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환자에게 필요한 건…약뿐 아니라 따뜻한 ‘소통의 말’

2024.02.14 22:18 입력 2024.02.15 10:07 수정

(4) 종합병원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의사·간호사와 환자 사이에 수많은 말과 글이 오간다. 때로 말은 약보다 효과가 좋다. 조태형 기자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의사·간호사와 환자 사이에 수많은 말과 글이 오간다. 때로 말은 약보다 효과가 좋다. 조태형 기자

때로는 ‘환자분’의 가슴앓이에 약보다는 말이 특효약
최고의 전문가인 의사들은 전문지식을 잘 풀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할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약 주고 ‘말’ 줘야 진정한 의미의 종합병원

검사와 의사는 싫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이기는 하나 죄를 지으면 만나는 이, 병에 걸리면 만나는 이니 좋을 수가 없다. 그래도 검사는 일생 동안 만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의사는 피하기가 쉽지 않거나 오히려 자주 만나는 것이 좋다. 병원의 분만실에서 생을 시작하고 영안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렇다. 중병에 걸리기 전에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자주 만날 수 있다면 그것도 축복이다. 그러니 의사는 좋아해야 한다.

많은 의사들이 모여 있는 곳, 진단과 치료를 위한 수많은 장비와 시설을 갖춘 곳, 그곳을 우리는 종합병원이라 부른다. 동네 의원에서 ‘큰 병원’을 권하면 무섭지만, 온갖 병을 달고 사는 이에게 붙여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란 별명은 슬프지만, 우리 곁에 종합병원이 있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는 환자와 이곳을 지키는 의사 또한 사람이니 그들 사이에 수많은 말과 글이 오간다. 아프고 슬픈 말이 많지만 그 속에서도 따뜻함은 넘쳐난다.

병(病), 아프고 슬프고 나쁜 그것

한자 ‘病’은 음과 훈이 모두 ‘병’이다. 한자의 음과 훈이 같다는 것은 이 한자에 해당하는 고유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고유어가 없었을까? 인간의 감정, 느낌, 상태는 ‘기쁨, 슬픔, 아픔, 배고픔’ 등으로 표현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두 번째 음절이 닮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각각 동사 ‘기ᇧ다, 슳다, 앓다, 곯다’에 ‘ᄇᆞ/브’가 붙어 형용사가 된 후 다시 명사가 된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아픔’은 동사 ‘앓다’에서 파생된 것이니 이 ‘앓다’의 목적어에 해당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법도 한데 흔적이 없다.

아픈 것의 종류, 즉 병의 이름도 고유어가 없거나 드물다. 가장 흔한 병인 감기는 ‘고뿔’이라는 고유어 병명이 있지만 다른 병은 그저 ‘배앓이, 속앓이, 가슴앓이’와 같이 ‘앓다’에 부위를 가리키는 말을 붙여 쓴다. 아픈 것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것, 진단이 가능해 치료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니 의학이 어느 정도 발달한 후에나 가능하다. 의학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것은 한자가 들어와 널리 쓰이던 시기고, 의학서 역시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고유어 병명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아픈 데가 가지가지니 종합병원은 아픈 종류에 따라 온갖 진료과목을 갖추고 있는데 환자 처지에서는 어렵기만 하다. 자주 찾는 동네 의원은 기본적으로 내과와 외과 정도의 구분만 있는데 종합병원은 진료과목이 수없이 쪼개져 있다. 그러니 배가 아픈 환자, 머리가 아픈 환자, 다리가 아픈 환자가 가야 할 데를 알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과목의 이름은 대부분 어려운 한자어 일색이니 글자는 알아도 그 속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병명은 또 어떤가? ‘조울증’과 ‘조현병’은 모두 ‘조’자 돌림인데 같은 한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의학이나 법학 등의 어려운 전문용어를 보통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늘 있어왔다. 지극히 전문적인 분야여서 의사나 율사들은 수련 과정부터 이 전문용어에 익숙해져 있으니 바꿀 마음이 별로 없다. 알아듣기 쉬운 말로 바꾼다고 해서 ‘뇌전증’을 ‘간질’로, 더 나아가 ‘지랄병’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결국 전문가들끼리는 전문용어를 쓰더라도 그들이 대하는 환자, 즉 보통 사람들을 위해 쉽게 풀어 설명하려 노력하는 것은 의사들의 몫이다.

