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동물 학대하며 식민지엔 ‘동물 보호’ 강요···동물 잔혹사

2024.06.21 08:00 입력 2024.06.21 10:25 수정

벌거벗은 동물사

이종식 지음 | 동아시아 | 188쪽 | 1만5000원

1884년 영국 의사 벤저민 워드 리처드슨이 만든 ‘리처드슨 도살실’. 동아시아 제공

1884년 영국 의사 벤저민 워드 리처드슨이 만든 ‘리처드슨 도살실’. 동아시아 제공

인간은 동물을 얼마나 사랑할까. 중국 판다에 대한 보편적 열광이나 개·고양이 등에 대한 반려인들의 깊은 애착을 생각하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심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인간 중심 역사의 이면에 가려진 동물들의 역사를 탐구하는 ‘동물사’ 연구자들의 관점은 다르다. 동물사 연구자인 포항공대 이종식 교수는 <벌거벗은 동물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은 선택적으로 동물들을 사랑하고 혐오했으며 살리고 죽였습니다.” 책은 동물사라는 비교적 생소한 영역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경어체로 쓰여졌다.

1만5000년 전에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개는 인간과 공존하게 된 대가로 귀족이나 중산층의 저택에서 주인의 사랑을 받는 애완견과 ‘살처분’의 대상이 된 떠돌이 개(배회견)로 처지가 양극화 됐다.

개들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는 데 기여한 것은 전문 육종가들이다. 이들은 이른바 ‘순종 혈통’ 강아지들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배회견을 악마화했다. 육종견은 우월하고 정상적인 반면 배회견은 열등하고 비정상이라고 선전한 것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잘못 이해한 서구 인종주의자들이 백인의 우월함을 주장하며 흑인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한 것과 동일한 논리다.

행정 당국이 배회견 추방에 나섰다. 1811년 뉴욕시는 배회견 도살을 합법화했다. 그해 여름 동안에만 2610마리의 배회견이 뉴욕 경찰의 손에 죽었다. 파리 경찰도 1845년 불도그에 대해 살처분을 진행했다. 1839년대 런던에서는 배회견과 친밀한 노숙인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인간 불청객과 비인간 불청객 모두를 몰아내려” 한 것이다.

민간에서는 돈을 받고 배회견을 처리해주는 브로커들이 나타났다. 1840년대 뉴욕의 브로커들 중에는 10대 소년들도 있었는데, 주로 이민자와 노동계급 가정 출신이었다.

배회견을 살처분하는 장면(1858). 동아시아 제공

배회견을 살처분하는 장면(1858). 동아시아 제공

거리에서 배회견을 죽이는 데 대한 반발이 심해지면서 도시 외곽의 구금소가 새로운 살처분의 장소로 떠올랐다. 배회견 살처분용 구금소는 1850년대 프랑스에서 먼저 생긴 뒤 영국과 미국에서도 우후죽순으로 번졌다.

옹호론자들은 구금소에서의 죽음이 거리에서의 죽음보다 ‘인도적’이라고 주장했으나 실상은 끔찍했다. 19세기 중반 런던과 파리에서는 건장한 남자들이 개들을 목졸라 죽였다. 1840년대 파리의 구금소에서는 이 방법으로 매년 1만2000~1만3000마리가 죽어나갔다. 뉴욕에선 대형 물탱크에 개들을 밀어넣어 익사시켰다. 매주 평균 2000마리 이상이 이 방법으로 도살됐다. 1877년 뉴욕의 한 구금소는 큰 케이지에 개들을 밀어넣고 크레인을 이용해 케이지를 강물에 빠뜨렸다. 개들이 저항하면 구금소 직원들이 몽둥이로 다리를 부러뜨렸다.

‘과학적 살처분’도 등장했다. 영국 의사 벤저민 워드 리처드슨이 1884년 개발한 ‘리처드슨 도살실’은 최대 200마리의 개를 2층짜리 암실에 수용하는 장치였다. 암실에는 마취제의 일종인 클로로포름과 탄산가스를 채웠다. 개들의 숨통이 끊어지는 데 2분이 걸렸다. 나치의 가스실과 다를 바 없다.

