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을 해도 욕 먹을 걸 알기에…타협하지 않아야 누릴 수 있는 자유

2020.03.20 17:01 입력 2020.03.20 17:07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하연수, 부당함과 거래하지 않는 비타협성

하연수 인성. 최근 올렸(다가 지웠)던 N번방 사건에 대한 게시물을 비롯해, 그동안 배우 하연수의 인스타그램 발언 및 관련 보도를 찾기 위해 포털에 ‘하연수 인’까지 타이핑하는 순간, 의도했던 ‘하연수 인스타’와 함께 자동 완성된 또 다른 단어의 조합이다. 하연수 인성. 이 단어의 자동 완성만으로도 그가 지금까지 겪어야 했던 공격과 험담의 총체가 그대로 그려지는 듯하다. 2016년 7월, 하연수는 인스타그램에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작품을 올리며 그의 계정을 태그 했고, 작품이 뭔지 알고 싶은데 방법이 없냐는 댓글에 “제가 태그를 해놓았는데 방법은 당연히 도록을 구매하시거나 구글링인데 구글링 하실 용의가 없어 보여서 답변드린다”며 작품명을 적었다가 소위 ‘인성 논란’이 불거졌다. 그는 결국 자필 사과문을 통해 “배우로서 모든 발언에 책임감을 갖고 신중한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 그가 했던 거라곤 조금만 신경 쓰면 하지 않을 만한 질문에 대해 조금만 신경써달라고 구체적으로 말한 것뿐이었다. 당연히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2019년에도 여전히 “작년에 작업한 ‘화조도’ 판매합니다”라는 하연수의 게시물엔 이미 “작년에 작업한”이라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직접 작업한 건가요”라는 댓글이 달렸고, 하연수는 지친 듯 “500번 정도 받은 질문이라 씁쓸하네요. 이젠 좀 알아주셨으면…그렇습니다. 그림 그린 지는 20년 되었고요”라고 반응했다가 ‘국제신문’으로부터 ‘하연수, 또 인스타 댓글 논란…이쯤 되면 인성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로 비난받아야 했다.

‘하연수 인성’이라는 자동 검색어는 그가 겪은 고난뿐 아니라 그 부당함까지 누적된 흔적처럼 보인다. 인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 하연수의 용기에 팬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응원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하연수 인스타그램 캡처

