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이념서 심리로, 고발서 뉘우침으로…한국전쟁 보는 눈을 바꾸다

2017.02.14 21:02 입력 2017.02.22 10:39 수정
방민호 |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김성곤·방민호의 현대문학 명장면 20] (19)이념서 심리로, 고발서 뉘우침으로…한국전쟁 보는 눈을 바꾸다

겨울이다. 깊은 겨울이다. 계절이 단순히 겨울이 아니요, 시대가 겨울이요, ‘우리들’이 ‘나’와 ‘남’을 나누고 가르는 그 마음이 겨울인 겨울이다. 그래서 이 겨울은 일종의 종교적 심정 없이는 견디고 넘어서기 어려운 듯한 절박감마저 자아낸다.

종교적 심정이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수난이나 고통이 깊어 인간 개체 각각의 능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의식이다. 그리하여 더 초월적이고 더 절대적인 존재와 그의 힘에 의지하려는 안타까운 간구의 마음이다.

그것은 일종의 회향이며, 회심이다. 우리를, 나 자신을 자신 있게 믿는 마음으로부터 그럴 수 없음을 절박하게 깨닫는 마음, 그로부터 우리 또는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더 높고 깊은 원리를 찾는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떠올리게 되는 작가가 있다. 바로 박완서(1931·10·20~2011·1·22·사진)다. 이 겨울에 그가 1988년에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후 그 참척의 고통을 신앙고백으로 옮겼다는 <한 말씀만 하소서>(생활성서, 1990·9~1991·9)의, 그 한 말씀을 구한다면 엉뚱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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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가 세상을 떠난 것이 벌써 여섯 해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는 세상에 따뜻함과 부드러움, 관용, 용서 같은 미덕들의 이미지로 세상에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문학사에 남긴 자신의 흔적이 어떤 위상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고 명백하게 분석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위대한 이야기꾼이었고 우리에게 잊힐 수 없는 작품들을 선사하고 떠났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박완서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하고 묻고자 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그가 남긴 작품의 제목으로 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 1989년 여름호)라는 그 말처럼 박완서는 우리에게 잊어서는 안될 경험들을 복원시켜 제시하고 싶어 했다.

박완서가 이를 위해 먼저 시도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의 고백이었다. 자신의 삶의 고백이 먼저 있고서야 우리가 공유해야 할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자신의 전쟁 체험을 그린 <나목>으로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당선됨으로써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두 번째로 발표한 장편소설 역시 자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한발기>(‘여성동아’, 1971·7~1972·11)는 나중에 <목마른 계절>(수문서관, 1978)로 제목이 바뀌어 출판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세 편의 <엄마의 말뚝> 연작(‘문학사상’, 1980·9, 1981·8 및 ‘작가세계’, 1991년 봄)을 써내고 급기야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 1992)와 그 속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 1995)를 펴냈다.

우리는 이 여러 편의 소설을 통하여 그가 집요하고도 새롭게, 더 구체적이고도 내밀하게 제시하고자 한 그 자신의 경험이 무엇인지 안다. 전쟁 중에 그의 오빠는 의용군으로 나가 총상을 입고 돌아왔고 끝내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 전쟁의 시대에 재빨리 한강을 넘어 피란을 가지 못한 사람들은 잔류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피란 갔다 돌아온 자들이 가하는, 의혹에서 기인된 가혹한 처분을 감당해야 했다.

박완서는 오빠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6·25 전쟁의 이념적 대결과 살상, 죽음을 그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고백적으로 제시하려 했다. 그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그리고 1990년대로 시대적 환경이 바뀌어 감에 따라 그 자신의 경험을 김정은 같은 젊은 연구자가 말했듯이 일종의 다시쓰기, 반복 서사화의 형태로 집요하게 변주해 나갔고(‘박완서 전쟁 체험 소설에 나타난 여성 목소리의 의미 연구’, 2015), 이는 전쟁과 살상이 자신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헤치고자 한 욕구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들을 써나가는 와중에 문제작이라 할 만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한국일보, 1982·1·5~1983·1·15), 즉 한국전쟁 중 1·4 후퇴의 피란길에서 헤어진 ‘이산가족’, 수지와 수인, 수철의 이야기를 그린 문제작이 탄생한다. 이 작품이 문제적인 것은, 이것이 ‘나’를 넘어선 ‘우리’의 이야기이자, 단순한 전쟁의 이야기를 넘어 그 전쟁의 시대로부터 이 소설이 연재되던 1980년대 초까지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총체적이면서도 내밀한 성찰과 고백을 요청하는 데 있다.

