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광 루이 14세를 등에 업고 프랑스 음악계 지배한 이탈리아인

2022.06.17 20:55 입력 2022.06.20 13:35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11) 륄리가 꽃피운 프랑스 바로크 음악

루이 14세. 프랑스 귀족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던 화가 이아생트 리고(1659~1743)의 작품이다. 1701년 작이다.

루이 14세. 프랑스 귀족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던 화가 이아생트 리고(1659~1743)의 작품이다. 1701년 작이다.

‘바로크 음악의 뿌리’ 이탈리아

2016년 타계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는 옛 음악을 당대의 악기와 연주 관습으로 해석하고 재현해낸 지휘의 거장이었다. ‘원전연주’ ‘당대연주’ ‘역사주의 연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그에게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때로 아르농쿠르는 당대와 현대를 결합한 ‘수정주의’를 선보이기도 했으나, 그의 이름을 오늘까지도 그리고 미래에도 여전히 기억하게 만들 키워드는 역시 ‘당대’라는 두 글자일 터이다. 첼리스트로 출발한 그는 한 시대를 이끈 지휘자였을 뿐 아니라 음악학자이기도 했다. 생전에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Musik als Klangrede, 강해근 옮김, 2006)에는 금과옥조 같은 문장들이 숱하게 등장해 밑줄을 긋게 만든다. 개인적 고백을 조금 덧붙이자면 매우 아끼는 책이다. 앞서의 연재에서 바로크 시대의 미술과 음악이 뿜어내는 생동감을 이미 서술했거니와, 이와 관련해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에는 이런 문장들이 등장한다. “협주곡과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바로크 음악은 넘칠 듯한 감각적 즐거움과 상상력을 펼쳐내면서 환상으로 증폭되는 한계까지 밀고 나아갔다. 음악의 형식은 장대하고 화려해졌다. 현악기의 울림은 압도적이었고, 악기는 이탈리아풍의 감각적인 노래를 본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런데 인용한 글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탈리아”다. 이렇듯이 당시의 이탈리아는 미술에서는 물론이고 음악에서도 거의 절대적인 지역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형성된 이 ‘지역적 패권’은 바로크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물론 르네상스 후기의 미술사에서 플랑드르 지역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강력한 본거지는 역시 이탈리아였다. 이런 상황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칭하는 음악의 탄생지는 이탈리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음악의 거의 모든 요소와 형식들을 정초(定礎)했으며 다양한 장르들을 파생시켰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악 용어의 절대 다수가 ‘이탈리아어’로 이뤄진 것은 그런 연유다. 아르농쿠르도 “바로크 음악의 뿌리는 이탈리아”라고 강조한다.

물론 프랑스도 만만치 않은 전통을 지니고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연재의 3회에서 이미 서술했듯이, 12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고딕 성당과 다성음악(Polyphony)이 융성했다. 작곡가이자 음악비평가인 롤랑 마뉘엘(1891~1966)은 이를 두고 “(새로운 건축과 음악이) 경이로운 쌍둥이처럼 동시대에 태어났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서로 다른 멜로디를 중첩시켜 (…) 유려하고 절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다성음악은 거의 16세기까지 서양음악의 절대적 양식으로 군림했다. 노트르담 악파에서 출발해 기욤 드 마쇼(1300?~1377), 조스캥 데프레(1440?~1521) 같은 쟁쟁한 작곡가들이 다성음악의 명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로 접어들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수세기 동안 꺼지지 않을 횃불 같았던 다성음악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에 훨씬 생동감 넘치는, 이른바 ‘바로크 스타일’의 음악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생생한 움직임, 감정의 범람 등은 프랑스보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기질에 더욱 들어맞았다. 이와 관련해 아르농쿠르의 언급은 중요하다. 부계는 프랑스 쪽이고 모계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문화적 경험으로 치자면 거의 서유럽 전부를 겪었던 그는 이렇게 말한다. “17세기에 들어 점점 더 명료해진 양식의 차이는 무엇보다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의 대조적인 멘털리티에서 비롯했다. 이탈리아인의 기질은 외향적이다. 기쁨이나 슬픔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발적이면서 감정을 강조하고, 무형식을 즐긴다. (…) 이탈리아인들이야말로 실질적인 바로크 양식의 창조자였다. 바로크의 과장성, 무한한 형식의 풍요로움, 상상력과 기발함이 이탈리아인들의 기질에 딱 들어맞았다.”