동물 보호를 외친 사람의 행동조차 이중적이었다. 1860년 메리 틸비는 런던에 ‘굶주린 개들을 위한 임시 거처’를 열었다. 그러나 불과 5년 뒤 틸비의 임시거처가 배회견을 차별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귀족적으로 잘 육종된 개’와 ‘부르주아 개’는 무기한 보호를 받으며 주인을 찾거나 판매되는 반면, ‘가장 급이 낮은 잡종견이나 똥개’는 14일이 경과하면 살처분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얽힌 탓에 부당한 고통을 당한 동물은 개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19세기 뉴욕에는 우유를 짜내기 위한 ‘젖소 공장’이 들어섰다. 젖소 공장은 주로 양조장 근처에 있었다. 양조장에서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인 담금액을 젖소의 사료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30년대 존슨스 유업은 맨해튼 15번 스트리트와 5번 애비뉴의 교차로에서 2000마리의 젖소를 사육했다. 젖소 공장은 헐값인 담금액을 먹이기 위해 젖소에게 오랜 기간 물을 주지 않았고, 비좁은 장소에서 젖소들이 쓰러지자 도르래를 이용해 젖소를 들어올린 뒤 젖을 짜냈다. 젖소가 죽은 뒤에도 젖을 잤다는 기록도 있다.

인간 사회의 곤경이 동물에게 구원이 되기도 했다. 도시화의 진전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19세기 들어 쥐는 ‘공공의 적’이 됐다. 전염병을 옮기고 전선을 갉아먹는 등 피해를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행정부는 쥐를 잡기 위한 화학약품 개발 계획을 세우는 등 쥐잡이에 나섰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 이후 공중보건 인력이 대폭 축소되면서 쥐들은 ‘기사회생’했다.

낙타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충돌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

19세기 내내 유라시아를 놓고 러시아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린 패권 경쟁을 벌인 영국은 1878년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당시 영국군은 식민지 인도 북서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남부로 병력과 물자를 이동하기 위해 낙타 8만 마리를 징발했다. 그러나 이 중 6만5000마리는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이 같은 참사가 발생한 것은 영국군이 징발한 낙타가 산악 지형에 부적합한 ‘평지 낙타’였기 때문이다. 평지 낙타는 산악 지대에서 나는 건초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나이도 두세 살에 불과해 보급품을 실어나르기에는 체격이 작았다. 낙타 부대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과로하다 쓰러져 죽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동물 복지’를 식민 지배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1898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대표적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1857~1930)는 1901~1903년 사이에 필리핀 총독을 지냈다.

태프트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는 발언을 했는데,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필리핀인들의 동물 학대였다.

“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자치할 능력이 있다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이들은 상황에 따라 동물들을 학대하며 또 자신의 동족을 학대한다. 이들이 앵글로색슨의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기까지는 족히 50년 또는 100년의 훈육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이 동물을 학대하는 필리핀인들에게 동물 애호를 가르쳐야 할 ‘사명’을 지고 있으며 그 이전까지는 필리핀인들의 독립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식민 당국은 1902년 ‘동물학대방지조례’를 제정했다. 필리핀인들이 이를 어길 경우 최대 100달러의 과태료와 최대 6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1905년에는 필리핀동물학대방지협회(PSPCA)가 설립됐다. PSPCA는 민간단체였는데도 필리핀인들의 동물학대에 대한 수사·체포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징수한 벌금은 협회 운영비로 사용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재조선 일본인들이 동불 복지 단체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가 조선총독부와 일본 순사의 묵인 아래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동물 보호법을 다소 자의적으로 집행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미 식민 당국은 필리핀인들의 전통 스포츠인 투계를 아편보다 심한 ‘악덕’이라고 규정하고 폐지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저자는 미 식민 당국의 이 같은 태도를 ‘돌봄 식민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돌봄 식민주의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 스스로도 ‘동물 사랑’을 앞세워 일부 ‘다른’ 인간을 혐오하고 비하하고 있지는 않은지 면밀히 되돌아볼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말한다.

[책과 삶] 안에서 동물 학대하며 식민지엔 ‘동물 보호’ 강요···동물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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