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의 달콤함 속에서 꾸준하게 치졸하고 이기적인 인간

2020.04.24 16:26 입력 2020.04.24 19:22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못난 남자’ 이태오 집중탐구

“넌 아직 이태오를 몰라. 그 자식이 어떤 놈인지.”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8회에서 과거 자신의 남편이던 이태오(박해준)와 불륜을 저질렀고 현재는 그의 부인인 여다경(한소희)에게 주인공 지선우(김희애)는 이렇게 경고한다. 이 드라마의 거의 모든 장면이 그러하듯 긴장감이 극대화된 대화지만, 오해해선 안 된다. 지선우의 이 경고가 마치 이태오라는 악의 심연에 대한 증언처럼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태오가 천만 영화 제작자로서 보란 듯이 성공해 돌아와 지선우에 대한 복수의 날을 갈고 있다는 걸 고려해도 그러하다. 지금껏 드라마에서 묘사된 그는 꾸준하게 치졸하고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황진미가 정확히 지적했듯 <부부의 세계>는 “잘난 여자도 빠지는 가부장제의 함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통찰을 이태오를 중심에 놓고 다시 적용한다면, 이태오처럼 못난 남자도 누릴 수 있는 가부장제의 달콤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 역시 <부부의 세계>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그 자식이 어떤 놈인지’ 지금까지의 드라마 안에서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가 있는 건 그래서다. 잘났지만 나쁜 놈이 아닌, 못나서 나쁜 놈인 이태오의 디테일 안에는 이 드라마가 조소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견고해 보이던 중산층 부부의 세계가 불륜으로 어그러지는 스토리를 그려낸 김희애, 박해준 주연의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시청률 20%(지난 18일 8회, 닐슨코리아)를 넘기며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JTBC 제공

견고해 보이던 중산층 부부의 세계가 불륜으로 어그러지는 스토리를 그려낸 김희애, 박해준 주연의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시청률 20%(지난 18일 8회, 닐슨코리아)를 넘기며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JTBC 제공

계획에 없던 혼전임신 반복하고
연애 중 무드송 재활용하는 뻔뻔함
서열에 대한 집착과 허영, 열등감
아들을 도구적으로 쓰는 ‘부성’…

과연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일까

1. 피임하지 않는 남자, 신뢰할 수 있다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됐지만 “책임감 때문이라면 그럴(결혼할) 필요 없”다는 지선우에게 이태오는 자동차 오디오로 스팅의 ‘My one and only love’를 튼 뒤 청혼한다. 지선우가 이를 받아들이며 드라마의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셈이지만, 이후 벌어질 모든 일들은 결과론일 뿐이라 차치하더라도 이태오의 프러포즈는 결코 미덥지 못하다. 계획하지 않은 혼전임신의 가장 큰 책임은 남성 파트너에게 있기 때문이다. 혼전임신이 부도덕하다는 뜻이 아니다. 결혼과 임신, 육아 분담에 대한 합의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임신을 하든 임신 중단을 하든 사건의 부담은 여성에게 훨씬 많이 부과된다. 이 때문에 임신 계획이 없다면 피임의 의무는 남성이 좀 더 적극적으로 지는 것이 맞다. 피임 방법 역시 남성 쪽이 훨씬 간편하고 안전하다. 21세기에 파트너를 위해 그 정도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남성이 결혼 후에는 믿음직한 가족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너무 낙관적이다. 과거에도 샜던 바가지는 여전히 새며, 여다경 역시 불륜 기간 동안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됐다. 지선우의 경고 이전에 이미 여다경이 지선우의 실수를 반복하리란 것이 예고된 셈이다.

2. 불륜에서조차 성의가 없는 남자에게 무슨 노력을 기대할 건가

이태오가 자기 어머니의 장례 기간 중 여다경과 밀회를 즐기며 과거 지선우에게 청혼할 때 틀었던 스팅의 ‘My one and only love’를 트는 장면은 지선우와 시청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태오의 뻔뻔함은 다른 의미에서도 놀라운데, 그가 자신에게 영감을 준다고까지 말하던 여다경과의 연애에서조차 무드송을 재활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태오가 설명숙(채국희)에게 여다경과의 관계에 대해 “걔랑 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아”라고 할 때 솔직히 너무 따분해서 하품을 할 뻔했다. 젊은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중년 남성들이 하는 빤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본인에게만은 그 말에 진정성이 있다면, 무드송 레퍼토리를 바꾸는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본인은 새로이 살아나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정작 본인의 음악적 취향을 업데이트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중년 남성이 말하는 불륜을 통한 영감이란, 게으름을 피우며 예술가 기분은 내겠다는 핑계에 불과하다.

