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바닷바람 피해 움푹 숨은 집…오래 낡아온 역사가 좋았다

2016.06.17 21:15 입력 2016.06.18 16:17 수정
글 한윤정 선임기자 , 사진 박기호 사진가

역사학자 박옥걸의 ‘보길도 고택’

정자리 고택은 보길도의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주변보다 움푹 들어간 땅에 지어졌다. 고택 뒷정원에서 박 교수의 장모인 김전 여사(가운데)와 동네 할머니들이 꽃을 심고 있다.

정자리 고택은 보길도의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주변보다 움푹 들어간 땅에 지어졌다. 고택 뒷정원에서 박 교수의 장모인 김전 여사(가운데)와 동네 할머니들이 꽃을 심고 있다.

역사학자 박옥걸 아주대 명예교수(71)와 전남 완도군 보길도의 인연은 4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월간 ‘샘터’ 편집부 신입사원이던 그에게 선배 김재희씨(전 유니세프 일본·호주 대표)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바쁘니 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보길도 언니네 집에 데려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여름휴가를 활용해 보길도 여행도 할 겸 잘 됐다 싶어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한밤중에 용산역에서 호남선을 타고 새벽에 목포역에 도착했다. 다시 오전 9시 배를 타고 진도, 어란, 송호리를 거쳐 오후 3시쯤 보길도에 내렸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앞정원. 왼쪽  건물은 안채로 통하는 행랑채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앞정원. 왼쪽 건물은 안채로 통하는 행랑채다.

그곳 정자리에는 경주 김씨 후손인 김양제씨(작고)와 김재희씨 언니인 부인 김전씨, 1남4녀의 자녀들이 사는 고택이 있었다. 그 집에서 이틀을 지낸 뒤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여행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 얼마 뒤 맏딸 보정씨와 만나보겠느냐고 물어봐서 그러겠다고 했더니 서울로 올려보내 정식 맞선을 보았다. 다음 해 결혼해 부부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딸 셋을 낳았다. “고향이 서울이고 보길도는 처음이었지만 낯설기는커녕 너무 좋았습니다. 그후 매년 여름마다 처가에 내려왔죠.”

사랑채 대청에는 박 교수의 장인 김양제씨 등 3대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랑채 대청에는 박 교수의 장인 김양제씨 등 3대의 사진이 걸려있다.

결혼한 이듬해에는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부터 가까웠던 소설가 최인호, 국문학자 장부일, 기업인 곽명규 부부 등 네 쌍이 여름휴가를 맞아 고택을 찾았다. 당시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기차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작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채 소설 이야기를 하자 “내가 바로 최인호야”라며 그들을 꽉 껴안았다고 한다.

‘샘터’ 편집장을 지낸 뒤 1978년 사직하고 모교인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에 돌아간 박씨는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92년 아주대 한국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보길도에 머무는 시간도 더욱 길어졌다. 여름방학이면 섬에 내려와 쉬면서 책 읽고 논문을 썼다. 장인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낚시를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정년 퇴임 10년 전부터 은퇴하면 보길도에 내려가 살겠다고 생각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길도를 빗자루질하다’란 뜻의 추보(甫)란 자호를 지어 친구들 사이에서 쓰기도 했다. 아내는 오히려 시골생활이 힘든데다 도시에서 정든 친구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며 친정행을 망설였으나 박 교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2011년 정자리 고택으로 내려와 자리잡은 지 6년째 접어든다.

보길도는 완도군 화흥포항에서 청해진카페리호를 타고 40분간 바닷길을 달려 인근 노화도 동천항에 내린 뒤 차로 들어간다.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다리가 생기면서 보길도행 배는 끊어졌다. 노화도는 논이 넓고 저수지와 광산이 있으며 상업시설도 갖춘데 비해 보길도는 높고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마을의 느낌을 준다.

