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몸 대구, 유럽도 한국도 ‘남획 흑역사’···소소한 청어는 하링·과메기로 ‘신문명’ 품다

2019.08.23 16:34 입력 2019.08.23 23:22 수정
주강현

세상을 움직인 대구와 청어

■ ‘국민생선’ 조기와 명태

세상은 종종 ‘하찮은’ 물고기 하나가 변화시키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서해의 조기와 동해의 명태가 조선시대 사회경제사에 미친 영향이 막대했다. 조기는 염장, 혹은 굴비로 변신해 제사상에 올랐고 엄청난 양이 팔려나갔다. 조기를 세는 기본 단위가 동(1000마리)인 것은 그만큼 흔하게 잡혔다는 증거다. 명태는 북어로 변신해 전국에 유통되었으며, 쌀과 더불어 현금과 거래되는 조선시대 ‘국민생선’이었다. 조기와 명태는 모두 ‘절 받는 물고기’로서 제사상, 차례상, 굿판, 고사상에 두루 등장했다. 물론 제주의 돔, 남해의 멸치처럼 그 영향력이 지대한 물고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경제사적으로 그 총량에서 조기와 명태를 능가할 수는 없다.

최초 미국 뉴펀들랜드 대구어장
1000년경 바스크 사람이 발견
19세기까지 절이고 말려 유통해
바이킹이 먹고 아메리카에 첫발
베르겐은 유럽 어업 본거지 명성

염장 청어, 한자동맹 출범 동력
15세기엔 어군이 북해로 대이동
스웨덴에서 네덜란드로 주도권
조선·일제 시대 단백질 보급원
하링은 북유럽 아침 뷔페 단골

물고기와 문명은 성쇠 함께해 와
지속가능 어업이 문명의 버팀목

한국의 사회경제사에서 조기와 명태를 빼놓을 수 없듯이 유럽의 역사에서는 대구와 청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싱싱한 대구를 들어 보인 스웨덴 말뫼의 상인.

한국의 사회경제사에서 조기와 명태를 빼놓을 수 없듯이 유럽의 역사에서는 대구와 청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싱싱한 대구를 들어 보인 스웨덴 말뫼의 상인.

그렇다면 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파장을 일으킨 물고기는 어떤 것일까. 미국의 해양저술가 마크 쿨란스키(Mark Kurlansky)는 <세상을 바꾼 물고기>란 책에서 대구를 꼽았다. 2015년 쿨란스키를 초청해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베르겐과 바스크족을 이야기했다. 뉴펀들랜드 대구어장은 1000년경에 고래를 잡던 바스크 사람이 발견했다. 16세기 초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세인트로렌스강에 당도했을 때 1000여척의 바스크배가 조업하고 있었다. 이로써 오랜 비밀의 어장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이전까지 이들 북아메리카의 대구어장은 온전히 바스크족이 독점하고 있었다. 베르겐도 한때 대구어업의 유럽 본거지였다. 현재 베르겐 대구어업은 파장을 고했다. 지금도 대구가 잡히기는 하지만 도시의 부를 가져다주던 화려한 영광에는 마침표가 찍혔다. 남획으로 대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르겐의 한자거리를 걷다보면 색색의 집이 사진에서 보듯이 줄지어 서 있다. 어느 집의 2층에 대구를 받쳐 든 어부 조각이 서 있다. 한때 대구를 팔아서 부를 축적하던 도시의 자화상이다. 대구를 끌어올리던 기중기가 서 있는 집에서 축제용 대구 조각을 깎고 있다. 대구는 사라졌어도 축제용으로나마 기억하는 중이다.

■ 가장 상업적인 생선, 대구

대서양 대구는 몸집이 크고 개체수가 많으며 맛이 담백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얕은 물을 좋아해서 잡기가 쉽다는 점도 대구가 가장 상업적인 생선이 되는 데 한몫했다. 한때는 대구라는 본디 이름 대신에 그냥 생선으로 통용될 정도로 흔했다. 대구는 역사적으로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바이킹은 먼 거리를 항해하는 동안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말린 대구를 주식 삼아서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청어는 중세 유럽 국가의 경제력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청어는 중세 유럽 국가의 경제력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소금에 절인 대구만으로 식민지는 물론이고 거래소와 무역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은 어느 생선가게에서나 싱싱한 대구를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전에는 특별한 만찬에서 대구를 먹기는 했지만, 싱싱한 대구를 먹는 경우는 드물었다. 19세기까지는 대구를 절이거나 말려서 팔았다. 오늘날 대구는 보편적인 식품이 되었다. 유럽의 가난한 나라, 아메리카, 서인도제도, 아프리카에는 대구를 주식으로 먹는 사람도 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대구로 만든 바칼리오가 유명하다.