‘아버님 환자분’의 슬픔, ‘아가씨’의 지혜

지하철 입구에서 오른쪽 아랫배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온몸을 휘젓는 지독한 통증, 보통의 배앓이와는 다르다. 버텨봤자 소용없는 소위 ‘맹장’이니 제 발로 걸어갈 수 있을 때 병원을 찾는 것이 상책이다. 상황이 급하니 응급실로 직행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수액주사로 결박을 당한다. 이때부터는 영락없는 환자인데 눈은 온갖 글귀에, 귀는 들려오는 모든 말소리에 쏠린다.

“환자분,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응급실의 막내로 보이는 의사가 와서 묻는다. ‘환자’ 처지에서는 새파랗게 젊더라도 지엄한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니 고분고분 들어야 하는데 ‘환자분’이란 말이 몹시 귀에 거슬린다. “그래 아파서 왔으니 나는 환자다. 그런데 그렇게 콕 짚어 아픈 사람이라 불러야겠냐? ‘환자’에 ‘분’을 붙이는 게 적절하냐”라는 말이 나오는 걸 억누르고 겨우겨우 대답한다.

“아버님, 검사 전에 주사 맞으실게요.” 그런데 고참급으로 보이는 간호사의 이 말은 도저히 못 참겠다. 그러나 “내가 당신 또래의 딸을 두려면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주사 맞으실게요’는 또 뭐야. ‘주사 놓아드릴게요’라고 해야지”란 말도 속으로 삼킨다. 몸가짐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말투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간호사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역정을 낸 게 미안스럽다.

“어이, 의사 양반, 나 언제 밥 먹게 해줄 거야?” “아가씨, 환자복 좀 갖다 줘. 갈아입게.” 수술 후 입원실로 옮겨진 뒤 통쾌한 복수가 이루어진다. 옆 병상의 아흔두 살 어르신이 ‘새파란 젊은이’와 ‘나이든 딸’에게 대신 복수를 해주신다. 그런데 ‘의사 양반’과 ‘아가씨’의 그 반응이 재미있다.

“김○○님, 오늘 오후 1시에 CT 촬영이시네요. 점심 나온 거 보관하라고 부탁해 놓을 테니 검사 끝나고 바로 드세요.” “할아버님, 물 마시다 환자복에 또 흘리셨어? 물 마실 때 나 부르시라 했지? 담엔 꼭 나 부르셔.”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환자가 ‘의사 선생님’에게 반말을 쓰는 것이 거슬릴 수도 있을 텐데 이 ‘젊은 양반’은 부드럽게 받아넘긴다. 요즘은 웬만해서는 듣기 어려운 ‘아가씨’로 불렸지만 상냥한 ‘아가씨’는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말하듯 치매기가 약간 있는 할아버지를 능숙하게 대한다.

이곳에서는 병과의 사투뿐만 아니라 말과의 싸움도 함께 이루어진다.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지 스스로 대답할 수 없다면 ‘환자분’이나 ‘아버님’으로 불렸다고 화낼 일은 아니다. 50대 중반의 남자 환자를 부를 어떤 호칭도 정해진 바가 없다. 이들이 찾은 ‘환자분’이나 ‘아버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김○○님’ 정도인데 이 호칭에 대한 임상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체 모를 ‘게요체’와 끝을 살짝 올리는 억양의 반말체도 시빗거리가 아닌, 관찰 혹은 격려의 대상일 수도 있다. 어법을 따지지 않고 들으면 게요체는 명령조가 아니고 함께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 좋다. 반말도 가끔 끼어들고 끝을 살짝 올리며 ‘요’로 끝내는 말투는 젊은 간호사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또래의 여자 의사들로 확대되더니 어느 순간 젊은 남자 의사들도 따라 하고 있다. 확산되는 모든 것은 이유가 있는 법, 친절한 말투의 신약 또한 지켜볼 일이다. 어쩌면 이 ‘젊은 그들’의 시도가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정겹고 친절한 말투가 될 수도 있다.

