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

2012.11.21 09:28 입력 2012.11.22 10:55 수정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로잡힌 부녀들은, 비록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다. 어찌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1638년 <인조실록>의 기자가 비분강개한다.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다.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한다.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 사관은 이다지도 격정을 토로하는가. 그리고 왜 최명길을 그렇게 탄핵하는가. 그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환향녀(還鄕女)의 아픔과 한이 절절이 밴 사연이다.

인질로 붙잡혀간 소현세자 부부 등의 숙소였던 심양관. 병자호란으로 약 60만명의 조선인이 붙잡혔으며 이 중 반은 여성들이었다. |경향신문 자료

인질로 붙잡혀간 소현세자 부부 등의 숙소였던 심양관. 병자호란으로 약 60만명의 조선인이 붙잡혔으며 이 중 반은 여성들이었다. |경향신문 자료

■“‘환향녀’와는 살 수 없습니다.”

1638년 3월11일 신풍 부원군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單子), 즉 진정서를 보낸다.

“제 외아들(장선징)의 처가 청나라 군에 잡혔다가 속환(贖還·몸값을 주고 귀국)했습니다.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습니다. 이제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때 마침 그와 반대 입장의 상소도 함께 올라왔다.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의 진정서였다.

“제 딸이 청군에 사로잡혔다가 속환됐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합니다. 원통해 못살겠습니다.”

누구는 며느리가 이른바 ‘환향녀’이므로 아들과의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진정서를 올리고, 누구는 사위라는 작자가 환향녀가 된 자기 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겠다니 원통하다고 호소한 것이다.

조선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이른바 삼배구고두(세번 절하며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치욕을 당한채 항복했다, 사진은 삼전도비.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이른바 삼배구고두(세번 절하며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치욕을 당한채 항복했다, 사진은 삼전도비. |경향신문 자료사진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예조도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사로잡혀 갔다온 사족의 부녀자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조정의 의논을 거쳐야 피차 난처하지 않을 겁니다.”

공론이 시작됐다. 그러나 좌의정 최명길은 단호한 어조로 ‘이혼 및 재혼 불가론’을 펼쳤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렵혔다고 볼 수 있습니까.”

사실 최명길의 주장에는 명백한 근거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똑같은 쟁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이혼 및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조야첨재·朝野僉載>)

이같은 선조의 예에 따라 인조 임금도 최명길의 손을 들어주었다. 환향녀와의 이혼과 다른 여자와의 재혼을 금한 것이다. 하지만 사대부 집안들은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너도나도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한 것이다. 환향녀를 ‘화냥년’이라, 그 여자가 낳은 자식을 ‘호로(胡虜)자식’이라 폄훼하면서….

■전쟁을 맞이한 남정네들의 행태

전쟁이 일어나면 물론 전쟁터의 남성들이 많이 희생당한다. 하지만 힘없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패전하는 날이면 여성들은 그야말로 수난의 수레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무능한 임금, 무능한 아비, 무능한 남편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더 했다.

청나라군의 말발굽이 한반도를 짓밟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된다. 청나라는 인조가 혹 강화도로 피신할까봐 전력을 다해 돌진한 것이다. 강화도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해 수많은 사대부 부녀자들이 피신해있었다. 이른바 천혜의 요새인 ‘금성탕지’라던 강화도가 함락되는 경위를 보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인조는 청나라군이 침략하자 영의정 김류의 아들인 판윤 감경징을 강화 검찰사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최후의 보루인 강화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경징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건사할 능력이 안되는 인물이었다. 우선 자신의 가솔과 절친한 친구들을 강화섬으로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주로 사대부 가족인 피란민들이 수십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는 데도…. 심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는 결국 굴욕적인 항복으로 신하의 예를 차렸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는 결국 굴욕적인 항복으로 신하의 예를 차렸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는 소현세자빈인 강빈 조차도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굶주리며 기다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강빈이 가마 안에서 “경징아 경징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외쳤을까.

그 뿐이 아니었다. 김경징이 독단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자 강화유수 장신은 “난 지휘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며 명령 받기를 거부했다.