불륜에조차 성의 없는 남자 이태오를 연기하는 배우 박해준.

불륜에조차 성의 없는 남자 이태오를 연기하는 배우 박해준.

3.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

설명숙에게 이태오는 지선우도 사랑하고 여다경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또한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의 색이 다르다고도 한다. 또한 지선우에게 강변한 대로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기도 하다. 그러니 둘 사이에서 괴로울 수도 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신뢰라는 주요 요소가 제거되어 있다. 부부로서 어느 정도 상호 구속적 관계를 맺은 지선우에 대한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면 바로 그 사랑을 위해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구하거나 이혼을 해야 한다(물론 이때도 용서는 구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은 여다경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이태오는 서로 다른 색깔의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에는 성욕과 가정의 안온함 등 본인에게 좋은 것만 포함되어 있으며 사랑하는 이에게 져야 할 신의의 의무와 부담은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이태오의 사랑 타령은 우유부단한 궤변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해서 “미치겠다”는 본인 감정이 우선이라면, 그냥 이태오는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다.

4. 부부의 세계보다 수컷의 세계가 중요한 수컷의 허영심

여다경과 도망치듯 고산시를 떠났던 이태오가 영화 제작자로서의 성공 이후 굳이 고산시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일견 이해되지 않는다. 지선우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는 설명은 부족하다. 그는 자신이 돌아왔으니 지선우만 고산을 떠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태오의 금의환향과 거창한 홈 파티는 차라리 과거부터 이어져온 그와 남자 동창들 사이의 서열놀이로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이혼 전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지선우를 “바보 같은 꿈이라도 늘 지지해주고 불안한 내 영혼을 든든히 품어주는 여자”라 부르며 감사해하는 모습은 뻔뻔하기도 하지만, 현재 동창 사이에서 딱히 내세울 것 없는 그가 아내의 위세를 빌려 ‘바보 같은 꿈’을 지켜나가는 예술가의 허세를 부린 것에 가깝다. 그러니 그의 멘트를 비웃듯 따라 하는 손제혁(김영민)과 거기에 동조해 웃는 친구들에 발끈하고 “불안함이 뭔지도 모르는 새끼”라는 손제혁에게 결국 주먹질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파티를 망쳤던 그가 성공하자 보복하듯 성대한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서열에 대한 그의 집착과 허영, 그리고 열등감을 잘 보여준다. 가족의 사적 영역조차 본인 인정투쟁에 끌어들이는 남자가 과연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일 수 있을까.

5. 아버지이고 싶으나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의 부성애

그나마 아들 이준영(전진서)에 대한 이태오의 애틋함은 종종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 이혼을 두려워하며 “준영이도 못 보게 할” 걸 걱정하거나, 다신 아들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지선우의 도발에 이성을 잃거나, 성공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었다는 그 마음들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혼으로 아이를 못 볼 게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면 여다경과의 관계를 정리했어야지, 안 들키기만 바라는 건 낙관도 무엇도 아닌 아버지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다. 야구선수 사인을 미끼로 이준영을 홈 파티에 부르는 것도 지선우를 도발하기 위해 아들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가깝다. 그 넓은 집에서 방황하던 이준영이 친구와 주먹다짐하기 직전까지 간 걸 발견하고 말린 건 결국 지선우였다. 그토록 부성애를 과시하던 그가 아들의 미래를 위해 했던 일은 아들 앞 변액보험으로 대출을 받아 쓴 것이었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6. 그래도 잘생겼잖아

그럼에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태오의 장점이 있다면, 또래 그 어느 남성과 비교해도 우위를 점할 멀끔한 허우대일 것이다. 물론 그의 외모를 감안해도 그가 지금껏 누린 것들이 이해되진 않는다. 그러니 더 의문이다. 위에서 나열한 모든 단점들을 갖추고 심지어 이태오만큼 멀쑥하지도 못한 남성들에게도 허용되는 부부의 세계란 존재해도 괜찮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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