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까칠남녀’의 개그맨 황현희

2017.11.17 18:01 입력 2017.11.17 18:02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성차별·여혐’ 머리론 알지만 가슴으론 모르는 ‘모순적 남성’ 대변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웃겨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2008 KBS 연예대상’에서 화제가 됐던 개그맨 황현희의 우수상 수상 소감이다. 당시 KBS <개그콘서트>에서 ‘집중토론’, ‘황현희 PD의 소비자고발’ 등 시사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말의 향연으로 큰 인기를 끌고 심지어 EBS 라디오 <최광기, 황현희의 시사난타>까지 생방송으로 진행하며 지성적 개그의 아이콘이 됐던 그이기에 가능했을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의 황현희는 영혼은 영혼대로 팔고 그렇다고 재밌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EBS <까칠남녀> ‘남자들이여, 일어나라’ 편에 남성이 겪는 역차별을 이야기하기 위해 게스트로 출연했다가 무슨 영문인지 고정 패널로 자리잡은 그는 기존 패널 정영진의 아성을 위협하듯 여성혐오적인 발언들을 쏟아내는 중이다. 가령 ‘냉동 난자를 부탁해’ 편에서 “결혼 후에도 개인의 성취를 위해 임신 안 하려는 여성은 이기적”이라고 발언했던 장면은 캡처된 형태로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수준이다. 임신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며 기혼 여성의 의무 역시 아니라는 기본적인 신체적 자율권의 문제조차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그를 보면, 출산 이후 육아가 대부분 여성의 몫이라는 여성 패널 은하선의 역시 기본적인 이의제기조차 너무 고차원적인 것처럼 보인다.

