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수십년 전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세밀하게 직조된 문장의 진의를 알기 위해 여러 차례 다시 읽었던 것 같고, 우울과 허무에 가득 찬 젊은 시절의 바닷가 자취방을 다시 찾은 정취에 빠졌던 것도 같고, 그 방에서 벌어진 남녀 간의 정신적·육체적 실랑이를 ‘칼’과 ‘절망’과 ‘조바심’으로 표현해낸 작가의 감수성에 놀랐던 것도 같다. 하지만 확실히, 그때의 나는 이 대목에서 성폭행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무진기행’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사이 소설은 글자 하나 바뀌지 않았는데, 독법은 크게 달라졌다. 가수 겸 책방주인 요조는 경향신문 ‘내 인생의 책’에서 “내 인생에서 김승옥이 얼마나 소중한 작가인지 아주 길게 공을 들여 고백하고 싶다”고 전제했다. 그러나 페미니즘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강연을 들은 뒤 “언제 보아도 유려하고 손색없는, 내가 사랑하는 문장들 사이에, 강간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적었다. 요조는 이를 미처 읽어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작가 장정일 역시 한국일보 칼럼에서 “성폭행 범죄소설로도 읽힐 수가 있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여자를 농락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컷들의 간교하고 구역질나는 센티멘털리즘으로 읽힐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소설가 이제하의 페이스북 언급을 인용하며, ‘무진기행’에 대한 페미니즘 해석을 거들었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에서 강지윤은 김승옥의 남성인물들이 ‘힘의 세계’를 욕망하지 않고, 희생되는 여성들에게 죄의식을 갖는다고 읽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죄의식에서 “상황을 바꿀 의지는 없는 수동성”이 드러난다고 봤다. 요컨대 페미니즘이 포착한 김승옥의 세계는 “아주 매혹적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찜찜”하다.
페미니즘이 흔히 마주치는 반론 중 하나는 “페미니즘을 넘어 휴머니즘을 얘기하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backlash)가 강한 최근 상황일 뿐 아니라, 여성들이 작은 목소리라도 내기 시작한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50~1960년대 여성국극이 인기를 끌자, “여성국극이 아니라 (혼성)창극을 해야 한다”는 비판이 주류 남성평론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페미니즘은 ‘여성’, 휴머니즘은 ‘인간’을 대변하니 이러한 반론은 얼핏 타당하다. 하지만 이 반론이 간과하는 사실은, 그간의 휴머니즘은 ‘인간’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을 위장하는 가림막 역할을 했으며, 페미니즘은 그런 ‘휴머니즘’이 외면한 세계의 이면을 살피는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무진기행’의 허점을 들춰 한국문학사에서 추방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의 방법론이다. 그간 ‘무진기행’은 4·19세대 작가가 성취한 ‘감수성의 혁명’으로 상찬받았으나, 페미니즘의 시선을 거치면 자기고백이라는 알리바이로 약자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남성을 폭로하는 텍스트가 된다. 읽을 수 없었던 행간이 읽히고, 수면 아래 있던 작품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화석화됐던 정전이 새롭게 태어난다.
작가 이외수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단풍 사진을 올리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단풍, 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 절대로 거들떠보지 말아라. (…) 저 년이 떠난 뒤에는 이내 겨울이 닥칠 것이고 날이면 날마다 엄동설한, 북풍한설, 너만 외로움에 절어서 술독에 빠진 몰골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표현의 자유’ ‘작가적 상상력’을 들어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여성을 대상화함으로써 남성의 자기연민을 드러내는 시대착오적 정서를 비판하는 의견이 거셌다.
작가에게 당대 윤리의 수호자가 되어달라는 주장도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윤리의 수호자가 아닌,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제의 패륜이 오늘의 당연이 되거나 그 반대되는 일이 허다하니, 작가는 당대의 습관적 사유에 이의를 제기해달라는 요구다.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넘어서야 한다. 남성은 늘 고뇌하는 지식인이고, 여성은 늘 그를 위한 희생자거나 ‘화냥년’일 리는 없다.
작가에게 둔감과 무지가 자랑일 수는 없다.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성실하게 오늘의 관습, 내일의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수반될 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텍스트가 태어나고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