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Ⅵ 미주편-3. 방치된 하와이 유적

2005.10.03 17:55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전초기지인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의 염원이 구체적으로 펼쳐진 곳은 호놀룰루 시내다. 하지만 호놀룰루 시내에서도 외곽의 사탕수수밭처럼 한인의 자취를 찾기 힘들었다. 국민회·동지회 등 한인 단체들이 활동했던 건물은 형태만 간신히 남아 있을 뿐, 그곳이 유적지임을 알리는 조그만 표지 하나 없었다. 하와이 내 유일한 독립운동 박물관조차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하와이는 미주지역 독립정신의 산실로서의 면모를 잃어가고 있었다.

누우아누 애비뉴의 오하우 공동묘지에는 초기 이민 한인 수백명이 묻혀 있다. 초기 한인들은 죽을때까지 조국에 대한 염려를 떨쳐내지 못했다.

누우아누 애비뉴의 오하우 공동묘지에는 초기 이민 한인 수백명이 묻혀 있다. 초기 한인들은 죽을때까지 조국에 대한 염려를 떨쳐내지 못했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기관은 대한인국민회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호놀룰루 밀러 스트리트 1306번지에 사무실을 차리고 활동을 시작했다. 회원은 4,000여명으로 해외 한인단체 중 최대 규모였다.

국민회는 ‘국민의무금’을 모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여러차례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무장 항일투쟁 전선에 내보낼 군인 양성 운동을 펼쳤다. 1914년 설립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는 그 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국민회는 미국 정부로부터 자치기관으로 인정받아 한인사회에서 경찰권도 행사했다.

하지만 지금 밀러 스트리트에서 국민회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다. 1948년 하와이 주정부의 건물·토지 징발로 국민회 건물은 헐렸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하와이 주지사 관저가 들어서 있다. 해외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국민회 터는 밀러 스트리트에서 오직 번지수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1948년 국민회는 밀러 스트리트에서 루크 애비뉴 2756번지로 자리를 옮겼다. 2001년 국내 경민학원은 국민회로부터 이 건물과 토지를 사들인 뒤 독립운동 및 한인 이민 관련자료를 전시하는 ‘독립문화원’으로 개조했다.

기자가 얼마전 이곳을 찾았을 때 유럽풍의 흰색 건물 앞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건물 입구 쪽에는 ‘한국독립문화원’이라고 선명하게 적힌 간판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한인들의 독립정신과 그 뜻을 기릴 수 있는 하와이 내 유일한 공간인 독립문화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와이대 한국학 연구소 이덕희 연구원은 “1980년대 하와이 주정부에 이 건물을 역사보존지로 등록했으나 그 뒤 개인 주택지로 건물 용도가 바뀌면서 사실상 운영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와이에서는 개인 주택을 박물관·기념관 등 공공 목적으로 쓰지 못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독립문화원 앞뜰에 추모비가 남아 있어 당시 한인들의 독립정신을 전하고 있었다. 추모비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입의 십일조 등을 바치며 온 충성을 다하다가 눈을 감으신 무명의 애국지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여기 추모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었다.

기자는 이승만이 주도한 동지회 관련 유적을 찾아 나섰다.

국민회 주도권을 놓고 박용만과 다투던 이승만은 1921년 7월 지지자를 모아 동지회를 조직하고 국민회와 결별했다. 이승만의 동지회 설립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국민회가 1948년부터 사용한 루크 애비뉴 2756번비 국민회 회관. 국내 경민학원이 2001년 사들여 독립문화원으로 개조했으나 사실상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국민회가 1948년부터 사용한 루크 애비뉴 2756번비 국민회 회관. 국내 경민학원이 2001년 사들여 독립문화원으로 개조했으나 사실상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동지회는 구미 열강의 동의와 후원을 얻어 일본을 견제하고 독립을 앞당기려는 외교주의론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다. 동지회는 독립운동과 관련해 하와이 최대 한인단체였던 국민회와 협조할 때도 있었지만 반목과 갈등이 심했다. 국민회와 동지회의 갈등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하와이대 역사학과 최영호 명예교수는 “이승만은 동지회 소속 한인들에게는 ‘성인(聖人)’이었지만 국민회 소속 한인에겐 ‘수준 이하의 인간’으로 여겨졌다”며 “극과 극을 달리는 인식 만큼 갈등의 골도 깊고 오래갔다”고 말했다.

동지회가 1930년부터 회관으로 사용한 쿠아키니 스트리트 139번지 건물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1949년부터 사용한 노스 킹 스트리트 929·931번지 회관 건물은 내부 수리중이었다. 어느 곳에도 건물이나 터의 내력을 알리는 표지는 없었다.

릴리하 스트리트 1832번지 한인기독교회에는 이승만 동상이 서 있었다. 이승만은 1917년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다. 1938년 이곳으로 이사한 릴리하 스트리트의 교회에는 이승만 관련 기념관도 마련돼 있었다.

호놀룰루에서 초기 한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뜻밖에도 묘지였다. 마지막으로 들른 누우아누 애비뉴의 오하우 공동묘지에는 한인 수백명이 묻혀 있었다. 묘비에는 출생·사망 연월일과 이름, 본적, 그리고 사진이 붙어 있었다. 묘비 하나하나가 곧 역사였다.

‘김봉선 AUG.14.1878~AUG.11.1947. 원적 경상북도 의성군’, ‘병균 FEB.16.1884~AUG.10.1928’, ‘아버지 박봉남 1894~1936 조선 경남 김해군’.

최영호 교수는 “여기 묻힌 사람들이 바로 사탕수수밭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또 삯바느질을 하면서 모은 피같은 돈을 조국 독립을 염원하며 기꺼이 보낸 이들”이라면서 “어떻게 보면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조국에 대한 염려를 떨쳐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 호놀룰루|글·사진 김종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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