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김지은의 기록 “살기 위해 선택한 고통, 세상은 내게 죽음을 요구했다”

2020.03.06 15:48 입력 2020.03.06 16:07 수정

안희정 전 충청남도지사의 성범죄를 고발한 피해 생존자 김지은이 책을 냈다. 출판사 봄알람 유튜브 캡쳐

안희정 전 충청남도지사의 성범죄를 고발한 피해 생존자 김지은이 책을 냈다. 출판사 봄알람 유튜브 캡쳐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지음

봄알람|384쪽|1만7000원

‘수행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유죄가 확정됐다. 지난해 3월5일 피해자 김지은씨가 언론에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1년6개월 만에 나온 법원의 최종 결론이다.’ 2019년 9월9일 오전 10시30분쯤 날아든 속보는 이렇게 시작됐다.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라 불렸던 ‘첫 번째 말하기’ 이후 꼬박 554일 만이었다. 이 지난한 싸움의 끝에 당사자인 저자는 “세상을 향한 두 번째 말하기”를 결심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이 책을 통해서다.

방송에서 피해 사실을 고발한 다음날, 저자는 직장에서 해고됐다. 임면권자였던 안희정이 지사직에서 사임했기 때문이다. “임면권자인 안희정이 해고를 시키거나 또는 안희정이 직위를 잃는 것만으로도 나의 계약은 즉시 해지되는 고용 형태였다. 미투를 함으로써 생존권을 잃는 흑백의 운명이 우려한 대로 바로 현실이 되었다.” 첫 번째 말하기로 인해 노동자 김지은의 노동할 권리가 박탈됐다.

2018년 8월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열린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8월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열린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은 인권침해였다. ‘인간다움’의 자리를 ‘피해자다움’이 채우기 시작했다. “세상과 단절”이 극심했던 2019년 3월과 4월 일기 형식으로 적은 글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이제 내게 꾸미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또다시 듣고 싶지 않다.”

선택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대가가 컸다. 마스크는 피부의 일부가 됐고, 잠깐 서 있는 동안 누가 볼까 좋아하던 호떡도 먹지 못했다. 이름이 불릴까 세탁소조차 가지 못했다. “안희정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도청에서의 지난 8개월을 마침내 스스로 끝냈다. 다만 부여잡고 지키려던 작은 나의 일상도 무참히 사라졌다.”

어려서는 서점 주인을 꿈꿨고,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며, 10년간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했다. ‘지극히 평범했던’ 여자는 재판을 거치며 사심으로 일을 한, 지사의 사생팬인,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여자가 됐다. 언론도 일조했다. “한 문장의 무분별한 선동을 주워 담는 데는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이 필요했다.” “나의 피해가 저잣거리의 팔기 좋은 물건이 된 것 같았다. 언론이 아닌 법정에 증거로 제출한 모든 것이 여과 없이 자극적인 소비재로 가판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해 9월9일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상고심 기각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법원은 안 전 지사 상고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김영민 기자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해 9월9일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상고심 기각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법원은 안 전 지사 상고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김영민 기자

대법 판결이 있은지 반 년이 되어가지만, 저자가 출연한 뉴스 영상 아래에는 1개월 전까지도 악성댓글이 달렸다. 대부분은 ‘가짜뉴스’에 기반한 내용이었다. “살기 위해 선택한 고통이었지만 세상은 내게 죽음을 요구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피해 사실을 인정 받았으나 돌아갈 직장과 일상은 사라진 뒤였다.

완전한 일상으로의 복귀는 아직 불투명하다. “완결을 바랐다. 기록을 모두 마치면 책이 끝나듯 이 힘겨운 싸움도 끝이 나길 소망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미결이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이 문장의 마침표가 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그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라며, 또 그럴 것이라 믿는다.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는 자들과 정치권 인사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한다. 제2, 제3의 안희정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일은 김지은이 아닌 ‘우리의 일’이다.

노동자 김지은의 기록 “살기 위해 선택한 고통, 세상은 내게 죽음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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