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 취재·진실 보도 닮은 ‘논문’…과학자도 저널리스트다

2019.03.22 16:22 입력 2019.03.22 16:29 수정
이대한

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연구실 앞 게시판에는 그동안 이 연구실에서 발표한 논문들이 연도순으로 걸려 있다. 두께는 얇지만, 논문 한 편이 발표되기까지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된다. 이대한 제공

연구실 앞 게시판에는 그동안 이 연구실에서 발표한 논문들이 연도순으로 걸려 있다. 두께는 얇지만, 논문 한 편이 발표되기까지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된다. 이대한 제공

과학자는 본질적으로 저널리스트다. 관찰과 실험이라는 ‘취재’의 결과물을 ‘기사(report 혹은 article)’로 작성하여 과학 ‘저널’을 통해 출판하는 것이 연구활동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취재웜(worm)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탐사보도 기자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연구실은 전 세계 각지에서 채집된 예쁜꼬마선충을 소장하고 있는데, 나는 이들의 페로몬 언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냉동실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벌레들을 깨워 그들의 사연을 취재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기사(article)를 낼 만큼 결과가 쌓여 논문 투고를 준비하고 있다.

논문은 과학 활동의 사회성과 역사성이 집약된 결정체다. 동료 과학자들의 평가를 거쳐야만 출판될 수 있는 논문을 통해 새로운 발견이 공유되고 또 다른 발견을 촉진한다. 동시에 한 편의 논문은 무수히 많은 다른 논문들이 이룩한 지식의 토대 위에 작성되며, 인용이라는 형태로 그 역사성을 표현한다. 출판된 논문은 또 다른 논문들에 인용되면서 자신도 역사성을 획득한다.

그렇기에 나를 포함한 과학자들에게 논문은 단순히 연구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 이상의 무엇이다. 발표된 논문은 동료 연구자들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논문의 질과 양은 저자의 연구 역량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과학자들이 실험을 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품을 들여 논문을 작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논문 작성 과정은 설득의 연속이다. 먼저 나를 설득해야 한다. 논문을 쓸 만큼 충분한 데이터가 쌓였는지,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이 적절한지, 논리적 비약은 없는지를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나를 설득할 수 없는 논문은 남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상관(boss)을 설득해야 한다. 분야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연구를 지도한 연구책임자(지도교수)는 ‘교신저자’라는 이름으로 저자 순서의 가장 끝에 등장한다. 교신저자는 논문에 유일하게 e메일 주소가 실리며 논문 내용과 소통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따라서 보스를 설득할 수 없다면 논문은 출판되기가 어렵다.

마침내 제1저자와 교신저자를 포함한 저자들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논문이 마련되면 저널 투고 단계에 들어간다. 가장 험난한 설득의 과정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평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저널이 지닌 한정된 지면을 내어줘야 할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논문은 실릴 수 없다. 지면의 제한이 없는 온라인 저널이라 할지라도 제한된 숫자의 논문만을 받아들인다.

과학 활동, 사회성·역사성 집약체
단순 정리한 보고서 이상의 가치

연구책임·편집자·동료 평가 거쳐
‘품질’ 이상 없다면 1년 만에 출판

일부 동료들, 연구부정 종종 발생
공동체에서 ‘거짓 공표’ 안타까워
과학계 ‘책임 비평’ 가치달성 고민

과학 저널에 소속되거나 위촉된 편집자(editor)들은 투고된 논문이 출판되기까지의 과정을 총괄한다. 현장 연구자가 아닌 저널 소속 편집자들이라 할지라도 상당한 연구 경력과 박사학위를 지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자신이 관장하는 연구 분야에 대한 풍부한 배경지식을 갖추고 있고, 수많은 논문을 검토하고 선별하여 출판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편집자를 전혀 설득하지 못한 논문은 보통 투고 직후 짧은 시간 안에 거절 통보를 받는다.

편집자를 넘어선 논문 앞에는 여전히 험난한 설득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동료 평가(peer review)의 관문이다. 편집자는 논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 국적을 불문하고 논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전 세계의 전문가들에게 논문 검토를 요청한다.

리뷰어(Reviewer)라고 불리는 평가자들은 논문을 읽고 편집자에게 의견을 전달한다. 만약 복수의 리뷰어들이 공통으로 논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편집자도 이를 바탕으로 저자들에게 거절 통보를 한다. 이 과정에서 리뷰어들은 솔직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익명으로 처리되어 보호받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실 동료 평가 첫 단계에서 바로 승인 통보를 받는 논문은 소수에 불과하다. 거절 통보를 받지 않은 많은 논문들도 ‘리비전(수정)’이라는 상당한 시련을 또 겪는다. 저자들은 리뷰어의 제안과 비판을 반영하기 위해 추가 연구와 논문 수정을 하거나,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리뷰어의 의견을 반박해야 한다. 편집자는 리뷰어들의 의견과 그에 대한 저자들의 대응을 총체적으로 검토한 후 승인, 재수정, 거절 여부를 결정한다.

