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거주 10년 박노자 교수

2010.11.15 22:25
이종탁|사회에디터

“G20 포스터에 쥐 그렸다고 영장 청구, 유신독재 시절과 같아”

박노자 교수는 토종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귀화 한국인이다.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을 갖고, 인연을 맺고, 거주한 기간까지 모두 합쳐도 십수년밖에 안되는 외부인이지만 이 땅에서 평생 살아온 내부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꿰뚫어본다. 한국말과 글에 능숙한 것은 물론 한국 역사, 정치체제, 문화, 한국인의 고정관념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지적한다. 그의 진단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통렬하다. 그의 이념, 그의 해법에 견해를 달리할 수는 있어도 진단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박 교수는 10년 전 “산유화의 저자는 누구인가”와 같은, 여느 외국인에게는 엄청나게 어렵지만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와도 같은 귀화 시험을 쳐 공식적·합법적 한국인이 됐다. 그때부터 한국을 지칭할 때 ‘우리’라는 표현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은 그에게 여전히 타자(他者)다. 온전히 몸과 마음을 기댈 곳이 없다. 그가 한국에 머무를 때의 신분이란 겨우 비정규직이었을 뿐이며, 그나마 계약기간 3년이 다 되었을 때 더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가 2000년 생면부지의 땅 노르웨이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그곳에 정규직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싫어서, 또는 노르웨이가 부자여서가 아니라 그저 취업이주를 한 것이다.

10년째 노르웨이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인 박노자 교수가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학자이며 사상가인 함석헌, 식민지 시대 작가 염상섭, 시인 윤동주·김수영, 그리고 김남주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10년째 노르웨이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인 박노자 교수가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학자이며 사상가인 함석헌, 식민지 시대 작가 염상섭, 시인 윤동주·김수영, 그리고 김남주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그렇게 오슬로 대학 동양학부 교수가 된 지 올해로 만 10년이 되었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타자 생활이다. 노르웨이에선 일정기간 거주하면 별도의 귀화시험 없이 국적을 주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노르웨이 국민이 되기를 거부한 채 한국 호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서 국적 따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 눈에는 ‘노르웨이에 사는 러시아 출신 한국인’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에 관심 가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와 한국, 노르웨이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의 눈에 비친 3국 3색은 어떤 빛깔이며, 한국의 오늘에 대해서는 어떤 진단을 내릴까. 한국작가회의 주최 ‘세계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박 교수가 발표자로 초청돼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 교수를 찾아간 배경이다.

인터뷰는 소설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가 이번 세미나에서 ‘밀실을 이야기하며 광장을 암시한다’는 제목으로 최인훈의 <광장>과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분석한 것과 관련한 질문이다. 그는 이 두 소설이 한국적 상황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또한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포인트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광장은 공적 영역을, 밀실은 개인의 사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광장이 부재한 나라입니다. 개인은 있어도 시민은 없는 나라입니다. 소설 <광장>에 보면 주인공이 남한 경찰의 구타 때문에 월북을 합니다. 폭력에 맞서기보다 도피하는 거죠. 북에 가서도 체제에 맞서기보다 순응합니다. <빛의 제국>에는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 나옵니다. 그런데 부인도 남편이 간첩인 줄 눈치채지 못합니다. 개체간 소통이 안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예요. <광장>에선 고문이 나오지만 <빛의 제국>에 오면 고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완벽한 감시망이 있어요. 작가의 e메일을 국가가 열어보는 것과 같은. 국가는 강화되고 개인은 약화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어제와 오늘의 한국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광장과 소통의 부재라고 보시는 건가요.

“많은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계급구성원 사이에도 소통이 안되는 게 현실이니까요. 그러다보니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공유가 없습니다. 연대의식이 부족한 거죠. 그게 바로 기륭전자가 장기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질문 2개를 던졌을 뿐인데 이념색채가 드러난다. 조금 더 선명한 이야기를 이어가자. 그는 세종로 이순신 동상에 반대한다. 그런 광장에는 큰 칼 옆에 찬 군인 대신 노동자 연대를 외친 전태일의 동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순신 동상 자리에 전태일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 한국사회에서 공감을 사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한국에선 진보 커뮤니티가 유럽에 비해 너무 미약하니까요. 진보의 정치적 비중이 적어 사회 여론을 이끌 힘이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전태일이 연대의 화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올해가 전태일 40년인데 G20에 가려진 것 같아 안타까워요.”

-전태일 이후 한국 노동자들의 지위도 향상되고 민주화도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제도적 민주주의가 갖춰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있느냐, 정치의 장에서 대안이 존재하느냐, 이념을 달리하는 여야가 있느냐 하는 점 등을 짚어봐야 합니다. 공평선거는 이뤄졌지만 표현의 자유는 과거로 돌아갔잖아요. G20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유신독재 시절과 다를 바 없어요. 한국만큼 병영화된 사회는 드물 거예요.”

