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교황’이 남긴 메시지, ‘보수 한국 가톨릭’ 바꿔놓을까

2014.08.20 21:58 입력 2014.08.20 22:11 수정

“고통받는 자 앞에 중립 없다”… 국민 위로·감동

교황의 ‘세월호 관심’ 어떻게 이어받을지 주목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한국 천주교의 방향을 바꿔놓을까.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세월호 참사 가족들을 만나고 진심으로 위로한 교황의 방한이 온 국민의 마음을 촉촉이 적셨다. 정신적 지주로서 가톨릭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나 이번 방한 일정은 당초 행사 위주의 준비 과정과는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 교계 진보 세력의 목소리를 교황청이 정확히 파악해 수용했다.

염수정 추기경이 20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린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단상 뒤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이 보인다. | 연합뉴스

염수정 추기경이 20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린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단상 뒤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이 보인다. | 연합뉴스

교황 방한은 대전교구의 요청에 따라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참석이 확정된 뒤 11월로 예정됐던 124위 시복식이 합쳐지면서 윤곽이 나왔다. 준비 과정도 5개월밖에 안됐다. 원래 방한 준비는 전국 교구 연합체인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맡아야 하는데 일정상 아시아청년대회를 주관한 대전교구와 시복식을 준비하던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러면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해 가톨릭 일각에서는 교황 방한의 방향에 대한 토론이나 합의 없이 행사 위주로만 짜여진다는 불만이 많았다. 교황이 빈민촌, 경남 밀양·제주 강정마을 등 투쟁 현장,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판문점 등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으나 이것이 바티칸에 전달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 사제는 “처음 방한 일정에는 교황의 관심이나 메시지가 별로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교황님이 수차례 위로의 메시지를 발표한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교황청이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한국 내 분위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원했고 방한 준비도 방향이 조금씩 바뀌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연재 ‘바티칸을 가다’의 취재를 위해 지난 6월 로마를 방문했던 신학자 김근수씨도 “교황청 기관지 편집장을 인터뷰했을 때 ‘교황님이 한국 소식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봤는데 한국 대사관, 천주교 서울대교구, 바티칸 언론 외에 밝힐 수 없는 두세 개 출처가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방한 일정이나 장소에 대한 한국 내부의 불만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교황의 행보에는 예수회의 역할도 컸다. 예수회 출신인 교황은 분 단위로 짜인 바쁜 일정을 쪼개 예정에 없이 서강대를 방문해 100여명의 예수회 사제들을 만날 만큼 애정을 보였다. 예수회는 가톨릭 내의 진보개혁 세력으로 분류된다. 실제 한국 예수회 신부들은 강정마을, 밀양 현장 등에서 주민들을 지원하고 있다. 교황청은 방한 전 예수회 차기 관구장인 정제천 신부가 통역을 맡아달라고 교황방한준비위원회에 직접 요청했다.

정 신부가 방한 중 교황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방문지마다 정 신부가 교황에게 직접 귓속말로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보였다. 지난 16일 광화문 시복식 전 카퍼레이드에서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방호막 가장자리에서 기다릴 때도 정 신부가 사인하자 교황이 가족들 앞에서 차를 멈추고 내렸다. 교황방한준비위원장이었던 강우일 주교의 역할도 컸다. 시복식 행사를 위해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세월호 가족의 천막 철거가 논의될 때 강 주교는 “눈물 흘리는 사람을 내쫓고 예수님께 사랑의 성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 천주교 관계자는 교황청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장과 연결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방한 결정 이후 교황청 실사단은 네 차례 입국해 방한준비위와 구체적 내용을 조율했다. ‘작은 차를 탄다’ ‘메시지 중심으로 간다’ 등은 모두 교황청에서 내놓은 원칙이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주필은 “방한 일정을 크게 바꾸기는 어려웠지만, 교황청에서 소외된 사람들 위주로 초청 대상을 조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가톨릭은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정진석, 염수정 두 추기경도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통해 가톨릭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과 기대가 커졌다. 한국 가톨릭은 교황의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확산하고 뿌리내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강우일 주교는 지난 18일 교황 방한을 정리하는 브리핑에서 “우선 차분하게 앉아 고민하고 묵상하고 실제로 우리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모아야 한다”며 “주교회의 차원에서 앞으로 우리 교회가 뭘 할 것인지 대화를 나누었고 10월 총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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