베르겐의 가건물 어시장에서는 대구를 포함하여 북방게, 새우, 홍합, 연어 등을 판다. 어느 생선가게나 말린 대구를 장식품으로라도 걸어놓았다. 관광객은 안주용으로 생선을 사서 맥주와 함께 마시기도 한다. 19세기 말 세계수산박람회가 열려서 선진 트롤어법이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그 이후 범세계적인 남획의 출발점이 이 도시에서 마련되었다. 지금도 유럽시장에서 대구는 빠질 수 없는 생선이다. 베르겐의 자그마한 슈퍼에서도 대구를 팔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던 초대형 대구 어시장은 사라졌다.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다. 생선을 파는 젊은이들은 대구 대신 연어나 게 판매에 열을 올린다. 이 젊은이들은 대구의 번영을 구술로만 전해 들었을 것이다. 스웨덴 말뫼의 국립해양박물관을 보고 시내로 걸어오면서 생선가게에 들렀다. 점포가 서너 개 붙어있는 작은 어시장. 청년은 사진기를 들이밀자 대구를 집어 들어 포즈를 취해주었다. 말뫼의 어시장에서는 예전 방식 그대로 생물을 팔고 있다. 청년은 대구가 자기 어릴 적에는 너무도 흔한 생선이었는데 그만 귀하신 몸이 되었다고 푸념을 곁들인다. 거대한 대구산업은 몰락했어도 말뫼의 대구가 그렇듯이 북해와 발트해 곳곳에서 발견되는 중이다.

■ 청어가 일군 국력

유럽 역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또 하나의 생선을 꼽으라면 단연 청어다. 통조림과 냉동식품이 등장하기 전, 소금에 절인 청어가 중요했다. 교회가 1년에 100일이 넘는 금요일과 성일마다 고기를 금지시키면서 더욱 그랬다. 염장생선은 수요가 늘면서 발트해에서 한자동맹을 출범시키는 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독일 뤼벡은 덴마크와 협정을 맺어 스웨덴 스코네 해안의 산란지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다. 소금과 청어로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15세기에는 청어가 북해로 대거 이동하면서 네덜란드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암스테르담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청어 초절임 하링.

암스테르담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청어 초절임 하링.

해수면보다 낮은 습지에 건설된 네덜란드는 진창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네덜란드 사람은 청어 절임기술을 개발한다. 청어는 그네들에게 금광과도 같았다. 북해에서 1500여척의 배와 1만명 이상의 어부가 30만통 이상의 청어를 잡아들였으며 이를 수출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을 ‘청어의 도시’라 했다. 암스테르담 시내 곳곳 아무데서나 먹을 수 있는 하링(초절임)은 청어 전통의 흔적이다.

청어를 통에 넣어 포장하는 방법은 1350년경 네덜란드의 빌럼 뵈켈스존(Willem Beukelszoon)이 개발했다. 남서부 젤란트 태생의 이 어부는 청어를 잡자마자 내장을 빼내고 소금 대신에 간수에 절이면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러한 기술은 훨씬 이전에 발명되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네덜란드는 14세기 이후부터 절인 청어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청어를 잡은 즉시 절일 수 있게 되자, 짧은 어획기간 동안에 운반까지 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기름기가 많아서 부패하기 쉬운 청어지만 염장법이 개발되면서 값싼 청어가 더욱 싸져서 소비자의 환영을 받았다.

요즘은 꽁치가 일반적이지만 과메기의 원조는 청어다.

요즘은 꽁치가 일반적이지만 과메기의 원조는 청어다.

청어를 잡기 위해서 당시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역까지 과감하게 배를 몰고 나가던 네덜란드인, 그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적 토대를 갖춘 해양국가를 만들었다. 암스테르담 시민은 자신들의 도시가 청어의 뼈 위에 건설된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자신들을 ‘바다의 마부’라고도 애칭하기에 이른다.

