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낮엔 유치장 속 아버지에 도시락 심부름 밤엔 격납고 수리 같은 노역을 했지

2012.07.20 21:26 입력 2012.07.20 21:30 수정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선생님의 산문을 처음 접한 게 언제였을까요? 고교 시절 <이중섭 평전>을 읽을 때는 서술자의 눈빛을 몰랐어요. 나중에 <1950년대>를 보면서야 ‘한 정신’을 체험한 느낌인데, 아마 ‘추억을 싫어하지만 6·25를 시대의 근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에, 또 비극을 인지하는 능력과 예술적 감수성을 동일시하는 태도에 꽤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머잖아 저도 6·25를, 자아가 달팽이라면 그 껍질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 중요한 사태의 배경설명을 아직 끝내지 않으신 거지요?

고은=6·25 전야(前夜)에 대한 정세는 간단하게 넘어갈 것이 아니네만 그것을 상황심리로 요약한다면, 중국 모택동 주석의 인민군이 1949년 1월 북경에 무혈입성한 뒤 불과 3개월 미만으로 200만 대군이 양자강을 건너고 5월에는 상해를 접수해버릴 때 미국 군부는 당황했어. 북한 신정권은 바로 그 중공 승전을 모방하는 전투의지에 스스로 설레게 되었지. 더구나 중국의 천하통일 직후 중공군 조선계 병력 3만 명이 북한에 들어왔으니 사기가 뜨거워질 수밖에. 미 극동군 총사령부의 북한 첩보활동이 본격화되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인데 맥아더는 한반도 이남의 군정 철수와 동시에 한반도의 새 작전을 북한의 도발 가능성 위에 남몰래 짜고 있었는지도 몰라.

김형수=맥아더라는 이름은 귀에 닿을 때 묘한 마찰을 일으킵니다. 최초로 안 외국인 이름이어선지, 인천에서 일할 때 그 동상을 애용해선지, 남정현 선생의 소설 <분지> 탓인지 알 수 없어요. 누구의 비석을 세우거나 없애는 일을 싫어하는 편이라 동상을 철거한다 할 때도 무심했는데, 6·25의 음모설, 기획설 앞에서는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찌 노근리를 알 것이며 정태춘의 ‘서해에서’를 듣고 설레겠습니까만 그래도 수없이 묻게 됩니다. 당신에게 한국은 무엇인가? 군인에게 세계는 작전의 대상일 뿐인가?

고은=사실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습격으로 시작된 미·일 전쟁도 그 당시 미국 국내 반전분위기를 역전시킬 전쟁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루스벨트 정권의 고도의 음모 유인으로 파악하는 실례가 있더군.

김형수=지상의 역사는 참 교활합니다. 음모도 하나의 역사 행위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히 오물을 남깁니다. 그래서 인문학을 역사의 청소부라 해야 하는지….

그림 | 임옥상 화백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최근에야 발금 해제된 찰스 레어드의 유저(遺著)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개막>이 나왔지. 일본어판으로는 <루스벨트의 책임>이더군. 이 중후한 책 서문이 손자인 하버드대 명예교수 벅스의 회상으로 쓰여진 사실로도 그 책은 1948년 예일대 출판부에서 나오자마자 발매금지 처분이 내려진 이래 어제 오늘에야 세상에 알려지는 불운이 밝혀지지. 그 당시 미국 정부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보수층의 시민 불매 운동도 일어났어. 저자는 1930년대 세계 역사학계의 제1인자였어. 미국 역사학회, 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한 콜럼비아대 교수인데,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 참전논란 문제가 있던 당시 총장의 고립주의 노선에 반기를 들고 교수직을 내던진 반골이기도 하지.

김형수=어디에나 문제적 인간이 있어요. 정직하게 세계를 만나는 일은 그래서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서 의미를 얻는다고 봅니다.

고은=레어드가 방대한 미국 외교문서 등을 바탕으로 밝혀낸 바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전쟁반대를 무효화시키면서 대서양 문제 이상으로 중요한 태평양에서의 패권을 강화할 구실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네. 이미 미국은 대서양에서 독일 잠수함과 충돌했는데 그때 루스벨트는 독일이 먼저 발포했다고 말했으나 진짜는 미국 함정이 선제공격을 한 것이지. 거기서 미국 군함이 침몰 당했는데도 미국 여론은 주전론이 점화되지 않았어. 때마침 미·일관계가 긴장상태로 되는데 일본의 동남아 상륙이 안하무인격이었고 미국은 그런 일본더러 중국과 동남아 야망을 빨리 끝내라고 강요했어. 거기에 일본의 석유항로에의 협박도 일본으로서는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지. 이미 미 국무성은 태평양의 몇몇 지역에서 일본의 일제공격을 예상하는 각서도 남긴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더군.