관광지로 유명한 보길도는 조선 중기 문신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공간이다. 고산은 광해군 때 성균관 유생으로 정권 실세인 이이첨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로 유배되는 등 강성 남인 정치인으로서 평생 20여년의 유배생활을 했다. 인조 때 장원 급제해 봉림대군의 스승을 지내기도 했으나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부끄럽게 생각해 제주로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했다.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마치 피어나는 연꽃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부용동에 자리잡은 그는 격자봉 아래 낙서재라는 집을 짓고 계곡수를 받아 만든 연못 곁에 세연정을 세웠다. 동천석실은 차를 마시던 곳, 곡수당은 그의 아들이 기거하던 집이다. 고산은 가문의 재력을 바탕으로 보길도에 유토피아를 건설했으며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떠나보냈던 항구에 맑은 이별이란 뜻의 청별항이란 이름을 붙이는 등 품격있는 지명을 남겼다.

고산의 뒤를 이어 보길도에 자리잡은 또 다른 양반이 김서온이다. 경주 김씨 후손인 그는 인조 때 통훈대부라는 벼슬을 지내고 보길도로 내려왔는데, 박 교수의 장인 김양제씨(1923~1997)가 300년간 내려온 이 집안의 10대손이다. 개화기 이후 이 집안은 산림, 매립, 교육사업으로 부를 일구었다. 보길도 서쪽 정자리에 자리잡은 경주 김씨 고택은 정확한 건립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1800년대 중반부터 여러 대에 걸쳐 조금씩 증축된 집이다.

황원포를 지나 대로변에 있는 고택은 폭 파묻혀 얼핏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랜 세월 난대성 식물이 지붕보다 웃자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근 지형을 살펴보면 도로와 밭이 담장 높이와 비슷하다. 섬이다 보니 바람 피해를 막으려 일부러 움푹 들어간 땅에 집을 지은 것이다. 800여평의 대지에 건물 4채와 150여종의 수종이 어우러져 작은 식물원을 연상시킨다.

대문 양쪽으로 방을 드린 대문채를 시작으로, 맞은편은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다. 가운데가 대청, 양쪽에는 방이 있는데 앞뒤가 유리창으로 훤히 트였다.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 앞정원에는 은행나무와 나한송을 비롯해 금목서, 석류, 목백 등의 나무들이 빼곡하다. 특히 금목서는 10월에 꽃이 피면 향기가 대단해서 앞섬 넙도로 시집간 딸이 ‘친정에 금목서가 피었구나’ 알아차릴 정도였다고 한다.

전정 왼쪽에 세로 방향으로 창고와 욕실이 딸린 행랑채가 있고 가운데 문을 지나면 여성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기역자 모양의 안채에는 박 교수 부부의 방, 부엌, 장모 김전 할머니의 방이 나란히 있고 꺾이는 부분에 작은 마루와 조상들의 신주를 모신 방이 있다. 외양은 고택이지만 생활하기 편리하도록 입식 부엌과 침실, 기름보일러로 바꿨다. 안채 툇마루에 앉아 내려다보이는 안마당에는 은목서와 목련 사이로 은초롱, 낮달맞이 등 키 작은 꽃들이 소담스럽게 핀 화단이 있다.

안채를 돌아가면 널찍한 뒷정원이 나온다. 옛날 일꾼들이 살던 집을 허문 자리라서 2단에 걸쳐 방사형으로 퍼져 있다. 주인 모녀가 정성껏 가꾼 꽃밭과 텃밭 가장자리에서 살구와 비슷한 열매를 맺는 비파나무가 자라고 있다. 겨울에도 채소가 얼지 않아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반찬을 상에 올리는 게 이 집의 자부심이다. 마침 동네 할머니들이 주인 할머니를 도와 모종을 심고 있었다. 반듯한 잔디밭 한구석에는 예사롭지 않은 탑이 눈에 띈다.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던 신라 후기 장보고 시대에 조성된 중암사지에 방치돼 있던 혜일 스님 부도로 추정된다.