김경징은 강화도가 금성탕지(金城湯池·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 매우 견고한 성을 뜻함)니 함부로 적군이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매일 술만 퍼마시며 주사를 부렸다. 남한산성의 임금도 안중에 없었다. 심지어 피란온 봉림대군이 “술만 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충고해도 “대군이 어찌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듣지 않았다.

그러다 강화도가 한번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자 아비귀환이 됐다.

■힘없는 여인들의 최후

소현세자빈은 자기 목을 찔렀다. 내시들이 급히 세자빈을 잡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다른 사대부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려실기술>에는 강화섬에서 수모를 당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윤선거의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맸다. 겨우 9살이었던 아들은 손으로 옷과 이불을 정돈한 뒤 빈소를 정했다. 꼬마는 사방 구석에 돌을 놓고 숯과 재를 덮은 후 통곡하여 하직한 뒤 계집종의 등에 업혀 나왔다. 이돈오의 아내 김씨는 시어머니와 동서 등과 같이 목을 찔렀다. 김씨가 즉사하고 시어머니와 동서가 피를 흘려 옷에 가득 흐르자 청나라군이 버리고 갔다.

홍명일의 아내 이씨와 시어머니를 비롯, 여성 3명은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적병이 엄습하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청나라군이 죽은 사람을 보면 옷을 모두 벗긴다니 내가 죽으면 서둘러 화장하라”고 신신당부한 뒤 목을 매 죽었다. 이호선의 아내는 토굴 안에 숨어있다가 적병이 불을 질렀는 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 유인립의 아내는 적병이 끌고 가려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청군이 총을 난사해 몸의 살이 다 뜯겨나갔지만 꼿꼿하게 선채 넘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사대부 여인네들만 수모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천민의 아내와 첩도 줄줄이 목숨을 끊었다.

“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보지 않고 죽은 자와 바위나 숲에 숨었다가 적에게 핍박을 당해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빠져죽은 여인들의) 머리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했다.”(<연려실기술>)

■“빨리 죽으라”고 눈을 부릅뜬 남편

강화 함락의 장본인인 김경징(강화검찰사)은 도망갔지만, 부인(박씨), 며느리, 그리고 다른 일가의 여인들이 모두 자진했다.

김경징의 아내 박씨는 평소 남편에게 “제발 좀 정신을 차리라”고 바른 말을 했다. 하지만 김경징은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며 힐책했다. 그때 박씨는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하면 여자라 해서 모면하겠나”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못난 남편과 자식과 견주면 그야말로 올곶은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경질의 아들인 김진표는 그런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 여인들을 다그쳐 자살하게 했다. 그런 뒤 자기 혼자 살아남았다.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났다.~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인조실록>)

강화도의 관문인 갑곶돈대. 청나라군이 이 돈대를 통해 강화섬에 쳐들어오자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화도의 관문인 갑곶돈대. 청나라군이 이 돈대를 통해 강화섬에 쳐들어오자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화 유수 장신의 어머니도 죽었다. 강을 건널 때 내관이 봉림대군에게 “장신의 어머니가 있는데 어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봉림대군이 한마디 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는데 낸들 어떻게 하냐”고…. 어머니는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강변에서 죽고 말았다. 참으로 한심한 아들이 아닐 수 없다. 훗날 임금(효종)의 자리에 오른 봉림대군의 몰인정도 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정선흥의 아내는 청나라 군사가 접근하자 왕족인 회은군 이덕인에게 달려갔다. “영감(회은군)은 네 아버지와 절친하니 나를 살려달라”고…. 그러나 회은군이 난감해했다.

“내가 어쩌겠느냐.”

그러자 남편 정선흥이 눈을 부릅뜨고 “빨리 죽는게 낫다”고 꾸짖었다. 아내가 칼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은군이 남편 정선홍에게 “빨리 가보라”고 했다. 과연 아내는 죽어 있었다. 모두 <연려실기술>에 있는 이야기다. 사실이라면 천인공노할 짓이다. 청군에게 짓밟힐까 두려워 살려달라는 아내에게 “빨리 죽으라”고 겁박하고, 급기야 죽게 만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청에 끌려간 30만의 여인네들

이렇게 자의든, 자의반 타의반이든. 타의든 죽음을 선택하거나 강요당한 여인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엄청난 수의 여인들이 볼모로 잡혀가 곤욕을 치렀다.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도 그 사이에 끼어있었으니 오죽했으랴. 다산 정약용의 <비어고(備禦考)>는 “청나라로 간 사람은 60만명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의 포로가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으로 휘두르며 몰아갔다.”(<연려실기술>)

제비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연미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정묘호란 때 후금과의 형제맹약을 맺은 장소이며, 병자호란 때도 불에 탔다. 강도몽유록의 무대가 된 곳이다.

