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박창수, ‘무용가 김영희’ 추모 무대…“평생 예술의 동반자, 웅장한 몸짓을 남겼다”

2019.10.01 21:33 입력 2019.10.03 09:57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지난 5월 타계한 무용가 김영희(오른쪽)가 무트댄스 단원들과 리허설 도중 환담하고 있다.  하우스콘서트 제공

지난 5월 타계한 무용가 김영희(오른쪽)가 무트댄스 단원들과 리허설 도중 환담하고 있다. 하우스콘서트 제공

음악가 박창수가 무용가 김영희를 회고한다. 한국춤의 호흡을 서구의 표현주의와 융합해낸 안무가, “한국 창작무용은 김영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평론가 김태원)라는 평을 들었던 김영희는 지난 5월, 62세를 일기로 아깝게 타계했다.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박창수, 헤어진 이후에도 ‘협업’을 끊임없이 이어갔던 그가 오는 28일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김영희를 기억하며’라는 제목의 추모 무대를 마련한다. 지난 9월 마지막 날, 대학로에서 만난 그는 “한때 아내였고 30년간 예술적 파트너였던 무용가 김영희”를 나직한 목소리로 회상했다. 그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전한다.

“처음 만난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1987년 12월30일, 혹독하게 추웠지만 하늘은 쨍하니 맑았다. 신촌의 창무춤터 앞에서 처음 본 순간 ‘굉장히 예쁘다!’라고 느꼈다. 근처 카페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피차의 예술관이 놀랄 만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같이 만든 첫 작품이 <어디만치 왔니>(1988)였다. 내가 음악을 작곡하고 그가 안무했다. 우리는 이 첫번째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일부터, 무대에 톱밥을 깔아 흙 위에서 춤추는 느낌을 연출하는 것 등을 모두 상의했다. 그가 창단한 무용단 ‘김영희무트댄스’의 ‘무트’는 대지를 뜻하는 ‘뭍’과 용기를 뜻하는 독일어 ‘Mut’에서 나왔다.

그렇게 만난 이후, 나는 내 음악을 펼칠 장소는 ‘김영희의 작품’이라고 여겼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모두 40개의 안무작을 남겼다. 초기의 세 작품을 제외하고 나머지 37개를 우리는 같이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거나 공연 때 즉흥연주를 펼쳤다. 그는 음악적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이에>(1995)를 연습하던 어느 날, 그가 ‘어제보다 템포가 좀 빨라졌어’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밤 컴퓨터로 확인해보니 메트로놈 측정치 250에서 251로 실제로 템포가 빨라져 있었다. 음악가인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그 미세한 차이를 그는 몸으로 알아차렸으니, 정말 대단한 감각이었다.

음악가 박창수/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음악가 박창수/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놀랍도록 서로 닮은 예술적 동지
한국 춤 호흡-서구 표현주의 융합
이혼 후에도 단절없이 함께 작업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처가 쪽 반대가 적지 않았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그는 ‘내 예술을 위해서라도 이 사람이 꼭 필요하다’며 자기 식구들을 설득했다. 1998년에 그렇게 어렵게 결혼해 2008년까지 부부로 살았다. 한데 왜 다퉜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딱 하나였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교수를 그만두라고 했다. 이화여대 무용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학교 일 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27년간 안식년도 없이 일했던 그는 학교와 자신의 무용단에 온전히 매달렸다. 자기 목숨보다 무트댄스가 먼저였던 사람이었다. 나는 ‘예술가 김영희’가 ‘대학’이라는 틀에 갇혀 죽어간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나라도 안정된 직장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우리는 그래서 다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우리가 이혼했다는 걸 몰랐다.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예술적 동반자’라는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혼 사실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 가운데 <후회> <기억> <독백>에 헤어진 이후의 심경이 담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2002년부터 ‘하우스 콘서트’(하콘)를 시작했는데, 이혼 후 ‘하콘’이 널리 알려지면서 내가 만든 것으로 공식화됐지만 사실은 그것도 공동 작업이었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엄밀히 말해 ‘하콘’은 그와 내가 함께 만든 것이었다.

우리의 작업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거대한 연작을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별도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각각의 작품 제목을 연결하면 하나의 긴 문장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에 꿈처럼 다시…’라든가, ‘말하지 않고 눈을 감고 내 안에 내가…’라는 식이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예술적 동지로서의 약속이 있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이전의 작품들이 직접적으로 감성을 건드렸다면 앞으로는 좀 더 냉정하고 구조적인 작품을 만들자는 약속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공유한 숙제였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춤 ‘무트댄스’
미안함과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

그가 폐암 진단을 받은 것은 지난 2월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메시지 답장이 늦어지고 답글이 짧아지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이유를 까맣게 몰랐다. 그는 나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학교에도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실은 지금도 그게 서운하다. 5월의 어느 날 일본 도쿄에 도착해 휴대폰을 켰더니 그의 부고가 당도해 있었다. 28일 추모 무대를 준비하면서 요즘 그의 생전 동영상을 자주 보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그가 꿈에 나타난다. 그는 키가 160㎝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크고 강렬했다. 그는 내가 감히 넘지 못할 산이었다. 예민한 예술가였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내 작업을 언제나 믿어줬고 나이 차에서 오는 불편함도 자신이 먼저 감수했다. 무용가 김영희에게 내 미안함과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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