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바’와 ‘친구’ 손잡고…경계를 넘어 ‘꽃길’로 가자

2024.01.31 22:00 입력 2024.01.31 22:10 수정

(3) 중국 속 한국어의 미래 - 옌볜 조선족 자치주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의 옌볜대 앞 상가 건물. 옌지시 ‘핫플’인 이곳엔 규정에 따라 한자와 한글이 대등하게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장쉬(張旭) 제공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의 옌볜대 앞 상가 건물. 옌지시 ‘핫플’인 이곳엔 규정에 따라 한자와 한글이 대등하게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장쉬(張旭) 제공

한글로 쓰인 최초의 ‘표준 한국어’
조선 왕실 출발한 함경도서 유래
중국 내 조선어도 같은 뿌리 공유

간판마다 한자와 함께 박힌 한글
한·중 넘나들며 표현 범위 넓혀

세대 바뀌어도 일상 속 무한 변주
‘사과배’처럼 새로운 가능성 열길

“손님 여러분, 연길 서역에 곧 도착하게 됩니다.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잠결에 들려오는 안내방송에 소스라치듯 잠을 깬다. 이곳은 틀림없는 중국 땅, 그런데 열차의 안내방송이 한국어로 나온단 말인가? 열차에서 내린 후 역사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낯익은 한글 안내문이 보인다. 그렇다. 여기는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 옌지시다.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 중 14번째로 인구가 많은 조선족의 중심지다. 이들의 고유한 언어인 조선어가 중국어와 대등한 대접을 받는, 길거리나 시장 어디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들리는 땅이다.

한·중 수교 직전 1991년 겨울에 첫 방문을 한 이래 벌써 일곱 번째, 그 사이의 변화를 계속 지켜보아왔는데 코로나 시대 이후 최근의 변화가 놀랍다. 조선족 집거지(集居地)의 해체와 조선족 학교의 소멸을 지켜보면서 이곳의 어두운 미래를 예측하곤 했었다.

그러나 거리를 화려하게 밝히는 다양한 한글 간판과 인산인해의 전통시장 풍경에서 중국 내 한국어의 새로운 가능성도 보게 된다. 옌지시에서의 한국어는 지금 치열한 물밑 싸움 중이다.

최초의 표준 한국어

“어이 왔음둥?” 1990년대의 두 차례 방문 때 이곳의 아바이(할아버지)와 아매(할머니)들의 첫인사는 늘 이랬다. 직역하면 ‘어떻게 왔습니까?’란 말이지만 ‘이 먼 곳까지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와주시니 감사합니다’란 뜻이 담긴 말이다. 준비한 보잘것없는 선물이라도 드리면 “일 없슴다(괜찮습니다)”를 몇 번이고 외치다가 강권에 못 이겨 “아슴채케 어째 이런 걸”이라 말하며 부담스럽더라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말이 들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 땅의 말에 대한 오늘날의 우리 통념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황해> <청년경찰>을 비롯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들리는 이 땅의 말은 험악하기 그지없다. 이 지역 사람들끼리 하는 말을 엿듣다 보면 이들 표현대로 ‘알아 못 들을 말’이 태반이다. 오르내림이 심한 억양,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말끝 등은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수교 이후 한국에 온 동포들이 약장수, 공사장과 식당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들에 대한 비하가 이들의 말에 대한 평가에 투영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의 말은 한국어 최초의 표준어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최초의 표준어 지위는 경주 말에 주어져야 한다. 고려 건국 과정에 신라 귀족이 대거 참여하여 이들의 말이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들의 말은 함경도 말, 특히 이들이 ‘유우비(六邑)’라고 일컫는 육진(六鎭) 지역의 말이니 변방의 말이 표준어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야 우리말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초기의 한글 문헌을 보면 이들의 말과 매우 유사하다.