제비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연미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정묘호란 때 후금과의 형제맹약을 맺은 장소이며, 병자호란 때도 불에 탔다. 강도몽유록의 무대가 된 곳이다.

1637년 1월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행했다. 청나라군은 수많은 포로를 데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군의 철수행렬은 30일이나 이어졌다.

“사대부의 아내나 첩, 처녀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비어고>)

■정절을 지킨 여인들

목불인견의 과정 끝에 청군에게 붙들려 간 여인네들은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청나라 병사들이 어떤 아름다운 처녀를 끌고 가면서 온갖 수단으로 달래고 협박했다. 그러나 처녀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고 단식으로 항거했다. 결국 처녀는 끌려가던 도중에 굶어죽었다. 그러자 청나라 사람들도 그 정절에 감탄해서 처녀를 묻어주고 떠났다.

또 심양(청나라 수도)에서 어떤 처녀를 두고 몸값을 협상할 때 청나라 사람이 너무 과도한 약수를 요구했다. 그러자 이 처녀는 ‘환향’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좌의정 최명길은 아내(딸)의 속환을 위해 심양을 찾은 남편(친정부모)과의 애절한 만남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며 ‘이혼·재혼 불가론’을 호소했다.

“심양에 속환(몸값을 주고 인질을 돌려받는 것)을 위해 따라간 남편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이 붙들려 간 아내를 보고는 저승에 간 이를 만난 듯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부족해도 부모나 남편은 붙들려 간 아내를 위해 돈을 마련할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혼을 허락해보십시요. 어느 남편이 아내를 위해 돈을 마련하겠습니까. 이는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못생겼다”고 수모 당한 조선의 여인들

홍제천. 환향녀들이 이 강을 건너 귀국하면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잊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홍제천. 환향녀들이 이 강을 건너 귀국하면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잊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기막힌 일 또 하나.

“예전에 명나라에 바친 여자들은 극히 예쁜 여자들만 뽑아 보냈는데, 지금은 저렇게 못생긴 여자들만 보냈는가? 그리고 24명 보내기로 했는데 10명만 보낸 연유가 무엇인가.”

1637년 9월6일,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조선의 사신 백대규를 꾸짖었다. 청 황제는 10명의 여자들을 직접 간택하면서 평양의 장옥, 용강의 영이, 삼화의 업생. 청주의 영춘 등 4명만 황궁에 두었다. 나머지는 여러 제후들의 집에 보냈다. 그 과정에서 조선에서 보낸 여자들이 못생겼다고 타박했던 모양이다. 무슨 연유에서 이 여성들이 이역만리 청나라에 가야 했을까.

모두 항복문서에 따른 것이었다. 1637년 1월30일 작성한 항복문서에 “(청과 조선의) 안팎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혼인관계를 맺어 사이좋게 지낸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인조실록>)

8개월이 지난 1637년 9월 청나라는 “그 때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당황한 조선은 차일피일 결정을 미뤘다. 하지만 청의 재촉이 극심해지자 조선은 관기·관비 등에서 선발한 여인 10명을 보냈는데, “못생겼다”는 굴욕적인 말만 들은 것이다. 그야말로 치욕의 역사인 것은 틀림없다.

■천차만별 몸값

청나라는 붙잡아온 인질들을 성문밖에 모아두고 시장을 열었다. 백주대낮에 공개적인 ‘인질장사’를 벌인 것이다.