박완서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휘청거리는 오후>의 포스터.

박완서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휘청거리는 오후>의 포스터.

여기서 박완서는 물질을 숭배하고 자기 행복의 욕망에 들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과연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느냐고 묻는다. 전쟁과 가난이 우리를 반목하게 하고 이기적으로 만들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인가? 이 물음의 방식에서 박완서는 결정적으로 한국전쟁 이야기를 즐겨 그린 남성 작가들과 갈라졌다.

남성 작가들 가운데 이 전쟁 체험을 문학적으로 가장 충만하게 소화한 세대는 1940년 전후 출생한 작가들이다. 이청준, 현기영, 이문구, 김원일, 조세희, 황석영, 조정래 등으로 연결되는 이 작가들에 있어 한국전쟁은 대체로 이념전쟁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서로를 적대시하고 이 적대를 인간 조건의 최저한도 아래로까지 밀어붙인 전쟁이었다.

이들은 어떤 거시적 담론의 배경 아래 이 전쟁을 해석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적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지배하면서 민족주의와 계급주의,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패권 다툼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고, 그렇다면 이 전쟁의 경험에 대한 교훈은 이념을 해체하는 것이 되어야 했다.

박완서는 이와 다르게 전쟁을 읽었다. 언니 수지로 하여금 동생 수인이(=오목이)를 버리게 한 것은 밥 한 덩이라도 더 먹고자 하는, 그러면서도 그 이기적인 욕망을 감춘 채 사람들로부터 선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감추어진 욕망이었다. 작가는 물었다. 6·25 전쟁은 오목이 같은 수많은 고아들을 양산했는데 그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버림받은 것은 전쟁 때문이 아니라 전쟁 가운데서도 자신은 아이와 부모를 버리더라도 살아남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었느냐고. 그리고 그 이후의 산업화와 개발화 과정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남을, 자신이 사랑해야 할 가족의 범주로부터 ‘체계적으로’, 또 집요하게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더냐고.

작가의 육필원고.

작가의 육필원고.

그리하여 박완서는 작품의 말미에 가서 오목이의 죽음이 임박해서야 회심에 이르게 된 수지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써냈다.

수지는 처음으로 그 겨울에 저지른 죄와 그 죄의식 때문에 떠맡게 된 온갖 근심을 자기만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되자 근심조차 소중했다. 마치 자기만의 진실인 양 그것을 조금만 덜어내도 단박 삶이 떳떳치 못해질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순간 뼈가 시리게 고독했지만 떳떳했고, 떳떳하다는 느낌은 그지없이 좋았다. 파티의 즐거움이나 그녀가 여태껏 맛본 어떤 행복감보다도.

자신의 죄를 거부하지 않고 죄로서 받아들였을 때, 수지는 오랜 마음의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 그녀 스스로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한국문학사에서 박완서가 무엇을 기여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게 된다. 그는 한국전쟁을 정신적으로, 내면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할 수 있었던 많지 않은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성차별적인 문장일지는 몰라도, 그가 여성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필자는 생전에 이 작가를 몇 번 만나뵌 적이 있다. 그중에 한 번은 서울과 구리시의 아차산 밑 아치울 마을에 살던 이 분을 자택으로 찾아뵌 것이다. 아마도 여름이었던 것 같다. 거실에 양란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우리 일행을 맞아주신 그분, 넓은 베란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흰 꽃들을 어루만지며, 이것들 참 극성스럽게도 핀다고 사랑스러운 핀잔을 하셨다.

박완서라는 작가는 따뜻함과 부드러운 느낌 없이 상기되지 않는다. 늘 웃는 모습을 잃지 않았던 것 같고, 실천문학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장편소설을 내주기도 했고, 가까운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을 깊이 수용하여 세상을 떠날 때도 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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