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정’ 하시모토 역할 맡은 엄태구 “따귀 장면이 날 살렸지만 미안해 죽을 맛”

2016.09.20 21:03 입력 2016.09.20 21:04 수정
백승찬·사진 정지윤 기자

영화 ‘밀정’ 하시모토 역할 맡은 엄태구 “따귀 장면이 날 살렸지만 미안해 죽을 맛”

지금까지 <밀정>을 본 600만 관객의 뇌리엔 한 낯선 배우의 얼굴이 송강호, 공유 못지않게 남아있을 것이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위협적으로 튀어나온 광대뼈, 낮고 허스키한 음색의 일본 경찰 하시모토는 의열단의 뒤를 캐는 이정출(송강호)을 돕는 동시에 그를 감시한다. 하시모토가 가죽장갑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부하의 뺨을 수십차례 때리는 장면은 ‘저러다 사람 잡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하다.

하시모토 역을 맡은 배우는 엄태구(33)다. 형인 엄태화 감독이 연출한 독립영화 <잉투기>로 얼굴을 알렸고, <차이나타운> <베테랑> 등의 상업영화에서 조연을 맡았다. 하지만 <밀정>의 하시모토 역은 이전 어느 작품보다 강렬하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으며, 조만간 쌓이는 시나리오도 늘어날 것 같다. 최근 엄태구를 만났다.

많은 조연배우가 그렇듯, 엄태구도 ‘오디션 인생’이었다. <기담>(2007)의 단역으로 상업영화에 데뷔했으나, 늘 불안의 나날을 보냈다. “다른 일을 해보기도 했지만 잘 안됐어요. 결국 잘하는 일이 배우밖에 없더라고요. 10번 연속 오디션에 떨어지다가, 3~4번 연속 붙고…. 지금도 어떻게 오디션을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 <밀정>에서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맡은 엄태구(왼쪽).

영화 <밀정>에서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맡은 엄태구(왼쪽).

<밀정> 오디션에는 김지운 감독이 혼자 들어왔다. 엄태구는 많은 젊은 배우들이 탐냈다는 하시모토 역과 그외 정보원 하일수 역, 여러 의열단원 역을 준비했다. 하시모토의 오디션 장면은 이정출과 의열단원 김우진(공유)이 기차의 식당칸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모습을 목격한 대목이었다. 둘의 내통을 확인하는 결정적 장면에서 하시모토는 “차 향기가 참 좋습니다”라고 눙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실제로 엄태구는 이 장면이 하시모토에겐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꼽았다. 송강호, 공유라는 두 스타 가운데서 기죽지 않고 분위기를 이끌어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엄태구는 하시모토를 ‘매’에 비유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경성행 기차 안에서 의열단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특히 그랬다. 영화 속에선 편집됐지만, 하시모토에게도 개인사가 있다. 아버지도 나라도 없이 자란 하시모토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 완전히 동화된 인물이었다.

영화 속 인상과는 다르게, 엄태구는 내성적이고 수줍어 하는 사람이었다. 새벽기도를 나가고 성경을 읽으며 발음 연습을 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하다. 모든 장면이 부담스러웠지만, 화제가 된 ‘가죽장갑 따귀’ 장면은 더욱 힘들었다.

이 장면은 4번을 찍었다.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연기일 뿐이지만, 엄태구는 상대 배우(정도원)에 대한 미안함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직업이 배우일 뿐이지, 저도 사람이잖아요. 일 때문에 때리긴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크죠. 인터뷰에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엄태구는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이 배우 경력의 ‘숙제’라고 했다. 영화는 공동작업이다. 낯을 많이 가리면 동료와 어울리거나 현장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 평소 “단연 존경한다”는 송강호와 처음 함께 촬영한 도자기 공장 장면을 찍기 전날엔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굳은 얼굴로 현장에 나타난 엄태구를 위해 송강호와 김지운 감독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유쾌한 현장 분위기를 만들었다. 엄태구는 “언젠간 나도 조금씩 바뀌어 현장을 부드럽게 만드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슬쩍 물었다.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으로 상업영화 데뷔를 앞둔 형 엄태화 감독과 함께라면 ‘류승완-류승범’을 능가하는 형제 영화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엄태구는 흰소리 못하는 사람답게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그분들이 쌓아온 업적이 있는데 어떻게 감히 저희들이…. 일단 형은 연기를 진짜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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