“청인들이 남녀 인질들을 모아놓으니 수만명이 됐다. 모자가 상봉하고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심양일기>)

인질 1인당 몸값을 천차만별이었다. 양국간 교섭에 따른 1인당 몸값은 은(銀) 25~30냥이었지만 실제로는 1인당 100~250냥에 이르렀다. 일부 사대부 집안이 비공식적인 인맥을 통해 자신의 가족들을 빼오려 했기 때문에 몸값이 폭등했다. 영의정 김류가 첩의 딸을 구하기 위해 용골대에게 은 1000냥을 불렀고, 병조의 사령 신성회는 600냥을 냈다.

영중추부사 이성구는 무려 은 1500냥을 지불했다. 이 사건은 큰 물의를 빚었다. 몸값을 높인 죄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조선인 출신의 청국 통역관인 정명수에게 온갖 모욕을 받아가면서까지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것이었다. <병자록> ‘잡기난후사(雜記亂後事)’의 기사를 보자. 정명수가 이성구를 모욕하는 대목이다.

“대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똥구멍에서 나온 소리보다 못합니다.”

그래도 이성구는 이 말을 모욕이라 여기지 않고 졍명수에게 신신당부했다. “내 아들이 심양에 곧 갈테니 잘 봐달라”고….

■‘환향녀의 회절강?’

귀국하는 환향녀들이 홍제천 등 조정이 지명한 이른바 회절강(回節江)에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잊게 했다는 전설이 남았다. 그만큼 ‘환향녀’ 문제는 컸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이상적인 유교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조선으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환향녀’ 문제였다.

사실 <경국대전> ‘이전(吏典)·경관직’은 “정절을 잃은 부녀자의 가문은 자손 대대로 문과에 응시하거나 요직에 등용될 수 없었다”고 규정했다.

이것을 문제 삼았다. 사대부 집안들은 환향녀들을 ‘청군에 끌려갔다가 정절을 잃고 귀환한 여인들’로 낙인 찍었다. 앞서 밝힌 장유의 진정 이후에도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졌다.

장유의 진정이 큰 논란을 빚은 지 불과 두 달만인 1638년 5월 다시 대대적인 이혼론이 제기됐다. 특진관 조문수의 주장은 강경했다.

“부부는 인간의 대륜입니다. 포로로 잡힌 여자들은 남편의 집안과 대의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어찌 다시 억지로 합해 사대부의 기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은 예의의 나라인데….”(<인조실록>)인조는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은 이미 본심에서가 아니었고 죽을 수도 없었다”며 “더는 재론하지 말라”고 매듭지었다. 그러니까 환향녀와의 이혼하는 것도. 환향녀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도 불허한다는 것이 조정의 공식입장이었다. 하지만 일부 사대부들의 아우성은 계속됐다.

맨 먼저(1638년) 이혼론을 주장한 장유가 사망하자(1640년) 장유의 부인 김씨가 다시 한 번 상소를 올렸다. 외아들인 장선징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환향녀인 며느리가 타고난 성정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조목을 들었다. 인조는 “훈신의 와아들인만큼 이번만 예외로 이혼을 허용하라’는 명을 내린 뒤 “관례로는 삼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죽자마자 출향된 환향녀

그러나 법은 ‘이혼 및 재혼 불가’였다. 그러나 온갖 예외가 만들어진 법은 누더기가 됐다.

효종 때인 1649년에도 논란은 계속됐다. 사헌부가 아룄다.

“정자(程子)가 ‘절개를 잃은 여자를 배필로 삼는 것도 이미 절개를 잃은 것(娶失節者以配身 是己失節也)’이라 했습니다. (환향녀와) 이혼하지 말라는 법을 시행하지 마시고, 재혼을 허락해 주십시요.”

효종은 결국 이 ‘환향녀와의 이혼 및 다른 여자와의 재혼’을 금한 법을 폐기했다. 그런데도 환향녀 논란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됐다.

1677년(숙종 3년)의 일이다. 사헌부 소속 관리인 최선이 징을 쳐서 그의 이복형(최관)이 자신의 어머니를 사당에서 출향(黜享·제사의 대상에서 쫓겨나는 것)했다고 호소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연려실기술>과 <현종실록> 등을 통해 알아보자.

최선의 어머니 권씨는 최계창이라는 인물의 후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선의 어머니는 청군에게 강화도에서 개성까지 끌려갔다가 몸값을 주고 풀려났다.