김형수=일본인들이 미워해도 되겠어요. 정경모 선생은 미국이 히틀러가 자살한 후에도 단지 미·소 냉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고 말합니다.

고은=본래 루스벨트는 대서양 쪽에 관심이 더 많았으나 현실은 그를 태평양 쪽으로 돌리게 했던 것이지. 결국 일본을 유도함으로써 ‘미국을 기습공격하게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 정부 수뇌부의 인식으로 나아감으로써 진주만 사태 직후 루스벨트가 ‘굴욕의 날’이라는 전쟁선언의 비장한 웅변으로 국론을 이끌어내지. 베어드의 반골은 이에 앞서서도 미국 헌법론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헌법제정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헌법에 반영하고 있다는 학설에서도 수난을 무릅쓴 바 있더군.

김형수=선생님의 많은 시들 중에서 ‘고은 서시’쯤 되는 작품이 ‘오자노래’인데, 베어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계속 그 생각이 났어요. 베어드는 ‘오자’ 같아요. ‘오자’란 잘못 들어간 글자를 지목하지만 어떤 체계나 질서가 절대적 관념으로 우상화되는 걸 방해합니다.

고은=바로 이 일본의 선제기습의 유인 사실이 천부당만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그 5년간의 태평양전쟁 승전으로 인한 미국시대를 한 번 더 확대 재생산하게 될 한국전쟁의 기원설에도 북침설의 허상 못지않게 단독 남침설의 일방성도 파악되어야겠어. 그래서 한국전쟁 100년의 절반 이상을 넘어선 오늘날 냉철한 기억의 재생이 더욱 필요하겠어.

김형수=중요한 숙제입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발발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어디입니까?

고은=6·25가 났을 때 가장 기뻐한 타자는 패전국 일본이었어. 맥아더는 전후 일본의 자유 분위기를 금지체제로 전환시키면서 전후 공산당 등을 즉각 불법화하고 미·일 안보체제로 대륙의 소련과 중국 공산당 정권에 대응할 냉전 및 열전의 발판을 일본 사회에 각인시키지. 이때다 하고 6·25가 난 것이지.

김형수=그리하여 결국 20세기 냉전시대의 최전방이 되고 말았군요? 군대 시절에 휴전선 근무를 할 때 늘 후방을 위해 고생한다고 푸념하곤 했는데….

고은=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체제는 일본 국민 스스로가 민주화를 통한 투쟁이나 희생으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맥아더 사령부가 만들어준 것 아닌가. 일본의 평화헌법도 일본 스스로의 작품이 아니라 미국이 만들어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렇다 해서 오늘의 그 헌법정신의 위대성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네. 어떤 정치는 동기보다 과정에서 한층 더 빛나는 것 아닌가.

김형수=그러게요. 일본에서도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가 나오는 게 위안이 되긴 합니다만.

고은=6·25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본에게 패전국가의 의기소침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그런 기적 같은 희소식이었어. 그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는 6·25 사변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무릎을 치면서 외쳐댔어. “이거야말로 천우신조다!” 바로 일본의 전후 소생 및 부흥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特需)와 그 호기로 가능했어. 아니 한반도의 비극이야말로 한반도의 극한적 불행이야말로 그들의 축복이고 그들이 짓밟던 한반도에의 지배욕망을 다시 꿈틀거리게 했지. 그것은 1970년대 한국 경제의 부흥을 자신들의 관서(關西) 경제권으로 망라하는 수작으로 이어지지.

김형수=도덕적 개인이 있다고 해서 온 사회가 부도덕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정경모 선생도 일본이 ‘하늘에서 달러의 소낙비가 내리는 고도성장’을 누렸다고 썼어요. 사실 그런 수혜 때문에 일본은 성찰의 힘이 약해지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유실된 것 같아요.

고은=그 뒤의 베트남전쟁에서도 한국군은 그곳에 가서 전사자를 냈지만 그곳 후방에는 일본제 혼다 오토바이만이 내달림으로써 오늘날 베트남의 도시와 농촌 할 것 없는 오토바이 교통국가의 첫걸음을 이루었지.

김형수=맞습니다. 그 문제로 일본의 NGO활동가들과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베트남전 때 일본의 군납품 공장 앞에서 힘들게 시위하던 선배들의 헌신을 기억하지 못해요. 한국, 베트남 양대 전쟁에서 너무나 부자가 된 때문인가 봐요.

