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한국 ‘정의’는 무엇인가

2007.01.01 16:58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최고” “비정규직, 전체의 절반 이상” “미국·멕시코와 더불어 세계 3대 양극화 국가” “서민의 삶 가른 미친 집값”.

지난해 한국사회를 묘사할 때 자주 등장했던 말들이다. 이래도 우리 사회가 ‘정의(正義)’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대안미술잡지 ‘볼(BOL)’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도저한 물결 속에서 정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묵직한 주제에 대해 야심찬 기획을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이 펴내는 이 잡지 2006년 겨울호는 정의에 대한 각계의 글과 미술작품들을 실었다.

낸시 프레이저 미국 뉴스쿨대학 교수(정치철학)는 전지구화라는 상황 속에서는 정의가 논의되는 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정의가 적용되는 단위는 근대적인 영토국가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며 “그러나 지구화는 근대 영토국가가 시민들에게 반드시 정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처럼 나라 경계 안에서 목소리가 대변되지 못하는 사람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인들처럼 비자발적으로 지구 경제에서 분리돼 있는 사람들의 존재는 정의의 사각지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정치학자인 프레이저 교수는 정의의 의미 중 분배의 공평함 측면보다 참여의 동등성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정의는 민주사회의 논의에서 어떤 사람도 배제되지 않는 진정한 ‘대의(代議)’의 의미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 ‘정의사회 구현’ ‘분배의 정의’ 등에서 보듯 ‘정의’라는 말의 용법은 조금씩 다르다. 개인적 덕목이든 법에 의해 수호되는 어떤 것이든 사회·경제적 공평함·합리성이든, 정의는 모두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 개념에서 왔다. 이장희 경인교대 교수(윤리교육)는 ‘저스티스’가 ‘동양철학’에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고민했다. 이교수는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공자의 ‘정직(直)’ 개념을 인용했다.

“아버지가 남의 양을 훔쳤으면 통상 그 자식은 결코 그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 심정이 곧 동양적 정의에 가깝다.”

이교수는 “유가적 현실주의는 가족관계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친친(親親)’에서 출발해 단계적으로 다른 이의 부모도 나의 부모처럼 대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라며 “‘바르고 옳은’ 정치질서는 개개 사람들의 내면적 자율성으로부터 구축되는 것이지 외부적인 정치 사회적 제도나 시스템을 통해 이룩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는 ‘저스티스’일 뿐 아니라 내면적 진정성의 발로여야 한다는 열망도 고려해 볼만하다”는 것이다.

정성철 서울대 강사(미학)는 가장 고전적인 정의론인 롤즈의 ‘사회정의론’을 해설했다. 그는 “정의는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이 받아 마땅한 것을 받아 마땅한 만큼 주기’ ‘응분(應分)에 따른 분배’라는 뜻”이라며 “플라톤에서 롤즈에 이르기까지 정의에 대한 모든 정치철학적 담론들은 응분의 기준에 대한 제각각의 주장일 뿐”이라고 했다.

과학계과 의료계 등의 전문가들이 바라본 정의의 개념도 흥미롭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생명과학)는 “20세기 초만 해도 이성과 과학에 기반할 때 정의는 자동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이제는 과학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정의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며 “과학 혜택의 고른 분배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숙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적 관점에서 본 정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관계가 있다. 유영진 인제대 교수(혈액종양내과의학)는 “의약분업에 반대한 두 명의 의사를 징계한 의사협회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동료 의사를 형제애로 대해야 한다’는 조항을 거론했다”며 “지금은 의사로서의 숭고한 윤리의식보다 의사들 스스로의 길드적 이익 옹호가 주 내용이 됐다”고 말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담고 있는 의료적 정의는 다른 무엇보다 ‘환자를 최우선으로 하겠다’ ‘환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태도가 핵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기획에는 지난해 9월 열렸던 ‘프로젝트 1: 공공의 기대 공공의 잠재력: 정의(正義)’에 참여한 16비버, 스태틱, 코펜하겐 자유대학 등 세 그룹의 대안 예술가 모임이 제작한 사진, 글 등도 포함됐다. 이들은 한달여 한국에 머물며 한국의 정치 군사적 경계들을 탐사하며 ‘정치적 지리적 정의’를 모색하고, 지역의 필요와 관심에 따른 자발적인 교육 커뮤니티 구상을 소개하며 ‘도시와 공간의 정의’를 구현하는 활동을 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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