든 역할을 맡는 연극 레퍼토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 편이다. 많게는 25명, 적게는 1명의 관객 앞에서 200번 넘게 공연했다. 지겹지 않으냐고 묻자 “전혀 지겹지 않다. 나는 한평극장에서 이 연극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연극을 본 뒤 그 말을 이해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담긴 연극, 관객의 삶이 담길 수 있는 연극, 즉 궁극의 연극이다.

한평극장 이전, 그는 홍대앞 명물이던 씨어터제로 극장을 운영했다. 1998년 주차장거리에 문을 연 씨어터제로는 연극, 무용, 음악, 굿, 마임, 퍼포먼스 등 실험성 강한 복합공연을 선보이면서 홍대앞이 젊음과 실험, 서브컬처의 상징이 되기까지 큰 몫을 했다. 상여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자동차를 때려부수는 아방가르드한 풍경을 한국 공연계의 장면에 끼워넣었다. 극장 옥상 난간에 진짜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던 조각은 예술이 고독한 인간의 몸짓임을 웅변했다.

그런데 건물주가 바뀌고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2004년 문을 닫게 됐다. 건물을 인수한 KT&G는 복합문화공간 상상마당을 개관했으나 원조인 씨어터제로의 자리는 없었다. 심씨의 노력과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동조 아래 KT&G의 지원을 받아 홍대앞 놀이터 인근 건물에 2008년 다시 극장을 열었다가 2011년 다시 폐관했다. 계속 쌓이는 적자를 감당하기 힘든 데다 심한 간경화로 인해 자칫 시한부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술과 소금을 끊고 단순한 삶을 시작했다. 늙으면 하려던 한평극장을 계획보다 일찍 50대 초반에 열었다.

“무대에서 공연하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해요. 조명을 맡은 사람이 사정이 생겨 못 오잖아요. 그럼 누군가 대신하지만 너무 힘이 들죠. 한평극장은 제가 혼자 다 하니까 참 편하고 좋아요.”

씨어터제로 시절은 연출가, 배우뿐 아니라 기획, 제작까지 감당하면서 하고 싶은 공연을 마음껏 선보였다. ‘나는 거리와 무대를 뒤집는 일에 허기져 있다. 미치고 싶다. 울고 웃고 분노하고 때때로 감동받는 것이 나의 일상이건만 내 맘대로 지랄을 못해서 열병이 날 지경이다. 이제 뭇 영혼을 흔들기 위한 무대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의 에세이 <나는 날마다 혁명을 한다>(2002)는 당시 격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하지만 고통도 컸다. 20여명 단원에게 급여를 주느라 늘 전전긍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나이에 극장 운영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게 아깝다”고 회고했다.

극장 문은 닫았지만 연기는 놓지 않았다. 나이든 배우를 원하는 무대가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만의 극장을 만들었다. “배우라는 본질을 지키는 것. 공연하면 기가 모이는 느낌”이라며 수행하는 것처럼 일인극을 이어왔다. 도시를 사랑하는 그는 광화문과 삼청동, 명동, 서촌을 자전거로 오가면서 운동하고 사람 만나고 문화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공연날은 외출을 삼가고 말을 아끼면서 조용히 무대를 준비한다. 요리하기를 좋아해 관객들에게 간단한 식음료를 제공하는 방법도 궁리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씨어터제로 시절에 하지 못했던 일도 한평극장에서 이뤘다. 1980년대부터 거리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그의 최종 목표는 멋진 야외극을 남기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열린 무대에서 언어와 격식을 벗어나 춤과 음악이 빚어내는 원초적 예술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연출가로서 그는 오랫동안 100명의 남자배우가 등장하는 야외극 <100인의 햄릿>을 꿈꿔오다가 2013년 7월 거창국제연극제 개막작으로 초연했다. 공연에 앞서 핵심배우 30명이 광화문광장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올 4월에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야외극 <반구대>를 초연했다. 다음 목표는 100명의 여자배우가 등장하는 <100인의 오필리어>다. 이처럼 제일 작은 극장과 제일 큰 극장을 오갈 수 있는 건 “한평극장에서 본질을 지킨 덕분”이다.