-노르웨이 생활은 어떤가요. 그곳에 사신 지도 이제 10년이 되었는데요.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올해 여덟 살, 초등 3학년입니다. 이 아이가 저보고 아빠가 배관공이면 좋겠다고 해요. 배관공은 일찍 귀가하는데 아빠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노르웨이에선 배관공·전기공의 임금이 교수인 저보다 많습니다. 굳이 대학가겠다고 강요된 공부를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명목임금이 6만크로네 정도인데, 이 중 절반이 세금으로 나가고 여기에 노조가입비를 빼면 2만9000크로네 정도 됩니다. 우리 돈 600만원 정도인데 그곳 물가가 두세 배 비싸다는 점을 감안해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하면 300만~400만원쯤 될 겁니다. 배관공은 이보다 조금 더 받는 거죠. 분배의 정의가 어느 정도 실현된 사회입니다.”

-우리 같은 교육문제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군요. 그런데 그렇게 공부 안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소위 국가경쟁력은 어떻게 되나, 이런 의문이 드는데요. 이것도 한국적 사고인가요?

“고급인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노르웨이는 무료교육에 대학입시가 없다는 것 아시죠? 내신을 가지고 입학시킵니다. 오슬로 대학의 일부 학과는 경쟁률이 2 대 1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학과는 그냥 들어옵니다. 진짜 경쟁은 박사과정부터입니다. 국가에서 월급을 주는 장학생이 되는 거니까요.”

-그럼 대학에는 수학능력이 안되는 학생도 있을 것 아닙니까.

“입학생의 20~30%는 도중에 그만둡니다. 공부가 적성에 안맞으면 배관공을 하는 거죠. 그러다 공부에 관심 생기면 다시 대학 다니고. 그래서 30~40대 학생도 많습니다.”

-노르웨이에서 한국사회를 어떻게 그렇게 잘 보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어를 매일 다양하게 쓰는 게 도움되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도 거의 한국어로 아내와 이야기하고 매일 한국 책과 인터넷 신문을 읽고, 편지나 블로그글, 학술논문 등의 형태로 한국어 작문을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언어에 대한 친화성이 생기는데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죠. 한국어와 삶을 공유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어친화성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하지만 그의 한국어 실력은 혹독한 작문훈련을 통해 단련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구 레닌그라드대) 조선학과에 다닐 때 교수는 노동신문 사설을 통째로 외워 쓰도록 시켰다고 한다. 노동신문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안다. 김일성 부자에 대한 찬양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 재미없고 딱딱하고 장황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사설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당시엔 무척이나 가혹한 학습법이었지만 덕분에 지금도 사설 몇몇 대목을 외울 정도”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국어를 고급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해 준 게 한문학이다. 대학 때 그는 한시의 시마(詩魔)에 시달려 부운(浮雲·떠다니는 구름), 고봉(孤蓬·외롭게 떠다니는 다북쑥), 공담(空潭·인기척이 없는 못)과 같은 말들을 늘 머릿속에 넣고 살았고, 이백(李白)이나 왕유(王維)의 시를 읊조리고 다녔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또 노르웨이로 뿌리 없이 떠다니는 부평초 같다는 생각은 안해보셨는지요. 종전 어느 인터뷰에서 한국에 자리만 있으면 언제든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저야 당연히 국내로 가고 싶죠. 하지만 가족이 있어 이젠 신중하게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내가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비정규직 음악교사였는데 노르웨이에서 정규직이 됐거든요.”

그의 부인 백명정씨도 남편처럼 한국에서 얻지 못한 정규직 일자리를 노르웨이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에게 한국은 비정규직의 나라, 노르웨이는 정규직의 나라인 셈이니 이걸 우연이라 해야 하나, 모순이라 해야 하나.

-한국에 귀화한 이유를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읽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은 어떤가요.

“귀화를 결심할 때와 달라진 게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사회문제에 개입하려면 국적취득을 통해 한국인과 운명을 같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의 다종족화 과정이 아직 시작단계여서 일정 정도 타자, 즉 ‘당신들의 나라’로 보이는 건 사실이죠.”

-떠나온 나라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고향에 대한 향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자본화된 러시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분노밖에 없습니다. 과거 소련에선 학교 옆에 유도 도장, 그 옆에 역도 도장, 그 옆에 도서관이 있는 식으로 공공시설이 많았어요. 독서문화가 활발했고, 가난해도 서로 비슷한 처지여서 행복했죠. 그런데 지금 러시아는 지옥입니다.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제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연금으로 생활합니다. 연금이라고 해봐야 ‘고기 한 점 살 수 없는’ 수준이고, 언제 수돗물이 끊길지 모르는 슬램 아파트에서 연명하는 신세예요. 이런 나라를 보고 정말이지 실탄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제 여동생은 핀란드로 이민갔어요.”