상황은 이랬다. 새로운 문자인 한글로 우리말을 적어야 하는데 각지의 말이 다 다르니 어떤 말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가 문제였다. 한글의 창제자이자 당시의 지존인 왕의 말이 일순위였다. 그런데 조선 왕실의 뿌리는 함경도이고 태종 이방원까지는 확실히 함경도 말 화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또한 어린 시절에 함경도 사람 일색인 외가에서 자랐으니 함경도 말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가정해야만 초기의 한글 문헌과 육진 지역 말의 유사성이 설명되니 육진 지역의 말을 계승한 이들의 말은 최초의 표준어였다.

‘댜는 무스거 셰샹 모르는 숨탄 즘시텨르 보여도 됴혼 늦으 한단 말이오’란 말은 외국어처럼 들린다. ‘저 아이는 무슨 세상 물정을 모르고 그저 생명을 갖고 살아 움직이는 짐승처럼 보여도 잘될 조짐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로 번역해도 대응시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리 말하던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떴고 그 이후의 세대들은 이들이 ‘한국말’이라 부르는 남쪽의 표준어에 익숙해졌다. 표준 한국어를 쓰는 이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我洗我洗 干洗店’과 ‘세탁은 워시워시’

중국 옌볜 옌지시의 세탁소 간판. 한성우 제공

중국 옌볜 옌지시의 세탁소 간판. 한성우 제공

말과 글의 풍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거리의 간판이다. 옌지시의 간판은 중국의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때깔’이 다르다. 붉은색 일색에 한자가 커다랗게 박힌 여느 간판과 달리 알록달록 다양한 색에 한글이 한자와 함께 표기되니 이국적인 느낌까지 물씬 풍긴다. 게다가 ‘한국물’을 먹은 주인장과 손님들, 그리고 ‘한류’를 느끼고자 하는 중국인들까지 몰려들고 있으니 이 지역의 간판이 자아내는 풍경은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르다.

‘我洗我洗 干洗店’, 중국인이나 중국어에 익숙한 이들은 이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빨래는 내게 맡겨, 드라이클리닝 가게’의 뉘앙스이지만 좀 어색하다. 그런데 규정과 다르게 한자보다 더 크게 쓴 한글 ‘세탁은 워시워시’를 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我洗’의 발음은 ‘워시(woxi)’이니 발음을 해보면 영어단어 ‘wash’까지 이르게 되고 중국어와 영어에 걸친 말장난이 한글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는 중국의 자그마한 도시, 그러나 한국어와 한글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며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옌지시의 ‘핫플’로 꼽히는 옌볜대 앞의 상가 건물은 이 지역의 언어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커다란 성과 같은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간판은 규정에 따라 한자와 한글이 대등하게 쓰여 있다. 하지만 ‘개 좋은 카페’ ‘가지가지’ ‘단골손님’ 등의 한글을 보게 되면 한글을 아는 이와 한국어를 알고자 하는 이를 자연스럽게 유혹한다. 새롭게 상권이 형성된 거리는 ‘간판 한류’를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이것 또한 중국 내에서 한류를 즐기고자 하는 중국인들을 끌어모으는 데 일조하고 있다.

성수기에는 발 디딜 틈이 없는 서시장 또한 말과 글의 물밑 전쟁을 잘 보여준다. 다른 가게가 같은 식재료를 팔더라도 품목 이름은 한자 또는 한글로 적혀 있다. 양쪽을 다 적어 놓기도 한다. 이들의 손글씨는 규제의 대상이 아니니 철저하게 장삿속으로 언어를 선택한다. 상인들은 손님의 차림만 보고도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별해 호객을 한다. 물론 곱게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은 ‘아즈마이’가 주인인 집에서는 한국 손님도 한국말로 바로 흥정을 해도 된다. 이런 분들은 팔 할이 우리 동포이니 말이다.

