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남은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요"

2018.05.11 14:58

변호사였다가 영화인이 됐고, 선거과정에서 몇 차례 정치판에도 몸을 담갔다. 최근에는 ‘작가’의 칭호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넘치는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거나,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사람은 아닌 듯 보인다. 차분히 내면을 돌아보면서도 새로운 일을 하는 데 두려움은 없는 사람에 가깝다. 스스로는 “초식남인지는 모르겠지만 육식남은 확실히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같은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으며, 한때 그에게 자신의 서울시장 선거캠프 비서실장을 맡기기도 했던 강금실 변호사는 조광희(52)에게서 “시골에서 올라와서 악착스레 사신 부모님 덕에 서울 남자로 성장했으나 사회에 적응 못하는 불안을 안고 있는 외로운 소년의 정체성”을 봤다. 장편소설 <리셋>(솔)과 산문집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강)을 동시에 펴낸 조광희를 최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리셋>은 현직 서울시장의 의뢰를 받아 유력 정치인의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 강동호가 주인공이다. 강동호는 조사 과정에서 권력과 금력의 추악한 밀거래를 파악하지만, 오히려 피의자로 몰리는 위기에 빠진다. 추리소설의 형태를 갖춰 잘 읽히면서도, 묘사나 시선이 냉정하고, 한국사회 현실과의 이격이 크지 않다.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난해 안철수 후보의 대선캠프에 들어가기 전까지, 조광희가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묶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이 담긴 시론, 영화평, 개인적인 에세이 등이 고루 담겼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게 시론은 날카롭게 내지르고 에세이는 안으로 침잠한다.

지난 4일 서울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서 포즈를 취한 조광희 변호사<br />/김영민 기자

지난 4일 서울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서 포즈를 취한 조광희 변호사
/김영민 기자

- 소설을 쓰기 위해선 모종의 ‘결심’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카잔차키스, 도스토옙스키, 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를 좋아했습니다. 많은 문학청년이 그랬듯이, 실무적인 변호사 일을 하며 문학에 대한 생각은 판타지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2년쯤 전부터 조금씩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연구하고 만들어 시놉시스를 작성해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지난 파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그 시놉시스를 봤는데,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이니까 아무래도 제가 잘 아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독자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추리적 기법을 썼습니다. 제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온 영화, 정치를 버무린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 선거전이라든가, 정치인과 재벌의 결탁, 자금세탁 같은 부분은 따로 취재를 하셨나요.

“대부분 몇 번의 선거과정을 거치며 제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조세회피처나 재벌가의 미술품 수장고는 조금 취재했는데, 액면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한국의 정치, 법률 문화에선 실제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흥미롭게 하려고 더 세게, 복잡하게 그리진 않았습니다.”

- 검찰이 ‘악역’에 가깝게 등장합니다.

“역할 분담을 위해 그렇게 묘사한 측면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도 변호사, 판사, 검사 중 검사가 가장 부패하기 쉽다는 건 사실입니다. 변호사에겐 특별히 권력이랄 게 없고, 판사도 직업 특성상 공개적으로 재판하고 판결문을 내놓기 때문에 일탈이 어렵죠. 하지만 검찰은 내밀한 공간에 있고 권력은 크다보니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좀 더 높죠. 지금은 상대적인 민주정부 아래 있어서 괜찮은 상황이지만, 어느 정부가 들어와도 정치적인 입김에 흔들리지 않는 검찰을 만들어야 합니다. 변화가 불가역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산문집에는 “세상이 진실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법은 정치의 또 다른 몸짓에 지나지 않는 시대”라는 표현이 있다. 사법연수원 내의 ‘운동권 비밀동아리’ 동기 중 일부가 졸업과 함께 변호사가 아니라 판검사를 지원하고, 훗날 다시 모였을 때 ‘묘한 선민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 법률가들의 손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운명이 달려 있는 이 상황은 얼마나 고약한가”라고 조광희는 적었다.

- 당신도 법률가 아닙니까. 그런데 한국사회 내 법의 작동원리나 법률가 집단에 대해서는 무척 회의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도, 법률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막아내기 위해 필요합니다. 다만 법률가는 현상을 따라가다보니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많은 경우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에 또 다른 힘에 의해 오염될 여지가 있습니다. 언제나 시민의 바람에 비해서는 미진하죠. 법률가를 아예 나쁜 집단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좀 더 민주화시키고 올바르게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법률가 집단에 아쉬움은 있지만 회의적이지는 않습니다.”

- 산문집에는 10여년 전의 시론도 수록돼 있습니다. 지금과는 사회 분위기가 다른데요, 여전히 시의적이라고 보십니까.

“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 시선이 옳다는 건 입증됐습니다. 다만 다시 그 비슷한 시절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을까 묻고 싶어요. 이명박·박근혜 정권만큼은 아니겠지만, 전 여전히 사회가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노무현 정부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 엄청 뒤로 가지 않았습니까. 이명박 정권 시절 정연주 KBS 사장이 강제로 바뀌는 걸 보면서 ‘내가 착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성취가 있지만, 정치 개혁은 조금 더 진전되어야만 합니다.”

- 어떤 부분의 진전인가요.

“군부독재와 대결하면서, 독재의 비민주성을 닮아간 사람들이 있죠. 자기 것을 지키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한 사람들이 그런 지위 자체를 기득권화한 경우도 많고요. 새로운 사람이 수혈돼 발전해야 하는데, 새 사람이 들어가기엔 지금 정치권이 ‘아성’처럼 됐습니다.”