러시아 이야기가 나오자 목이 메이는 듯 말의 속도가 느려진다. 억양의 높낮이가 심해지면서 분노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고향 잃은 망명 지식인의 애절함이 느껴진다. 한국 이야기로 돌아가자.

-한국 정치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며 입당의사를 밝힌 적이 있죠?

“예, 변함없이 지지하는데 입당은 못했습니다. 제가 귀화절차가 완료되기 전 노르웨이로 이주해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요. 입당원서 하나 쓰는데 너무 복잡하더군요.”

-민노당은 어떻게 보나요. 최근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민노당 입장이 논란이 되었는데요.

“진보의 유일한 무기는 도덕성입니다. 도덕성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3대 세습은 사회주의와 무관합니다. 근대적 합리성은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에요. 북한은 그것마저 못하는 나라인데 진보진영이 그에 대한 말도 못한다는 것은 도덕성이 무덤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두 개의 진보정당은 사치다, 이런 주장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그와 배경이 조금 다르지만 요즘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중심이 되어 야권단일정당을 만들자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反)한나라 기치 아래 뭉치자는 것이죠. 진보정당 통합 또는 야권통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보신당은 노동자를 대변하지만 민노당은 계급보다 민족을 중시해 통합이 어려워 보입니다. 안되면 정책공조를 통해 연대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민주당까지 다 합치자는 문씨 입장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한나라 치하’에 살아보지 않아서, 이 땅에서 고생하며 사는 사람과 입장이 다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전술의 차이만 있을 뿐 전략의 차이는 없는 당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동정책에서 의미 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어요. 그들이 집권하면 또 비정규직을 양산할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하느님이 한국을 구했다’고 평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땐 그런 생각을 했었죠. 하지만 모든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노 정부는 한국 경제를 미국에 편입시키는 한·미 FTA를 추진하고, 이라크에 파병을 하고, 양극화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제가 개혁사기꾼이라 부르는 이유죠. 유시민씨가 대통령 될 가능성, 저도 있다고 보는데 그가 되면 노동계급에 아무 도움 안될 겁니다. 노동자는 유시민씨나 박근혜씨 모두 반대하고 독자적 정치세력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토종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아는 ‘귀화 한국인’
박노자는 누구

박노자(朴露子) 교수의 본래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할 때 스승인 미하일 박 교수의 성을 따르고, 러시아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 호적에 올렸다. 그를 낳아준 러시아의 아버지는 원자력 발전소 변전기 엔지니어, 어머니는 미생물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두 분 다 유대인이었다.

인텔리겐치아 집안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는 책벌레였다. 찰스 디킨스나 쥘 베른 같은 세계명작을 샅샅이 읽었고, 공산당 정권이 반동적 철학으로 보는 니체나 쇼펜하워를 탐독했다.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교 때 텔레비전에서 북한영화 <춘향전>을 보면서다. 이때 ‘코레야’란 나라를 처음 들어본 그는 한국 고전소설 번역판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으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키워갔다. 그래도 대학은 불교 관련 학과로 진학할 계획이었다. 당시 많은 소련 청년들이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도 그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대(구 레닌그라드대) 인도학과나 티베트학과는 경쟁률이 15 대 1인 데다 “뇌물 안 주면 입학이 안된다”는 소문까지 돌아 경쟁률 5 대 1인 조선학과로 방향을 틀었고, 이게 ‘한국인 박노자’를 있게 한 운명의 전환점이 됐다.

그가 대학을 마칠 때쯤 한국과 소련은 외교관계를 맺었고, 반대로 북·소 관계는 악화됐다. 북한과의 학생 교류 프로그램이 하나둘 취소되면서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기로 돼 있던 그의 유학길 또한 서울로 바뀌게 됐다. 1991년 12월 석달간의 고려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조국 소련은 없어지고 신생 러시아가 돼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화된 그곳에서 이문열·황석영의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거나, 여행가이드, 통역 같은 일을 하며 공부를 계속해 96년 모스크바대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로 한국에 와 3년간 일하다 오슬로대에서 동방학부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해 노르웨이로 떠났다. 95년 러시아에 유학온 경남 마산 출신의 백명정씨와 결혼해 8살 된 아들(율희)이 있으며 곧 둘째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고생하는데 혼자 편안한 노르웨이에 살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그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인세 전액을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아시아의 친구들’에 기부하고 있다.

◇ 이력

△19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극동사학과(조선사전공) 졸업 △모스크바대 박사 △경희대 전임강사 △노르웨이 오슬로대 인문학부 동방언어 및 문화연구학과 교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하얀 가면의 제국>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박노자의 만감일기>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거꾸로 보는 고대사>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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