‘오우바’와 ‘친구’, 그리고 ‘후아루’

옌지시의 한글 간판이 이렇게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이들의 민족어인 조선어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조선어를 쓰지 않으니 민족어가 계승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과거 조선족 마을에는 압도적으로 조선족이 많아 한족마저도 조선어를 쓸 정도였으나 오늘날은 그런 집거지가 대부분 해체되었다. 조선족 학교가 여럿 있었고 이 학교 출신은 대학 진학에도 유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혜택도 없고 조선족 학교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조선어를 쓸 일도, 써야 할 이유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소수민족과 그들의 언어에 대한 정책은 중국 정부가 결정할 문제이다. 그런데 조선어는 1세대 선조들의 ‘본국’에서 ‘모국어’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민족과는 상황이 다르다. 현재의 세대들은 1세대와 달리 ‘중국’이 본국이고 ‘중국어’가 모국어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이 ‘민족어’를 쓰면 이는 곧 ‘외국어’이기도 한 복잡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중국 내 민족어의 실체와 그 미래는 결국 중국 동포들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우바(欧巴)’와 ‘친구(亲故)’, 그리고 ‘후아루(花路)’가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양상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단어들은 중국어 단어가 아니지만 젊은층, 특히 한류에 익숙한 이들은 잘 알고 실제 쓰기도 하는 단어이다. 앞의 두 단어는 차례로 ‘오빠’와 ‘친구’이니 중국어 단어 ‘거거(哥哥)’와 ‘펑요우(朋友)’를 쓰면 되지만 한국어를 음차해서 쓰고 있다. ‘후아루(花路)’는 한국어의 ‘꽃길’을 번역해서 쓴다는 점에서 위의 두 사례와는 다르다. 한자로 얼마든지 의미가 통할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쓰지 않던 단어였는데 한국어의 ‘꽃길만 걸으세요’와 같은 표현을 받아들여 쓰고 있는 것이다.

중국어나 한자의 특성상 말소리를 직접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그만큼 이 단어의 의미와 용법에 중국에서 관심을 기울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한자를 공유하고 있으니 한국어의 고유어를 그 용법에 맞게 번역해서 쓰는 것도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 그리고 중국 내에서의 중국어와 한국어의 관계는 여전히 복잡하다. 그러나 오빠와 동생, 친구가 되어 꽃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물론 그 가능성은 한국과 중국 말의 주인들이 함께 찾아가야 한다.

짜구배의 설움, 사과배의 가능성

중국 옌볜 옌지시 서시장의 사과배. 한성우 제공

중국 옌볜 옌지시 서시장의 사과배. 한성우 제공

옌지시에 인접한 룽징시의 특산물로 사과배(苹果梨)가 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사과와 배의 교잡종인 ‘튀기’인데 이들 말로 하면 ‘짜구배’다. 현재 이 지역에서 쓰이는 말은 한국어와 중국어의 짜구배이기도 하다. 조선어를 하면서도 수없이 많은 중국어 단어가 끼어들기도 하고 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기도 한다. 두 언어를 모두 잘하는 이도 있지만 어느 한쪽이 좀 뒤떨어지거나 양쪽 다 완전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이도 저도 아닌 튀기 혹은 짜구배의 상황일 수도 있다. 반면에 양쪽의 장점을 두루 갖춘 새로운 종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은 한국과 중국의 경계를 오갈 수 있다. 이들은 중국어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잘할 수 있는 환경에 있다. 중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어와 조선어의 물밑 경쟁을 슬기롭게 이끌어 한국과 중국이 오빠와 동생 혹은 친구로서 꽃길을 걷게 할 수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사과배는 얼리면 겨울철의 별미인 ‘둥리(凍利)’가 된다. 이들의 삶과 언어를 둥리처럼 현재의 상태로 동결시키길 바라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과 말은 끊임없이 변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나갈 것이다.

필자 한성우

[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오우바’와 ‘친구’ 손잡고…경계를 넘어 ‘꽃길’로 가자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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