조광희의 장편 데뷔작 ‘리셋’

조광희의 장편 데뷔작 ‘리셋’

조광희의 산문집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

조광희의 산문집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

- 지난 두 번의 보수정권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MB 정부는 야비했습니다. 반대자들을 야비하게 공격하면서, 자기 편은 법률로 보호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을 흔들고, 사회적 자원을 낭비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덜 야비했지만 무능해서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다행이죠. 뭘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토대를 가지지 않은 정부였다고 생각합니다.”

- 안철수 전 의원의 두 차례 대선캠프에 모두 참여하셨죠.

“(대선캠프가 꾸려진) 2012년 여름 이전엔 아무런 인연이 없었습니다. 당시 안 의원은 국민적 인기는 높았지만 주변엔 실제로 정치를 해본 사람이 없었고, 문재인 후보 쪽엔 프로 정치인이 많았습니다. 전 ‘박근혜 대통령’만은 꼭 막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안 후보와 문 후보 중 누구든 이기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으며 안 후보의 요청이 있어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가까이 관찰한 바로는 훌륭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게 기성 정당의 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고, 안 의원 역시 기성 정치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받은 불이익도 있었습니다.”

- 결국은 지난 대선도 또 지셨습니다.

“세력이 약하다는 점이 전쟁에서는 힘들더군요. 저희쪽은 실수 한 번 하면 크게 휘청하는데, 상대편은 실수를 해도 크게 안 흔들려요.”

- 아예 정치권에 상주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 기질상 직접 정치하는 건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정치란 정치권력을 갖고 싶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설파하고, 자리를 얻는 걸 즐기는 사람이 해야죠. 사실 문재인 대통령도, 안철수 전 의원도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두 분 다 역사적인 이유로 소환된 분입니다.”

2012년 11월 대선 후보 단일화협상을 위해 만난 안철수 후보측 조광희 비서실장(왼쪽)과 문재인 후보측 박영선 선대위원장.<br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2012년 11월 대선 후보 단일화협상을 위해 만난 안철수 후보측 조광희 비서실장(왼쪽)과 문재인 후보측 박영선 선대위원장.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조광희는 1999년 알고 지내던 선배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임상수 감독을 만나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조광희는 임상수의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좋아했고, 임상수 역시 자신의 영화를 좋아한 조광희를 좋아했다.

조광희는 술친구 임상수를 통해 한국영화계 주요 인물들을 차례로 만났다. 김대우, 이재용, 허진호, 심재명, 차승재, 이준동 등과 친분을 맺었다. 사적인 친분은 법률 자문으로 이어졌다. 조광희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어느 날 밤에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몇 달 뒤에는 영화가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었다. 어제 마신 술이 내일의 예술이 되고 미래의 화폐가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예술이 되고 술이 되었다. 그곳은 신비한 동화와 날선 승부가 교차하는 세계였다.” 조광희는 아예 변호사 업무를 접고 영화사 봄의 대표로 영입돼 <밤과 낮> <멋진 하루> 등의 제작에 관여했고, 지금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파이엔터테인먼트라는 작은 제작사를 차려 꾸준히 영화를 기획하고 있다.

- 한국영화계 최대 현안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영화가 나와야 한다는 열망이 있죠. 스크린 독과점과 투자·배급·상영의 수직계열화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돼야 상황이 나아질 겁니다. 자유에만 맡기면 시장은 실패합니다. 자유를 제한하면 파이는 오히려 커집니다.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무제한의 자유는 없습니다. 영화산업의 수직계열화를 제한하지 않으면 영화시장은 결국 실패할 겁니다. 예를 들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한 가지 책만 진열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지금 극장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 법률가, 영화인, 정치인같이 이질적인 집단을 오가며 생활하셨잖아요. 이 집단의 특성을 각각 꼽을 수 있으신가요.

“문학이나 영화 하는 사람들은 좋습니다. 변호사는 굉장히 넓은 범위의 사람들인데요, 다행히도 제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는 코드가 맞습니다. 정치쪽 사람들은… 어렵습니다. 정치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져야 하는 기질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집요하고 어떻게든 수컷스러워야 합니다. 그런 캐릭터가 아닌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 안철수 전 의원은 개인의 업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초식남’은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 정치입니다.”

조광희 변호사가 영화사 봄 대표로 재직하던 시절 제작한 영화 ‘밤과 낮’

조광희 변호사가 영화사 봄 대표로 재직하던 시절 제작한 영화 ‘밤과 낮’

조광희 변호사가 영화사 봄 재직 대표로 재직하던 시절 제작한 ‘멋진 하루’.

조광희 변호사가 영화사 봄 재직 대표로 재직하던 시절 제작한 ‘멋진 하루’.

조광희의 소설 <리셋>의 영화화에 눈독을 들이는 영화계 주변 인사들이 있다고 한다. 소설에는 배우 이정재가 실명으로 나오는데, 이정재 역시 소설 속 묘사에 만족했다고 한다. 조광희는 “<리셋>이 영화화된다면 이정재가 주인공에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책을 읽은 편집자들은 조승우도 떠올린다”고 전했다. 조광희는 앞으로 동물 해방에 관한 소설, 안드로이드가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SF 법정드라마를 쓰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했다.

- 언제 행복하십니까.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산책할 때. 제가 서울의 공원이란 공원은 다 다녔습니다. 근심이 있으면 어디를 가든 괴롭죠. 나이가 들면서 근심을 관리하고, 주어진 과제를 처리해내는 능력이 늘어나고, 건강을 지키는 법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몸과 마음으로 두어 시간을 거닐면 참 행복합니다.”

조광희 변호사는 산책을 즐겨, 서울시내의 공원이란 공원은 다 가봤다고 한다. 이날 인터뷰 장소에도 백팩을 맨 캐주얼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김영민 기자

조광희 변호사는 산책을 즐겨, 서울시내의 공원이란 공원은 다 가봤다고 한다. 이날 인터뷰 장소에도 백팩을 맨 캐주얼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김영민 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