고은=이런 6·25로 말미암아 몇백만의 인명이 바쳐진 한반도 폐허화의 전쟁 3년간의 한 역설은 이 전쟁을 통해서 유엔 참전국 16개국 이상의 국제성이 펼쳐짐으로써 한반도 최초로 실감으로서의 만국기가 휘날렸다는 사실이지 않는가. 그렇게 한국사회의 운명은 세계사의 운명에 참여한 의미가 있지. 그럴 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하여금 세계 각 지역에서 한반도를 세계지도 위에서 찾아보기 시작했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극동 오지에의 무지가 지구상에서 하나하나 걷혀버린 것이네.

김형수=그 때문이었군요. 20세기가 끝날 때 한국의 국가이미지가 캄보디아와 다툰다는 보도에 황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보면 킬링필드보다 6·25가 훨씬 캄캄한데 말입니다.

고은=고대의 서양은 인도와 중동의 우월한 문명을 받아들인 뒤 중국 문명을 하나하나 만남으로써 중국은 그들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고 근세에 이르러서 일본의 아기자기한 문물들도 만남으로써 중국과 일본은 서양을 비롯한 세계 각 지역에 알려지게 되었어. 하지만 한국은 어느 때는 중국의 일부로까지 오해되거나 아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서 더구나 20세기와 함께 일본의 속방이 됨으로써 자기 주체를 표현할 당대의 시간이 몽땅 일본에 흡수되고만 상태였어. 이런 미지의 곳인 한국이 세계대전 직후 또 하나의 속(續) 제2차 세계대전의 강도를 가진 지구상의 대사태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셈이지.

김형수=피카소도 ‘한국전쟁’이라는 그림을 남겼으니까요. 알고 보면 문학이 현실과 조응하는 양상도 조금 소름끼쳐요. 유엔의 개입으로 한국이 세계사의 장소가 되듯이 문학 역시 전후의 데카당스, 실존주의 등을 타고 사르트르와 동시대가 되는 것 아닙니까?

고은=하지만 현실을 안으로 돌려 보자면, 한반도의 남과 북이 식민지 시대의 ‘압박’과 ‘설움’을 다 떨쳐내지도 않는 상태 위에 또 하나의 거대한 비극의 무대를 만들어낸 그 고통은 무척이나 중층적이기도 했어. 7월부터 9월 하순까지의 인공 3개월은 그런 고통을 감지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통제 분위기에 밤낮으로 총동원되었지. 그것도 전시체제라는 극한 현실에서는 어떤 합리적인 현실 인식도 허용되지 않는 상태 아니던가.

김형수=사생아 같은 한국현대사의 어머니가 6·25라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이념과잉, 전시체제, 합리성 불허, 중층적 고통, 이것들은 모두 2012년의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그 대안조차도, 가령 백낙청 선생의 2013년 체제론도 분단체제 안에서의 2013년 체제 아닙니까? 그래서 정확하게는 1953년 체제의 비상구인 셈입니다. 저는 지금 그 원점을 확인하고 싶어요. 선생님의 사적 체험에서 말입니다.

고은=우선 아버지는 종조부가 한민당과 관련된 사실이 숨길 것도 없이 노출됨으로써 내무서에 연행된 뒤 조사를 마치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내무서 분서(分署) 유치장에 구금되고 있었다네. 내가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4㎞를 걸어 다녀야 했어. 그런 뒤 오전이나 오후의 말단 인민위원회나 민청조직에 가서 일정한 인민 교육을 받는 절대의무를 다했고, 밤에는 10㎞쯤의 길을 마을의 남정네 십여 명과 함께 걸어가 바닷가 비행장의 허술한 격납고 수선 작업이나 방공호 파기의 야간노역을 피할 수 없었네.

김형수=격납고 수선이오? 바닷가와 어울리지 않아서요.

고은=군산 비행장이라는 이름의 항공기지로 일제시대 전투기, 그리고 쌍발 폭격기도 있었는데 해방 이래 미 공군이 주둔했던 K-8기지이지. 이 공군기지는 매우 중요한 전략가치를 가지고 수복 후 본격적인 활동을 이어가지. 오키나와 카데나 미 공군 기지와 긴밀한 기지여서 한국전쟁 내내 보잉 B-29 폭격기와 한국전 후기에 투입되기 시작한 제트전투기가 떠오르고 내려오고를 그칠 줄 몰랐지.

김형수=북은 공군력이 아주 취약하지 않았습니까?

고은= 인공 시기는 북의 초라한 전투기 야크기가 한두 차례 내려왔다 돌아간 뒤 늘 텅 빈 비행장이었어. 인민군 한 소대 규모가 지키고 있었고 그 밑으로 비행장 부근의 마을 장정들 약간 명이 관리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 비행장 주둔 소대의 인민군 가운데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인 미성년 소년병도 있었어. 평남 맹산군 산골 아이인데 순박하기가 이를 데 없었어. 따발총도 버거울 정도였지.