발레에 미친 루이 14세

그렇다고 프랑스가 존재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고로 예술은 돈과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법이다. 프랑스의 정치와 경제가 동시에 안정된 것은 앙리 4세 때부터였다. 그의 무능한 아들이었던 루이 13세가 왕좌에 앉아 있던 시절에는 리슐리외 추기경(1585~1642)이 사실상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는 세금을 혹독하게 거둬 왕실 수입을 올렸고 위그노 교도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지방의 자치권을 속속 폐지해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1642년에 그가 사망하고, 그로부터 불과 몇년 후에 프롱드의 난(1648~1653)이 발발한 것은 누적된 불만의 폭발이었다. 먹고살기 힘든 백성뿐 아니라 조세제도와 자치권 박탈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까지 합세해 반란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대개의 역사학자들은 프롱드의 난을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존재했던 가장 대규모 봉기”라고 평한다. ‘프롱드’(Fronde)는 ‘투석기’ 혹은 ‘새총’이라는 뜻이니, 당시의 민중들이 프롱드로 돌멩이를 날려 정부군에 저항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때 루이 14세(1638~1715)는 겨우 열 살이었다. 다섯 살에 왕위에 올랐던 그는 섭정 대신이었던 쥘 마자랭(1602~1661)의 손에 이끌려 파리를 간신히 벗어났다.

물론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프롱드의 난은 결국 진압됐고 반란에 참여했던 대귀족들은 루이 14세에게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다. 혹독한 경험을 치렀던 어린 왕은 마자랭이 사망하고 바로 이튿날(1661년 3월10일) 친정을 선포했다. 당시 국무회의에 참여했던 루이 앙리 드 로메니(1635~1698)는 <회고록>에서 “짐은 네 명의 국무비서들에게 짐과 논의를 거치지 않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서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어떤 재정 문제도 짐이 지닌 수첩에 기록되지 않고서는 집행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영림, <루이 14세는 없다>에서 재인용) 루이 14세는 “매우 낮고 메마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이제 시곗바늘을 100년쯤 앞으로 돌릴 필요가 있겠다. 루이 14세가 그토록 열광했던 춤과 음악이 단지 그의 시대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돌연변이가 아닌 까닭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프랑수아 1세(1494~1547)와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 프랑스식으로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일 것이다. 프랑스의 ‘첫번째 르네상스형 군주’로 불리는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예술을 유난히 애호했다. 그가 메디치 가문의 카테리나를 며느리로 점찍은 배경에도 그런 연유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앙리 2세와의 혼인을 앞둔 카테리나는 1533년 9월1일 피렌체를 떠나 10월11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갖가지 가구와 온갖 화장품들,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들, 심지어 키우던 강아지들까지 배에 태웠다. 수많은 신하와 시종들이 이탈리아에서부터 카테리나를 수행했다. 일행 중에는 예술가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발타자르 드 보주아외(1500년경~1587)는 메디치 궁정의 안무가이자 춤꾼이었다.

루브르에 입성한 왕비가 이탈리아에서 날마다 즐겼던 갖가지 예술을 포기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사치와 향락의 왕비’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지만, 단지 그런 불명예만으로 설명을 끝낼 수는 없다. 사실 그는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메디치의 딸답게 예술에 대한 심미안이 높았으며 궁정에서의 책략과 술수에도 능란했다. 이런 인물이 권력자로 떠오르면서 프랑스 궁정의 문화적 풍경은 변모를 겪는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속속 공연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서 언급한 보주아외의 주도로 이른바 ‘발레 코미크’(Ballet Comique)가 등장한다. 물론 당시의 발레 코미크는 지금의 발레와 차이가 많았다. 춤을 앞세운 화려한 볼거리, 재미있는 여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프랑스의 궁정발레(Ballet de cour)가 그렇게 막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발레는 프랑스의 귀족 취향으로 자리잡으면서 형식적 규범을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그 핵심에 ‘발레에 미친 국왕’ 루이 14세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루이 13세도 춤을 추고 대본을 쓰고 작곡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들의 탐닉은 아버지를 훨씬 뛰어넘었다. 루이 14세는 1670년까지 모두 27편의 발레에 직접 출연했다. 스스로를 화려한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다른 귀족들을 들러리로 등장시켰다. 그는 거의 광적으로 발레 행위에 몰입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말하자면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파간다 예술’의 전성기를 맞는다.

장 바티스트 륄리의 시대

프랑스의 화가 앙리 보나르(1642~1711)가 그린 장 바티스트 륄리의 서 있는 모습.

프랑스의 화가 앙리 보나르(1642~1711)가 그린 장 바티스트 륄리의 서 있는 모습.