최씨 집안은 이른바 ‘환향녀’인 권씨를 전혀 홀대하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도리어 권씨를 가문의 종부(宗婦)로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전처의 아들인 최관에게도 “네 어미로서 섬기라”고 신신당부했다. 최관의 작은 아버지도 20여 년 간 권씨를 형수로 대했다. 권씨가 죽었을 때도 최관은 3년복을 입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작은 아버지가 권씨의 장례를 마치고 관을 묻는 날에 “(환향녀인) 권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가묘(家廟·사당)에 둘 수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최관은 작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자시의 이름을 방제(傍題· 신주 아래 왼쪽에 쓰는 제사 받드는 사람의 이름)에서 삭제했다. 그런 뒤 권씨의 신주를 권씨의 소생인 최선의 집에 내쫓아 버렸다. 권씨와 권씨의 소생 최선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심양도 아닌 개경까지 끌려갔을 뿐인데…. 그야말로 ‘쿨’한 시부모를 만나 20여 년 간이나 종부로서 가문을 지켜왔는데, 이제와서 ‘화냥년’의 굴레를 씌우며 쫓아내다니….

최선으로서는 징이라도 쳐서 억울함을 풀려 했을 것이다.

■“남자분들이나 잘하세요.”

정묘호란 때(1627년) 이런 일이 있었단다. 1월17일에 후금군이 능한산성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곽산군수 박유건과 정주목사 김진이 집안식구들과 함께 항복을 애걸하고 머리를 깎았다. 적은 그의 처첩을 간음하고 늘 장막 속에 두었다. 행군할 때는 박유건과 김진에게 각각 처첩의 말고삐를 잡게 했다. 박유건이 아내의 부정을 책망하자 처첩들은 남편의 불충을 꾸짖었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정묘노란’)

물론 당대의 윤리기준으로 볼 때 남편이 절개를 잃은 자신의 처첩들을 속수무책으로 봐야 했고, 또 그 처첩의 말고삐를 잡아야 했으니…. 그 심정은 필설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추상같이 남편들의 불충을 꾸짖은 여성을 보라.

또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강도몽유록>이란 작품을 보라. 강화도에서 죽은 15명 여인들의 혼령이 한 곳에 모여 한많은 사연을 토로하는 꿈 이야기이다.

여기서 영의정 김류의 부인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무능한 아들을 강화수비의 총책으로 맡긴 것을 한탄한다. 또 성문을 열어 적을 맞아들이고 무릎꿇고 목숨을 구걸한 남편을 둔 여인의 이야기도 있다. 남편이 국록을 받으면서 오랑캐의 종이 되어 상투를 잘랐다는 여인도 있다. 혼인한 지 두 달 만에 전쟁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지만 남편은 그 사실도 모르고 아내를 의심하고 있다는 탄식하는 여인도 있다.

또 한 여인은 마니산 바위 굴에 숨었다가 적벽에서 투신, 으깨진 비참한 몰골로 원한을 토로한 여인도 있다. 기생인 마지막 여인은 순절한 여인들을 찬양한다. 한마디 한다.

“나라의 수치에 충신으로 의(義)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 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인데….”

그러니까 누가 ‘정절’을 논하고 꾸짖는단 말인가. 못난 임금, 못난 아비, 못난 남편을 만난 여인들이 하는 말은?

“남자분들이나 잘하세요.”

<참고자료>

강성문, <조선정부의 포로송환 노력>, 제1회 병자호란 김화백전대첩 기념학술대회, 국방문화재연구원, 2012

김남윤, <조선여인이 겪은 호란, 이역살이, 환향의 현실과 기억-소현세자빈 강씨를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17호, 역사학연구소, 2007

소현세자 시강원, <심양장계(심양에서 온 편지)>, 정하영·박재금·김경미·조혜란·김수경·남은경 역주, 창비, 2008

정약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해렴 역주, 현대실학사, 2001

김병규, <조선 인조대의 경세론과 주화론 연구:이귀와 최명길을 중심으로>, 아주대 석사논문, 2008

이기환, <분단의 섬 민통선>, 책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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