가로 2채, 세로 2채가 처마를 맞댄 고택의 모습은 후정에서도, 행랑채와 연결된 옥상에서도 한눈 아래 들어온다. 지금은 낡고 이끼 낀 기와에서 과거의 영화가 느껴진다. 행랑채에 쓴 벽돌은 중국건축의 영향이 보인다. 현재 완도군 문화재인 이 집은 전라남도 문화재 지정을 권유받을 만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부터 유명했던 고택이라서 이 집에 다녀간 사람들이 많다. 고산 윤선도를 공부하는 국문학자, 난대성 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자, 여행객 등이다. 60년 넘게 이 집에 살고 있는 김전 할머니는 30년 만에 다시 만난 젊은이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행길에 태풍을 만난 남녀 대학생 8명이 ‘정자리 고택으로 가보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밤늦게 찾아왔다. 돈이 다 떨어진 이들을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고 여비까지 줘서 보냈다. “갚을 생각은 말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대신 도와주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30년이 지난 뒤 네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그때 젊은이들이었다. 이 집과 할머니를 잊지 못했다며 하얀 봉투를 건넸다.

경기여고 출신으로 아직도 세련된 미모를 간직한 할머니는 6·25 직전 서울에서 제일은행에 다니던 김양제씨와 선을 봐서 결혼했다. 전쟁이 터지자 보길도로 피란을 왔다가 서울로 갔는데 종손이 죽으면서 다시 내려와 가업을 이었다. 그는 “시아버님이 계실 때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찾아와 점심을 일곱번 차린 적도 있다”고 한다. 시아버지 김상근씨가 1923년 보길초등학교를 세웠고 남편은 노화도에 있는 노화중·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남편을 여읜 뒤 오랫동안 혼자 고택을 지켰던 그는 “딸과 사위가 내려와서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장모와 사위에게 보길도는 제2의 고향이다. 박 교수는 “보길도가 많이 변하지 않고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 소중하다”고 했다. 그는 2003년 식수 부족을 이유로 부용동 윤선도 유적지 인근에 대규모 댐 건설이 추진되자 당시 섬에 살던 강제윤 시인(섬연구소장) 등과 더불어 보길도사랑공동연대를 만들어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에 다리가 놓이는 대신, 옛날처럼 배로 드나들었으면 보길도의 입구인 청별항이 더욱 발전했을 것이란 아쉬움도 있다.

역사학자로서 박 교수는 고려시대 귀화인을 집중 연구했다. 고려 인구 210만명 가운데 10%가량이 귀화인이었고 발해유민, 여진계, 원계, 거란계, 일본계, 중국계 순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초기에는 당나라 멸망 이후 고려에서 출세 기회를 찾는 한족 지식인이 많았고, 중기에는 여진·거란 등 북방계통 민족의 귀화와 함께 발해 유민들이 대거 유입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발해유민이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과 달리, 말갈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됐다. 후기에는 원나라가 고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만큼 아라비아, 일본, 동남아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원나라를 통해 들어왔다.

그는 “고려는 귀화인의 정착을 정책으로 권장하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제도와 문물, 기술을 수입해 적극 활용했다”며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깨져야 다문화시대에 맞는 개방적, 진취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퇴 이후 귀농·귀촌을 꿈꾸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이웃에 동화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섬에 사는 즐거움을 이렇게 말했다. “그 옛날에도 유배가 괴롭기만 했겠습니까. 유유자적하는 삶의 즐거움이 있는 법이지요.” 보길도 생활이 길어질수록 서울에 올라가는 일은 점점 뜸해진다. 아침, 저녁에 집안일을 주로 하고 낮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로 보낸다. 수많은 나무들이 떨구는 나뭇잎이 이른 새벽 그의 비질에 쓸려서 정원은 말끔하다. ‘추보’를 자처한 그의 보길도 사랑이 느껴진다.

■박옥걸

[집이 사람이다] (23) 바닷바람 피해 움푹 숨은 집…오래 낡아온 역사가 좋았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샘터’ 편집부 직원과 편집장을 지냈으며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아주대 한국사학과 교수를 역임한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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