당시의 프랑스 음악과 발레를 상징하다시피 하는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7)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Giovanni Battista Lulli)였다. 피렌체에서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프랑스의 왕족 기즈 대공의 눈에 띄어 파리에 들어섰다. 대공이 그를 데려간 까닭은 자명해 보인다. 음악 실력도 괜찮고 춤도 잘 췄으며 외모까지 빼어났던 까닭이다. 이 우연한 계기가 필연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자못 드라마틱하다. 대공 밑에서 시종 노릇을 잠시 하던 소년은 열네 살 무렵부터 대공의 조카이자 루이 14세의 사촌인 몽팡시에 부인의 이탈리아어 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말이 ‘선생’이지 실제로는 시종이자 이탈리아어로 소통하는 ‘말동무’였다고 봐야겠다. 한데 그것이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륄리는 몽팡시에 부인의 배려 덕에 여러 귀족들과 안면을 트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는다.

궁정에 입성한 것은 1652년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프롱드의 난이 가라앉고 파리로 돌아온 루이 14세는 그를 자신의 음악가이자 무용가로서뿐 아니라 거의 친구처럼 대했다고 전해진다. 루이 14세가 륄리보다 여섯 살이 적었으니, 아직 어린 소년과 갓 스무 살의 청년이 때때로 왕실의 법도를 벗어나 우정을 나눴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으나 사실로 인정하기에는 근거가 불충분하다. 어쨌든 영화 <왕의 춤>(2000)에서도 묘사하고 있듯이 이 시절의 루이 14세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륄리가 작곡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어린 왕은 그렇게 춤을 추면서, 언젠가는 모후(母后) 안 도트리슈와 섭정 마자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리라는 꿈을 꿨을 법하다.

열다섯 살의 왕이 주연을 맡았던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 1653)는 바로 그런 욕망의 현현(顯現)이었다. 작곡가는 당연히 륄리였으며, 그는 이 발레극에 직접 출연해 춤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수백명을 동원했던 공연은 해 질 녘부터 이튿날 동이 틀 때까지 장장 9시간이나 계속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알려져 있듯이 <밤의 발레>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으로 분장했던 루이 14세는 이로 인해 ‘태양왕’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 책략이었다. 륄리는 루이 14세 곁에서, “짐은 곧 국가”를 꿈꿨던 그의 욕망을 보필했다.

‘무형식’ 즐긴 이탈리아와 달랐던 프랑스
이를 간파한 ‘이방인 궁정음악가’ 륄리가
정교·화려한 ‘프랑스 오페라’ 유행시켜

‘륄리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루이 14세는 그를 ‘궁정음악가’로 임명해 왕실 악단을 이끌게 했다.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륄리는 프랑스 음악계를 사실상 지배했다. 그는 루이 14세의 윤허로 설립된 ‘왕립 춤 아카데미’(1661)와 ‘왕립 오페라 아카데미’(1669)를 통합해 ‘왕립 오페라·발레 아카데미’를 발족시켰고 자신이 총감독을 맡았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파리 국립 오페라·발레’의 전신이다. 이탈리아 출신임에도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했던 그는 이탈리아와는 전혀 다른 오페라를 만들어 유행시켰다. 주지하다시피 이탈리아 오페라의 핵심은 아름다운 선율이 넘실대는 아리아일 터이다. 륄리가 주도한 프랑스 오페라는 달랐다.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춤이야말로 핵심이었다. 또한 륄리는 악보에 엄밀한 지시를 표기해 연주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반드시 지키도록 강제했다. 아르농쿠르도 지적하고 있듯이 “프랑스인들은 어떻게든 형식을 갖추려”는 경향이 강했고 륄리는 거기에 부응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오페라에서 인기곡들을 발췌해 ‘기악 모음곡(Suite)’을 편성했고 이는 ‘프랑스 모음곡’의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 이른바 ‘륄리스트’로 불리는 이들은 이를 유럽 곳곳으로 전파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바흐의 멋진 모음곡들도 그런 전사(前史)를 지닌다.

이처럼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은 이탈리아 출신의 ‘전향자’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음악적 독재자의 마지막은 허망했다. 륄리는 1687년 1월8일, 통풍으로 고생하던 루이 14세의 회복을 기원하는 종교음악 <테 데움>(Te Deum)을 지휘하다가 자신의 지휘봉에 발등을 찍히고 만다. 그로 인한 농양과 괴저로 두 달쯤 뒤에 사망했다. 당시의 지휘는 커다란 막대기로 바닥을 쿵쿵 내려찍는 것이었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륄리의 제자인 마랭 마레(1656~1728, 제라르 드파르디외 출연)가 그렇게 지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발레광 루이 14세를 등에 업고 프랑스 음악계 지배한 이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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