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연출가 임영웅 별세

2024.05.04 19:04 입력 2024.05.05 19:51 수정

연출가 임영웅. 경향신문 자료사진

연출가 임영웅.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도를 기다리며>로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가 4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산울림은 임 대표가 서울대병원 입원 중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이날 알렸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라벌예대에서 수학하고 1955년 연극 <사육신>을 연출하면서 연극계에 데뷔했다. 이후 고인은 10년 이상 직장(신문사와 방송사)과 연극판을 오가며 자신의 표현대로 “이중생활”을 했다.

연극인으로서 고인의 주요 경력은 1969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국에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시작됐다. ‘부조리극’의 대명사와 같았던 이 작품은 뚜렷한 서사가 없으며 두 인물의 언어유희가 이어진다. 당시 관객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마침 그 해에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연일 매진 사례를 이뤘다. 이후 고인은 직장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고인은 2013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1960년대 초반에 신문사 문화부에서 연극담당 기자로 일할 때 일본어판으로 <고도>를 처음 읽었다. ‘야, 이거 희한하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있는 것 같은, 아주 강렬한 느낌이었다”고 돌이켰다. <고도> 초연 이듬해에 극단 산울림을 창단했고, 이후 거의 매년 <고도>를 무대에 올렸다. <고도>는 이후 반 세기 이상 공연하며 22만 관객을 만나는 기록을 남겼다. 배우 손숙·윤여정, 신시컴퍼니 대표 박명성, 연출가 김광보 등 한국 연극계의 중추적 인물들이 고인과 인연을 맺었다. 1985년엔 전 재산을 털어 서울 홍익대 인근에 산울림 소극장을 개관했다. 산울림 소극장은 <고도>를 비롯해 한국 연극사에 남은 숱한 수작들을 선보여 한국 소극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산울림소극장 제공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산울림소극장 제공

고인은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와 같은 번역극, <부정병동> <하늘만큼 먼 나라> 같은 창작극도 선보였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에>를 비롯해 <지붕 위의 바이올린> <키스 미 케이트> 등 뮤지컬 연출자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고인은 2019년 문화예술계 공로자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고, 한국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도 수상했다.

손숙씨는 2014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임 선생님은 대본을 아주 세밀하게 쪼개서 연기를 지도했다. 왼쪽으로 세 걸음 가서 시선은 오른쪽으로, 이 대사를 할 때는 정면을 5초간 바라볼 것 등등, 배우 입장에서는 아주 힘들었다”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배우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성열 연출가는 “임영웅 작품에선 늘 배우가 빛이 난다. 굉장히 치밀하게 설계한 연출을 하지만, 막상 공연을 보면 배우들이 자유롭게 무대에서 노는 것처럼 보인다”며 “인간이 연극의 중심에 서게 하는 것. 그게 임영웅 연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생전 말했다. “기왕에 연극을 하려면 죽기 살기로 했으면 좋겠어요. 취미로, 폼으로 하면 연극이 되질 않아요.”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불문학자 오증자씨, 아들 임수현 서울여대 교수, 딸 임수진 산울림 극장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7일 오전 8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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