차별의 폭력성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이 그에 동참할 위험성을 간과하는 황현희의 순진한 믿음은 본인과 본인이 대변하는 스스로의 선량함을 굳게 믿는 남성들의 자기모순을 꽤 투명하게 드러내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차별의 폭력성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이 그에 동참할 위험성을 간과하는 황현희의 순진한 믿음은 본인과 본인이 대변하는 스스로의 선량함을 굳게 믿는 남성들의 자기모순을 꽤 투명하게 드러내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 이 지면을 통해 비판했던 정영진과 비슷한 입장과 수준에 머무르는 황현희의 발언들은 <까칠남녀> 안에서 정영진의 그것과 함께 두 배의 혐오와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지만, 황현희라는 개그맨 개인의 서사 안에서 현재의 모습을 비춰볼 때 또 다른 결의 불의가 드러난다. 사실 코미디 프로그램 안에서 높은 인기를 끌던 시절에도 그의 개그에 찜찜함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가 <까칠남녀>에 남성을 대변하는 패널로 출연하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장위원회’에서 그와 박성호, 최효종이 “니 생일엔 명품가방, 내 생일엔 십자수냐!”를 외치며 남성이 겪는 역차별을 주장하던 모습은 여성들이 겪는 경제적 선행 차별을 지우고 스테레오타입으로서의 된장녀 프레임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개그가 맞다. 당시 이 코너를 보며 웃을 수 있었던 건 아직 그 안의 차별적 맥락을 읽어내지 못했던 탓이 크지만, 이 개그가 현실의 여성차별과 분리된 하나의 가상적 세계이며 직접적 차별을 재생산하진 못할 거라는 안일한 낙관주의 때문이기도 했다. 이 낙관은 부스러진 지 오래지만, 황현희가 직접 <까칠남녀>에 코미디 연기자가 아닌 자연인으로서 “동물 보호구역도 있는데 남자 보호구역은 없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순간 완벽하게 무너져 근거를 잃어버린다. 어떤 불의가 개그의 소재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 그것이 불의라는 단단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할 때, 지금 이곳에 그런 합의 따위는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재밌는 건, 이처럼 스스로 현실의 차별 및 비하와 개그 속 차별 및 비하 사이의 간극을 지워버린 그가 흑인을 소재로 한 개그에 대한 샘 해밍턴과의 설전에서 여전히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SBS <웃찾사>에 등장한 흑인 분장 개그에 대해 샘 해밍턴이 이는 인종을 놀리는 것이라 지적하자, 황현희는 이것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재반박했다. “영구, 맹구라는 캐릭터는 자폐아에 대한 비하로 해석될 수 있고 예전에 한국에 ‘시커먼스’라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개그도 있었어. 그것도 흑인 비하인가?” 역설적으로 그는 놀라울 정도로 과거의 동네 바보 개그와 ‘시커먼스’의 차별적 요소를 정확히 짚어냈다. 풍자극 같은 이 상황은 일견 코믹하지만, 자신의 순수한 의도를 과신하는 남성 방송인이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놀라울 정도로 과소평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낙관이 유지되기 위해선 현실 안에서의 차별과 혐오, 비하가 충분히 억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현실에선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남성 권력에 대한 풍자가 아닌 진심이었음을 고백하는 개그맨이 젠더 토크쇼의 고정 패널이 되어 “제가 만약에 학부모라면 제 아이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동성애 얘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이처럼 차별의 폭력성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이 그에 동참할 위험성을 간과하는 황현희의 순진한 믿음은 본인과 본인이 대변하는 스스로의 선량함을 굳게 믿는 남성들의 자기모순을 꽤 투명하게 드러내준다. 가령 위의 동성애 발언에서 그는 이성애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동성애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위계를 두며 호모포비아적인 입장을 드러냈지만 그 와중에도 “동성애에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차치하면, 어쨌든 호모포비아로 몰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낸 셈이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인용한 샘 해밍턴과의 설전에서처럼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꽤 자신하면서 구조 안에서의 자신의 특권과 가해자성을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증명하는 자기모순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지만 그것을 공적인 경험 영역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위의 발언은 결국 누군가의 목소리를 공적 차원에서 지우고 삶의 방식은 인정하자는 모순일 뿐이다. 또한 같은 에피소드에서 “남혐, 여혐 하는 사람 극혐”이라고도 말했다. 본인은 꽤나 공정한 입장에서 일침을 날렸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남성혐오가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의 맥락에서 등장했음을 떠올리면 본인 말대로 ‘여혐 하는 사람 극혐’한 게 ‘남혐’이다. 또 한 번 자기도 모르게 맞는 말을 하며 자신에게 한 방 날린 셈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물론 어떤 불의의 논리적 허점을 꽤 잘 보여준다는 이유로 그의 방송 출연과 발언들이 유의미하다 말할 수는 없다. 정영진이 그러하듯, 그의 모순 가득한 발언들은 실제로 모순 가득한 이들의 불의한 발언에 힘을 실어주는 마이크가 될 뿐이다. 특히 나름 시사풍자 개그의 새로운 선봉으로 기대 받고, 심지어 그것을 자본 삼아 XTM <생방송 젊은 토론, 설전>에 토론자로 나서기도 했던 황현희가 거의 10년이 지나 남자로서의 억울함을 끊임없이 토로하고 있는 것을 보는 건 여러모로 퇴행적이다. 이러한 풍경을 비추는 <까칠남녀>가 정영진만 있을 때보다 퇴행한 것도 사실이다.

황현희가 본인의 개그로 증명한 것처럼, 이것이 왜 문제인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고찰하고 공유되지 않은 불의한 통념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비춰질수록 실재하는 힘을 견고히 할 뿐 어떤 비판적 전망도 남기지 못한다. 사실성과 타당성 사이의 긴장을 캐치하지 못하는 현실 인식은, 미래로 투영해낼 당위적 현실을 상상하지 못하는 현실 반영은, 그래서 퇴행적이다. 황현희가 영혼을 팔았든 안 팔았든 지금의 그와 <까칠남녀>를 보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