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초 영화’ 반감 커지는 요즘, 그의 빈자리가 더 커보인다

2017.11.03 17:30 입력 2017.11.03 20:51 수정
위근우 | 칼럼니스트

배우 김주혁의 명복을 빌며

스크린 위의 그는 늘 갈팡질팡했다. 지난 10월30일, 교통사고로 너무나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배우 김주혁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새삼 든 생각이다. 영화로 한정해 그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어쩜 이렇게 우유부단한 인물들만 골라서 연기했나 싶을 정도다. 짝사랑했던 여성과 재회하고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주저주저하다가 사랑을 놓친 <광식이 동생 광태> 속 광식에서 이미 정점을 찍었던 그의 어물대는 캐릭터는, 역시 우리에게 안타까움으로 기억되는 배우 고 장진영과 함께했던 <청연>에서 사랑하고 동경하는 여인을 좇지 못하고 아버지의 호통에 울며 겨자 먹기로 입대하는 한지혁으로 이어졌고,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도 아내에 대한 소유욕과 아내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노덕훈 역에서 한 번 더 정점을 찍었다. 최근작 <비밀은 없다>에서 연기한 비정한 정치인 김종찬조차 불륜이 알려질까 안절부절못하고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꿈에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김주혁이 연기한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하는 캐릭터들은 인물의 고유한 매력을 살리면서 동시에 여성 상대역을 돋보이게 했다.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한 장면.

김주혁이 연기한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하는 캐릭터들은 인물의 고유한 매력을 살리면서 동시에 여성 상대역을 돋보이게 했다.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한 장면.

고인이 그런 우유부단한 연기의 스페셜리스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청연>에서 입대 후 1년이 지나 장교의 신분으로 박경원(장진영)을 찾아와 먼발치서 특유의 콧날을 찡그리며 눈가와 입 주위에 주름이 잔뜩 잡히는 웃음을 짓는 장면 같은 것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너무 좋지만 또 그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쑥스러운 양가적 감정이 그의 미소엔 잘 담겨 있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주인아(손예진)에게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은 어떤가. 욕망도 민망함도 숨기지 못하는 어정쩡한 순간마다 미소로 얼버무리는 모습은 미지근해 보이면서도 그 기저에 있는 온수와 냉수의 뒤엉킴을 드러낸다. 그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사랑 앞에서 갈등하는 남자를 표현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청연>에서 경원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주던 지혁이 경원이 자신이 잡지 못할 곳까지 날아갈까 두려워 결혼해달라고 애원하고 화내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게 찌질하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다. 사랑이란 감정의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소유욕 앞에서 스스로의 찌질함과 못남을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김주혁이 영화에서 분한 인물들은 이런 직시 앞에서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약한 존재들이다.

강력한 신념이나 욕망으로 움직이는 한국 영화 남성 캐릭터들 속에서 김주혁의 필모그래피가 독특한 궤적을 남기는 건 그래서다. 울부짖음, 쌍욕, 능숙한 사투리, 성격 파탄 중 하나는 보여줘야 입성할 수 있는 한국 영화계 명연기의 만신전과 김주혁의 연기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김주혁이 남긴 필모그래피가 매력적인 건, 그가 연기한 인물들이 단순히 과잉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갈팡질팡하는 건, 감정을 마음껏 쏟아내지 못하는 건, 여전히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 괴로워하고 주저하는 그들의 모습엔 스스로의 못남을 받아들이는 일말의 정직함이 있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괴로워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서로의 삶을 이해해줄 수 있는 길을 선택한다.

영화 <청연>에서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을 보여주는 김주혁.

영화 <청연>에서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을 보여주는 김주혁.

죽는 순간까지도 경원의 꿈을 지지한 지혁이 그러했고, 인아와 한재경(주상욱)과 함께하는 3인 커플의 삶을 받아들인 덕훈이 그러했으며, 오랜 시간 그리워하던 윤경(이요원)을 몇 번의 어긋남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광식이 그러했고, 춘향과의 한정적인 관계에 만족하고 그의 꿈을 상상적으로나마 이뤄주고 싶어하던 <방자전>의 방자가 그러했다.

심지어 모든 일에 막힘이 없는 무적의 소시민 히어로 홍반장을 연기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서조차 상대가 좋아하는 와인을 준비하고 윤혜진(엄정화)이 돌아올 순간을 기다린다.

김주혁이 갈팡질팡하며 만들어내는 미지근한 연애의 온도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런 남성 캐릭터의 포지션을 통해 결과적으로 상당히 유의미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인 박경원의 자유로운 비행을 담아냈던 <청연>은 물론이거니와, 나름 도발적으로 사랑과 결혼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냈던 <아내가 결혼했다>는 명백히 남녀 투톱 구도에서도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2003년 여성관객영화상을 받기도 했던 <싱글즈>에서도 김주혁이 연기한 수헌의 프러포즈를 나난(장진영)이 거절하고 싱글의 삶을 선택한 결말은 당시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들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가 온전히 조연의 자리를 선택했던 <비밀은 없다>가 김연홍(손예진)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얼마나 높은 비평적 성과를 거뒀는지까지 떠올린다면 작품에 대한 그의 안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아이 캔 스피크>의 성공과 함께 배우 이제훈의 작품 선택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어지기도 하지만(흥미롭게도 <아이 캔 스피크>의 김현석 감독은 <광식이 동생 광태>를 비롯해 김주혁과 두 개 작품을 함께했다), 메인스트림에 속한 40대 중반 한국 남자 배우로서 2000년대 초반의 조폭 코미디나 최근 유행했던 퀴어베이팅 섞인 브로맨스물을 벗어나 경력을 쌓아온 김주혁의 선택에 대해서도 역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

위근우 | 칼럼니스트

위근우 | 칼럼니스트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기존 필모그래피와 캐릭터로부터 가장 멀고도 먼, 하지만 흥행엔 대성공한 <공조>를 통해 지난 10월27일 ‘더 서울 어워즈’에서 ‘영화에서 처음으로’ 상을 탔다. 본인의 수상 소감대로 악역에 대한 연기적 갈증을 풀었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그동안 그가 조용히 쌓아온 성취가 그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연기자로서 조금씩 경력의 하향 곡선을 그리던 그가 재기할 발판이 되어준 KBS <해피선데이-1박2일> 마지막 방송에서 그는 자신이 예능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더 망가질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토로는 솔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연기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렇게 마지막 방송을 하는 중에도 멤버와 스태프에 대해 “내가 일해 본 중 가장 좋은 사람들”이라고 시청자에게 소개하던 상냥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진지함을 잃지 않던 배우는 과연 어떤 작품을 더 남길 수 있었을까. 트렌드이던 남초 영화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새로운 흐름에 대한 요구가 이어지는 요즘이었다면 그의 연기자로서의 안목과 장기가 더더욱 빛을 발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부질없어진 궁금증을 뒤로하고, 45세 아직 해온 것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나이에 그는 황망하게 떠났다. 벌써 콧날을 찡그린 그의 쑥스러워하는 미소가 그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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