‘지에스’와 ‘노가다’의 전문용어는 무죄

메스, 석션, 블리딩, 헤모스탯…. 전신 마취된 환자가 수술실에서 오가는 말을 들을 수는 없으니 의학 드라마를 통해 간접적으로 엿본 의학 전문용어는 이 정도면 약과다. 우리말로 하는 드라마인데 온갖 의학 전문용어가 난무하니 자막 없이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데 이래야 의학 드라마답고 이래야 의사답게 느껴진다. 조사와 어미만 빼고 모두 외국어인데 이를 탓하는 이는 없다.

이런 현실을 두고 공사판에서 ‘노가다 말투’를 쓰는 이들이나 패션이나 미용 업계에서 ‘보그체’를 쓰는 이들은 억울할 수도 있다. 공사판에서 ‘공구리’를 치는 이들이 쓰는 말투는 일제 잔재라고 늘 욕을 먹는다. 옷, 장신구, 화장품 분야의 전문가들이 쓰는 휘황찬란한 수사는 국적 불명의 천박한 외국어 투라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전자는 일본어의 잔재로, 후자는 말도 안 되는 ‘짬뽕 외국어’로 취급되지만 의사들이 그런 비난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그 분야의 이론과 기술을 몸으로 익히는 동시에 그 분야의 말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분야는 역사와 전통에 따라 쓰는 용어의 뿌리가 다르기도 하고 용법이 다르기도 하다. 따라서 전문 분야의 말은 그 분야의 특성에 따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환자의 생명이 오고 가는 현장에서 정확한 의사소통은 필수이니 그들끼리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말에 대한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수술실은 공사판에 비유된다. 이 생명이 걸린 치열한 공사판에는 일반외과의를 뜻하는 ‘지에스(General Surgeon)’를 비롯한 최고의 전문가들이 있다. 전문가는 전문적인 말을 쓰는 법이니 다른 전문가들도 이들처럼 대우하면 된다. 공사판을 지키는 건설 전문가, 패션과 미용업계를 지키는 전문가 모두가 같은 대접을 받으면 된다. 물론 이들이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는 보통 사람들의 말을 쓰면 되고 실제로 그리하고 있다.

약 주고 말 주고

[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아픈 환자에게 필요한 건…약뿐 아니라 따뜻한 ‘소통의 말’

“환자분은 헤파타이티스 B 캐리어이신데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발병하지 않아 애큐트하거나 크로닉한 증세는 없네요. 약은 안 드셔도 되겠어요.” B형 간염 보균자여서 6개월마다 한 번씩 검진을 받는 선배가 이 말을 전하며 분노를 표한다. 20년째 만나고 있는 사이고 20년간 한 번도 증세가 없었으니 관리를 위해 검사를 받는 것을 알면서도 의사는 꼭 이렇게 말한다고 불만이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 선배는 반드시 발병할, 혹은 발병해야만 하는 환자이다. “관리 잘하셨어요.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하시면 돼요”라고 말하면 될 텐데 그 한끗 차이가 아쉽다.

종합병원은 병에 대한 진단, 치료, 수술, 그리고 예방을 위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약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환자분’의 가슴앓이에 약보다는 말이 특효약이다. 병원에서 ‘아버님’ 혹은 ‘어머님’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더욱 중요하다. 최고의 전문가들이니 그 전문지식을 잘 풀어 전달할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약 주고 말 줘야 진정한 의미의 종합병원이다.

필자 한성우

[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아픈 환자에게 필요한 건…약뿐 아니라 따뜻한 ‘소통의 말’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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