김형수=전쟁은 찢긴 옷자락처럼 일상의 속살을 드러냅니다. 격동치는 세계에서 순종을 길들이는 대중문화적 소박주의 같은 건 설 자리가 없어요.

고은=그 소년병은 오직 상부의 지시는 무섭게 따르는데 그것 말고는 동네 아이들 가운데서 가장 숫된 아이와 다를 바 없었지. 야간작업 중 쉴 참에 누군가가 담배를 말아 피우다가 그런 소년병에게 제지당했지. 담뱃불은 10㎞ 저쪽까지 보인다며 주의하라는 것이지.

김형수=마음이 아파요. ‘모든 병사는 문학청년이었다!’ 이게 선생님의 문장입니다. 그래서 언제 귀가했습니까?

고은=새벽 4시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김형수=통행금지 시간도 없었네요. 세상이 고장 난 거죠?

고은=말단 인민위원회가 마을 정미소를 징발해서 설치되었는데 정미소의 발동기나 정미 기계들은 덮여 있어서 언제 작동될지 몰랐지. 그런 곳에 김일성과 스탈린 사진이 내걸리고 구호들이 걸려 있었어.

김형수=그래서 정치는 무섭습니다. 김학준이 쓴 <러시아혁명사>의 속표지에 ‘생각이 있는 사람은 정치 밖에 서 있을 수 없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고은=면 인민위원회 간부나 군 인민위원회 관계자가 와서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내일이나 모레면 부산에 인민군이 도착해서 그곳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이승만 역도는 현해탄에 빠져 죽거나 미국 땅으로 줄행랑을 칠 것이라고도 했지. 실제로 사람들은 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믿게 되었어.

김형수=그런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국가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거라고 믿을까요?

고은=마을 사람들은 연령별로 성별로 민청과 부녀동맹 그 밖의 몇 가지 단체 이름에 속해 있어야 했지. 이따금 인민군 사병이 와서 인민위원회 현장을 시찰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점령지대인 남한은 전시 인민군 중심의 군정 대상이었어.

김형수=같은 땅에서 같은 하늘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그래서 생존을 위해 명분이나 가치관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는 야만을 오천만이 경험했어요.

고은=8월쯤 말단 인민위원장 등 몇 사람이 당원 후보로서 군 인민위원회에 출두해서 특수교육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았어. 그러나 내일 모레의 부산해방이라는 큰 소리는 헛소리가 되고, 군산 비행장이나 군산항의 여러 건물들에 미 공군과 서해의 미 해군함정이 쏘아대는 함포사격이 있게 되지.

김형수=영화 <웰컴투 동막골>이 생각나요. 자연으로서의 촌락을 냉전체제의 이념, 애국심 따위가 흉포하게 쓸고 가는 걸 그렸는데 굉장히 잘 되었습니다.

고은=군산 일대의 집중 폭격과 함포 사격은 동해안의 울진 삼척 일대와 함께 인천 상륙작전을 앞둔 일종의 양동작전이었고 기만전술이었지. 그 때문에 군산은 폐허의 장소가 되고 그것이 나의 폐허의식을 낳은 것이네. 전쟁은 전선(戰線)의 씨로 후방의 열매를 맺어주지. 그 열매가 얼마나 길고 긴 비극의 시간을 담고 있는가는 6·25 이후의 긴 시간이 증거하지 않는가.

김형수=전쟁이 이 땅에 무엇을 서술하고 갔는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는 아직 휴전 상태에 있고, 거리에는 이 같은 비극이 항구적으로 내재돼 있는 걸 자신의 존재형식으로 내면화시킨 지도자, 지식인, 예술가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시대를 살고, 우리 시대의 의미를 만들 공동의 정신사에 참여할 의지가 없는 인문학적 금치산자에 가까운 이들이 여전히 전업 정치인을 지망하고 있어요. 6·25의 끝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오자노래(誤字引)

그 중편 속
그 단편 속
그 사 연짜리 서정시 속
반드시 오자(誤字)가 계십니다
하나 또는 둘
또는 셋이나 계시기도 합니다

허나
그 외톨
그 사랑받을 수 없는 외톨

그로 하여금
흐르는 강물의 춤
느닷없이 숨막혀버립니다
어이하리오
하늘 속 들녘
불어가던 바람도 삐끗
어긋나버립니다

오호라 그 외톨이야말로 일찍이 나의 꿈 아니더뇨
돌아보매
어느 시러베아들놈의
오자 한 자도 없는
가야산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오천일백이십 만 자의 판각 십육만 면 그 천년 불행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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