‘하연수 인성’이라는 자동 검색어는 그가 겪은 고난뿐 아니라 그 부당함까지 누적된 흔적처럼 보인다. 인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 하연수의 용기에 팬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응원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하연수 인스타그램 캡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연수라는 개인이 얼마나 자주 남성 커뮤니티 중심의 일부 대중, 무책임한 언론에 의해 ‘인성’에 대한 의심을 받아야 했는지 그 타임라인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지면 전부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가령 2018년 인스타그램에 올린 러시아 여행 게시물 중 서커스장 포토존의 무늬가 전범기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에 하연수는 “패턴이 집중선 모양이라 그렇다”고 해명했지만, 이에 대해 ‘스포츠월드’는 ‘하연수는 왜 논란을 자처할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예 올리지 말았으면 될 것을 결국 스스로 논란을 만들어냈고, 받지 않아도 될 비난을 받았다”며 마치 하연수 본인을 위하는 척했다. 역겨운 일이다. 잘못은 아니지만 논란이 될 것 같으면 하지 말라는 말은 훈수도 걱정도 아닌 억압일 뿐이다. 또한 벌어지지 않아도 될 논란을 만든 건 하연수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집중선에 대해 전범기의 책임을 물으려는 사람이다. 절 앞에서 찍은 사진에 만(卍)자가 찍혔다고 하켄크로이츠를 연상시키니 지워달라고 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뭔가 시비를 걸고 싶지만 근거를 대기 어려울 때 동원하는 것이 ‘인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러니 ‘하연수 인성’이라는 자동 검색어는 그가 겪은 고난뿐 아니라 그 부당함까지 누적된 흔적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가 그토록 오랜 기간 부당한 ‘인성 논란’에 시달렸단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간섭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본인의 ‘인성(personality)’을 지켜왔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검색창에서 자동 완성되는 단어 ‘하연수 인성’. SNS 게시물로 지금까지 수많은 공격을 겪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동안 일부 남성 중심의 커뮤니티와 언론에 의해 의심 받아온 ‘인성’
그럼에도 그는 최근 ‘N번방 사건’에 대해 엄정한 처벌을 요구하며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꼬투리를 잡으려 기다리는 ‘악플러 족속’ 앞에서 그냥 침묵하는 일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N번방 사건’이라 불리는 텔레그램 단톡방 기반 성범죄에 대해 “엄정한 처벌과 규탄을 받아 마땅하다”는 강력한 입장을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해 게시했다. 비록 일부 부정적인 댓글 때문인지 얼마 후 삭제하긴 했지만, 이후 다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해당 사건 취재 기사 캡처 이미지를 올리며 “꾸준히 널리널리 알리겠습니다”라고 지속적인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흔히 말하는 연예인의 선한 영향력이란 면에서 이미 훌륭한 일이지만,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미워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면서 그럴 수 있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당장 꼬투리 잡을 근거가 없으면 “‘N번방이라는 사건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한마디면 되지 철학가 납셨네”라고 비아냥대기라도 해야 발을 뻗고 잘 수 있는 게 악플러라는 족속이다. 밑도 끝도 없는 악의 앞에서 우리는 굳이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될 정당한 이유 백 가지를 찾아낼 수 있다. 앞서 비판적으로 인용한 “아예 올리지 말았으면 될 것을 결국 스스로 논란을 만들어냈고, 받지 않아도 될 비난을 받았다”는 기사의 논리는 유혹적이다. 맞는 말을 해도 욕을 먹을 거라는 걸 안다면, 그냥 침묵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이것이 권력이 개인을 따뜻하게 침묵시키는 방식이다. 그 유혹에 넘어간 사람을 비난하기란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기도 어렵다. 하연수는 자신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젠 그에 비례하게 (좋은) 영향력을 받으며 살겠다는 누리꾼의 고백에 “편견에 맞서고 싶진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이해받지 못하거나 공격받기도 하니까요. 심지어 침묵할 때도요”라 답했다. 그가 의도적인 투사는 아닐지 모른다. 다만 타협으로 진짜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하여 그가 그동안 보여준 무뚝뚝함과 단호함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개인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부당함과는 거래하지 않는 정치적 비타협성에 더 가까워 보인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성이라면, 그것은 타율적인 권위나 통념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를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 그것은 규범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율적 규범에 스스로를 구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레드벨벳 예리와의 ‘썰’을 풀어달라는 요청에 대해 “친구를 진심으로 배려한다면 말씀 주신 ‘썰’ 같은 걸 푸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 선을 긋고, 그냥 개인적 일화에 대한 궁금증이었단 추가 요청에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질문자께서 말씀 주신 일련의 일화를 (예리 본인과)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독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제 기준에서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피력합니다”라는 하연수의 답변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진정 자율적이다. 그가 말한 “제 기준”이란 단순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나와 합의되지 않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한다면, 나 역시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칸트가 말한 자기입법이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실천하기란 어렵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세상의 상냥한 억압 앞에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유난 떤다는 말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실제로 그가 겪은 일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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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수라는 개인의 용기에 대한 상찬이 당연하면서도 그에 그쳐선 안 되는 건 그래서다. 사회에 스민 부당한 통념과 폭력은 논리의 우월함이 아닌, 승리의 경험을 통해 유지된다. 그러니 우악스럽게 때론 회유하며 사과와 타협,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진하려 할 때마다 사과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이들을 통해 부당한 권위의 승리는 유예된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숭배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실천에 정당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불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가시적인 승리의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연수가, 유아인이 그러했듯 석학(도올 김용옥은 말고)과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좋겠다. 정우성에게 그러하듯 유수 매체가 그의 공적 발언이나 철학에 대해 귀 기울이고 전파하면 좋겠다. 선한 영향력이란 쌍방향적인 것이어야 한다. 자율적인 개인이 된다는 것이 꼭 외로워야 한다는 뜻일 수는 없다. 다음번 검색에선 하연수 인터뷰, 하연수 인류애, 하연수 인기, 하연수 인문학 같은 검색어가 자동 완성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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