“모든 남자는 햄릿이고 모든 여자는 오필리어다”라고 생각하는 심씨는 햄릿으로 살아왔다. 배우로서 그의 대표작은 하이네 뮐러 원작, 채승훈(수원대 교수) 연출의 <햄릿머신>이다. 1993년 초연 이후 2012년 폴란드 바르샤바 공연까지 20년간 국내외에서 지속해온 레퍼토리다. 일인극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역시 햄릿 대사에서 따온 제목이다. 햄릿이 그토록 공감을 주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를 질문하는 단독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진실을 알기 위해 연극 무대를 꾸미는 햄릿처럼 심씨에게도 연극은 삶의 시험대였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던 그는 선배 손에 이끌려 1982년 현대극단에 입단하고 1983년 국립극장 3기 연수생으로 연기·노래·춤 등 본격적인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정극 무대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뉴욕에서 유학하고 갓 돌아온 김수남 청주대 교수를 만나면서 실험예술로 기울어졌다.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거리에서 그는 형식과 위계에 저항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직접 연출하고 출연한 <원시인이 되기 위한 벙어리 몸짓>(1986)에 이어 <심철종 몸짓 개>(1989)를 발표하면서 화제가 됐다. 넥타이 매고 양복 입은 남자가 개줄에 목이 묶인 채 헐떡이며 울부짖는 모습이 페이소스를 자아냈다. 국내보다 일본 공연계가 더욱 그를 인정하고 지지했다. <8촌광산 진혼굿>이 1990년 후쿠시마 실험예술제에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도쿄국제실험예술제, 도쿄국제연극제, 후지노페스티벌, 젊은연출가페스티벌에 <탈각> <엘리판트맨> <물과 불> <슈가> 등이 소개됐다. 2000년에는 일본 국제교류기금 초청 연수도 다녀왔다.

실험극을 보기 위해 극장에 오지 않는 관객들을 찾아 그는 종종 거리로 나섰다. 아랫도리만 가린 채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등 파격적 공연을 벌이다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과태료를 낸 것만 서너번이다. 씨어터제로 극장을 재개관했을 때는 천장에 레일을 달아 공중회전좌석을 만들고 화장실 변기 앞에 무대와 극장 외부, 비디오아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모니터를 설치하는 등 관객을 향한 손짓과 몸짓을 그치지 않았다.

강원 고성군 화진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새벽마다 아침잠을 떨치고 떠오르는 빨간 해를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갔다. 그것이 신내림의 시작이었으며 무당 역할을 자처하면서 연극 인생을 이어왔다. 한바탕 신나는 굿판을 벌이다가 굿판이 시원치 않으면 시름시름 앓기를 반복했다. 죽음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일찌감치 <유언장 쓰기>(2000)란 퍼포먼스도 했던 그는 평생 해온 연극을 압축시킨 한평극장 무대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죽음이란 뭘까, 도대체 뭘까.” 그 답은 울고 웃으며 유한한 삶을 실컷 향유하는 것.

■심철종

[집이 사람이다] (21) 한 뼘 무대 위, 단 한 명의 배우…온 세상을 펼친다


1960년 부산생. 1983년 국립극장 연수원을 수료한 뒤 <원시인이 되기 위한 벙어리 몸짓>(1986년 바탕골소극장)을 만들면서 연출가이자 배우로 활동해왔다. <개> <탈각> <엘리판트맨> <99스트레스굿> 등의 연출·출연작이 있으며 연극 <햄릿머신>의 배우로 20년간 장기 공연했다. 영화 <형사> <암살> 등에도 출연했다. 극단 씨어터제로 대표이며 한평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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