초절임 청어 하링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북유럽 아무데서나 살 수 있다. 통조림병 하링은 별도의 어시장이 불필요할 정도로 일상화된 생활 구매품이 되었다. 적절하고도 정상적인 가격을 지불한 북유럽 호텔이라면, 적어도 아침 뷔페에 몇 종류의 하링을 선보일 것이다.

■풍요로운 청어의 기억

청어는 기복이 심한 물고기다. 한국에서도 청어는 많이 잡히다가 일제히 사라지고 다시 등장하곤 했다. 동해에도 청어가 한때는 가득 차서 ‘물 반 청어 반’이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동·서·남해안을 막론하고 상당히 많이 잡혔다. 서해에서는 황금 조기가 높은 지위를 누리기 전 ‘물고기의 임금’이 단연 청어였다. 젊은층에게는 청어의 각인된 이미지가 거의 없지만 노인들은 아직도 청어를 기억한다.

한때 대구 어업의 본거지였던 베르겐에 있는 대구를 손에 쥔 조형물.

한때 대구 어업의 본거지였던 베르겐에 있는 대구를 손에 쥔 조형물.

사람들은 그 청어를 잡아다 말려서 과메기를 만들었다. 오늘날은 ‘꽁치 과메기’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메기 하면 단연 ‘청어 과메기’였다. 본디 관목청어를 관목(貫目)으로 줄여 부르다가 관목이 ‘관메기’로, 다시금 ‘과메기’ 또는 ‘과미기’로 변했다. 그래서 과메기의 역사적 진실에 한결 가깝게 다가가려면 청어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푸른 등의 깔끔한 신사, 프록코트를 입은 것처럼 세련미를 풍기면서 해변으로 몰려와 알을 낳던 청어. 천청어(薦靑魚)라고 해서 왕실에도 진상했으며, 상인들이 많이 팔았다고 기록돼 있으니, 많이 잡혔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청어의 전성시대’였다. 동네마다 ‘비웃’이라 하여 말린 청어를 팔러 다니던 비웃 장사꾼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청어를 잡아 군량미와 바꾸는 대목이 나온다. 물물교환의 중심이던 쌀과 바꿀 정도로 환전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어획량에서도 절대적이었고 기름기가 많아 맛도 좋고, 큼직한데 값도 쌌다. 예로부터 가난한 선비들을 살찌게 한다는 의미의 ‘비유어(肥儒魚)’라는 별명을 얻기도 할 만큼 중요한 단백질 보급원이었다.

■ 문명 번성·쇠퇴와 함께한 물고기 역사

대구가 사라지고 유럽의 어업은 활기를 잃었다. 여전히 대구가 잡히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엄청난 규모의 ‘대구산업’은 종말을 고했다. 청어는 ‘소소한 물고기’로서 여전히 잡히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서해안 조기가 일찍이 사라졌고 굴비문화도 축소됐다. 큰 놈이 사라지고 씨알 작은 놈이 시장을 점유하는 시대가 되었다. 동해안 명태도 일제히 사라졌다. 오호츠크 수입태로 명맥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바다에서 잡히는 명태로 만든 북어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한국이란 국지적 범위로부터 유럽 대서양 전체의 글로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물고기의 번성과 쇠퇴는 문명의 번성과 쇠퇴를 동시에 가져왔다.

물고기가 사라진 포구와 항구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고, 어선은 발이 묶이고 어부들은 전직을 해야 한다. 이들 어업을 기반으로 번성하던 음식점과 여러 자재 공급업체가 몰락하고 관광객이 줄어들고 마침내 도시는 활력을 잃고 만다. 한 물고기의 번성과 쇠퇴가 도시와 항구의 현실을 좌우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생태와 어업만이 인류 문명이 버텨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일 것이다.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귀하신 몸 대구, 유럽도 한국도 ‘남획 흑역사’···소소한 청어는 하링·과메기로 ‘신문명’ 품다


▶필자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 전 제주대 석좌교수.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민속학, 고고학 등 융·복합적 전방위 연구로 세계를 누벼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등대의 세계사> <독도강치 멸종사>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환동해 문명사>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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