이와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논문을 출판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내가 박사과정 중 진행한 한 연구는 논문 작성부터 투고까지 4개월, 투고부터 출판까지 8개월, 합해서 꼭 1년이 걸렸다. 현재 투고를 앞둔 논문도 비슷한 시간표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언론 저널리즘과 마찬가지로 과학 저널리즘에서도 ‘진실 보도’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현상을 규명하려는 과학 공동체에 거짓이 유통되면 학계가 엄청난 혼란과 비용을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현상이나 결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왜곡과 조작이 있어서는 안된다.

동료 평가라는 관문은 부정직하거나 부정확한 논문을 걸러내어 과학 시스템을 지탱하는 필터 역할을 한다. 동료 평가는 애초에 저자들이 논문을 쓰는 단계에서부터 동료 압력(peer pressure)을 느껴 더 진실하고 정확한 논문을 쓰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논문도, 저자도 함께 성장한다. 몰입해 있던 자신의 연구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연구의 의미와 중요성을 어필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다 놓치고 있던 학문적 맥락을 깨닫기도 하고, 리뷰어의 조언을 반영해 연구의 완성도를 높이고 새로운 관점으로 결과를 재해석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호랑이’ 같은 결과물을 꿈꾸며 시작했지만, 막상 다 쓰고 나면 ‘고양이’가 되어 있던 논문이 나를, 지도교수를, 편집자를, 리뷰어를 설득해 나가는 노력 속에서 몇 번의 변모를 통해 그나마 ‘표범’이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동료 평가에 기반한 논문 출판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동료들을 속이기로 독하게 마음먹은 저자의 거짓말을 탐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트라우마 같았던 황우석 사태 속에서 ‘사이언스’ 같은 저명한 저널의 편집자와 동료 평가 시스템도 연구 부정을 걸러내지 못했다. 게다가 대개 동료 평가는 자원봉사로 이뤄지고, 리뷰어들이 논문을 꼼꼼하게 검토하는 것은 순전히 리뷰어 개인의 선의와 부지런함에 기대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악한 동료들도 존재한다. 저자들을 경쟁자로 간주하여 의도적으로 논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논문에 담긴 미공개 정보를 빼돌려 자신의 연구에 활용하거나 친분이 있는 연구자에게 몰래 알려주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엔 동료 평가 과정에서 이러한 악당들을 만나 논문 발표가 지연되고, 그사이에 악당들이 먼저 비슷한 내용으로 논문을 발표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동료 평가 시스템의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몇 년 사이 출판 전 논문(preprint)을 논문 저장소(아카이브)에 선공개하는 보완적인 해결책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 보통 수개월 걸리는 리뷰 및 출판 과정을 거치기 전에 논문 초안을 공개하여 빠르게 새로운 발견을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 결과에 대한 우선권을 설정하여 악당 리뷰어가 논문 내용을 빼돌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지한다. 그 덕분에 저자들은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지난한 논문 출판 과정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리뷰어에 대한 책임감을 높이고 동료 평가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리뷰어의 정체를 공개하는 열린 동료 평가(open peer review)를 시도하는 저널들도 있다. 책임감 있는 동료 평가와 솔직하고 정확한 비평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모두 달성하기 위해 과학 출판계와 과학자 공동체는 함께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과학 공동체의 ‘진실 보도’ 시스템과 지속적인 개선 노력은 뉴미디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모두가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열었지만, 거짓도 쉽게 기사라는 형식적 탈을 쓰고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가짜뉴스의 시대도 열었다.

거짓이 유통되면 공동체가 망가지는 것은 과학자 사회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조사를 거쳐 규명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는 거짓이 유튜브와 카톡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멍들이고 소모적인 갈등을 부추기며, 인류를 죽음과 질병으로 몰아넣던 전염병으로부터 지켜주는 백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퍼지며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담긴 정신은, 거짓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방조하자는 게 아니라, 불편한 진실이 권력에 의해 억압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과학자 공동체에서 거짓을 공표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 과학 논문의 까다로운 출판 과정은 권력자가 검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학자 사회가 ‘진실 보도’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동의한 규범이다. 나도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르는 지난한 동료 평가의 과정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필자 이대한

[다른 삶]팩트 취재·진실 보도 닮은 ‘논문’…과학자도 저널리스트다


벌레 유전학자. 예쁜꼬마선충(노벨상도 여럿 배출한, 이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벌레다)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포닥)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에서 여전히 벌레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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