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적 정당성은 쌓아가는데…‘공론’ 못 만드는 공론화위

2017.09.25 06:00

신고리 원전 ‘운명의 한 달’

[‘탈원전’의 길 찾기]절차적 정당성은 쌓아가는데…‘공론’ 못 만드는 공론화위

지난 16일 충남 천안시 교보생명 연수원 계성원. 머리카락을 초록색으로 염색한 젊은 여성에서부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까지 각지에서 온 시민 478명이 대강당을 가득 메웠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선발한 ‘시민참여단’이 오리엔테이션을 받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로써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운명을 결정할 공론조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된 셈이다.

그러나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라는 당초 목표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따라 시민의 참여와 숙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 구현의 새로운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만 함몰되지 말고 ‘시민을 설득’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여전히 팽팽한 샅바 싸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는 지난 7월24일 전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가지고 출범했다. 공론화위는 지난 두 달간 공론조사 계획을 수립해 가면서 시민 2만명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 시민참여단 500명 선발 등 실무적인 절차를 밟아 왔다. 원전 찬반단체가 추천하는 전문가들로 ‘이해관계자 소통협의회’를 구성했고, 공론조사 전반의 객관성을 검증할 ‘검증위원회’도 위촉했다. 지역별 순회토론회도 시작했다. 공론화위는 절차적 정당성을 쌓아 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부적으로 찬반 양론 측의 입장이 첨예해 예정보다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

시민참여단에 제공할 자료집과 동영상 제작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8월 말 공론화위는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과 재개 진영에 자료집의 구성과 형식을 통일해서 작성해줄 것을 요구했다. 소통협의회에서는 양측이 그간 펼쳐온 논리전개 방식이 워낙 달라 통일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꼭지수는 7개, 총분량은 A4용지 20장 이내에서 자유롭게 서술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 자료집 제출 단계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공사 재개 측에서 형식의 통일을 주장하고 공론화위가 공사 중단 측에 협조를 종용하자 공사 중단 측이 ‘보이콧’까지 거론하며 반발한 것이다.

계속되는 줄다리기 끝에 지난 21일 자료집 제작과 동영상 녹화에 합의했지만 이번에는 건설 재개 측에서 보이콧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를 주장하는 단체들은 24일 기자회견을 열어 공론화위가 중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공론화위 요청에 따라 지난 22일 한국수력원자력과 한수원 노조 측에 공문을 보내 건설 재개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지 말도록 요청한 것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건설 중단 측은 공기업인 한수원과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 등이 공론화 과정에 나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건설 재개 측은 원전의 특성상 전문가들이 정부출연 연구기관에 소속될 수밖에 없으므로 공론화위가 편파적인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건설 재개 측의 행동에 맞서 건설 중단 측도 다시 반발하고 나설 기미를 보이고 있다.

■ 사회적 공론화는 아직 엄두 못 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론화위는 ‘판’을 깨지 않는 데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절차를 완비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전 사회적 공론화라는 목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론화위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전문가는 “공론화위가 초반에는 뭘 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이제는 막중한 임무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하지만 여전히 책잡히지 않고 갈등을 봉합해서 모든 절차를 문제없이 마치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다 보니 굉장히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론조사 전문가들은 국가적 수준에서의 공론조사가 사실상 처음 시도되는 것인 데다 공론화위가 충분한 준비 없이 출범했고, 사안 자체에 대한 찬반 의견이 워낙 첨예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선과 시행착오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공론화위 검증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박원호 서울대 교수는 “공론조사의 취지가 전문가들이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시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라면서 “이런 전제가 합의되고 실제 공론조사에 들어간 것 자체가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공론화위 출범 당시 고조됐던 사회적 관심이 시간이 갈수록 잦아드는 현상은 안타까운 지점이다. 이영희 교수는 “공론화위가 초반부터 자료집을 외부에 제공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공론화가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었는데 시민참여단 500명에만 목매어 두 달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낸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제 현실적으로 공론화위에 남은 과제는 시민참여단을 차질 없이 끌고 가는 것과 지금이라도 대국민 홍보활동을 강화해 공론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공론화위가 다음달 21일 내놓을 권고안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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