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행가 유성용

2013.06.07 20:34 입력 2013.08.23 21:49 수정
백영옥 | 소설가

사람들이 굳이 올레·둘레길을 택하고 완주에 집착하는 게 희한

사진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사진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 지금 필요한 건 나를 좀 버려두고 걸을 수 있는 공간…
요즘 사람들은 여러 겹의 인생 안전장치 쳐 놓아 다양한 사건 못 만나


정신적인 고통에는 오로지 하나의 해독제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이다. - 카를 마르크스

“제니 필즈는 마흔한 살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으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이었다.” <가아프가 본 세상>에 나오는 존 어빙의 말을 내게 처음 얘기해준 사람은 소설가 C였다. 마흔이 되면 뭐가 달라지냐는 서른 몇 살 후배의 말에 그는 40대야말로 장편을 쓸 수 있는 최고의 나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내게 그것은 쓸쓸한 위로의 말이었다. 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보다, 마흔 살이 앞으로 쓸쓸한 줄 알면서도 살아야 하는 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40대가 아주 절망적이진 않아. 커트 보네것이 그랬지. 남자가 여전히 빳빳하고 섹시할 수 있는 나이가 마흔세 살이라고 말이야.”

‘여행생활자’라 불리는 유성용의 나이가 마흔세 살이라는 걸 알고, 문득 이 얘기가 떠올랐다. EBS <세계테마기행> 속의 그가 면도하지 않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곳에서나 자고, 먹고, 걷는 걸 보며 테스토스테론이 100% 충전된 수컷이 여행의 시간대로 늙어간다면 저런 평온한 모양새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 생활을 하던 3년을 제외하면, 한때는 꽃게 배를 탔고, 한때는 지리산에 들어갔던 돌연한 삶. 그는 10년 가까이 이런저런 곳에 짧은 글을 연재하며 연봉 400만원으로 살아갔다. 그렇게 굽이진 세상의 길들을 직립보행하고 있었다. ‘나는 길 탐식가다. 세상의 모든 길들을 맛보리라’란 말을 남겼던 리버 피닉스가 요절한 나이는 스물셋. 마흔셋 남자는 리버 피닉스가 살았던 삶보다 20년을 더 살았고, 그가 걸었던 길보다 더 많은 길들을 홀로 걸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지루한 일상의 처방전처럼 통용되는 여행에 나는 꽤 회의적이었다. 어느 날 회사를 집어치우고 사표를 내고 해야 할 것이 여행이고,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떠나야 할 것이 여행이며,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효도 또한 여행이라는 게 좀 지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세계의 끝에 와 닿았을 것같이 보이는 이 남자가 여행을 시켜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닌 ‘사랑’인 것 같다고 말할 때 내 귀를 의심했다.

“욕심 많은 인간들이 고백하는 거예요. 관계의 시간을 비용으로 치를 생각이 없으니까 고백으로 시간을 빨리 선점하려는 거죠.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전 그 말이 싫어요. 마치 내가 행복하려면 애인도 있어야 되고 돈도 있어야 되는 것처럼 행복의 구성품같이 있는 사랑 같아요. 사랑하지 않고도, 연애하지 않고도 별 문제 없어요.”

■ 내가 세상에 소비될 때, 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

문득 내게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위로를 해준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괜찮아. 우리에겐 앞으로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것이 소설 공모에 ‘또’ 떨어진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위로란 게 놀라웠다. 죽음 뒤에 희망이란 단어를 갖다붙이는 결벽이나, ‘사랑받을 권리’ 대신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그 얼굴이 너무 순해 보여서였다. 그런데 유성용의 책에서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란 유서 같은 말을 발견했다. 그 말을 누가 처음 한 것이든, 두 사람이 너무 달라 아찔했다.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싫어 개나 고양이 대신 상추·고추 같은 식물만 키우는 남자와, ‘오해가 내 내용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시골 할매든 도시 아가씨든 금세 친해질 것 같은 남자가 ‘앞으로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란 말로 한 궤에 꿰어졌다. 그런 사람들이 쓴 여행기라면 그 책에 현지의 여행정보가 가득 담겨 있을 리 없다. 그의 책 <생활여행자>가 너무 외로워 사막에서 뒷걸음질쳐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며 걷는 사내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요즘 사람들이 다양한 사건을 만나기는 쉽지 않죠. 여러 겹의 인생 안전장치를 쳐놓잖아요.

“제가 세상에 소비될 때는 자유로운 여행자 콘셉트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죠. 별점을 봤는데 세상의 귀여운 액세서리란 말이 나오더군요. 쓸쓸한 별점인 거 같아요. 세상은 나를 귀여운 액세서리로 인정해주는데 동시에 소외시키죠. 나쁜 보스가 조직원을 너 잘하는구나 인정하면서 써먹듯이.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한다는 것, 그건 소외의 다른 이름인 것 같아요. 나에 맞게 알아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쓸모에 의해 소비되는 적당한 상품인 거니까.”

‘맹물다방’의 운영자이기도 했던 유성용과 그를 표현하는 다양한 말 속에는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소박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가 놓여 있다. 오지만 다닐 것 같은 그가 실은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꾸미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즐겨하는 얼리어답터고, 막걸리보다 와인을, 센베과자보다 딸기무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철학자는 이런 현상을 자본이 사람을 노동자로 만들어 착취하는 게 아니라, 매혹적인 상품이 되라고 부추긴다는 말로 표현했다. ‘가면이 곧 얼굴이다’란 말을 그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세상이 자신을 ‘여행가’로 규정하는 것에 수긍한 듯했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시간이 사람을 느리게 변화시키는 데 비해, 공간은 사람을 빠르고 즉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같단 말을 꺼냈다.

“시간 속에서 진지해진다는 건 자기 안에 갇히는 형국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끊임없이 반추하고, 되새겨보고, 자기가 답을 모르면 모르는데도 자문자답을 하잖아요. 자기가 답을 모르면 자기 바깥에서 답을 구해야 할 텐데 말이죠. 한국 사람들은 믿을 게 자기밖에 없잖아요. 자기가 자기를 견디고 지키면서 자문자답 속에 갇혀서 지내는데 그 시간이 너무 없어도 문제겠지만 너무 많다는 거죠. 요즘 사람들이 사건을 만나기는 쉽지 않죠.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쳐놓잖아요. 각종 보험, 소셜 포지션, 하나가 무너지면 두 번째가 막아야 되고, 아파트값이 떨어지면 주식으로라도 막아야 되고, 어떻게든 안전장치가 있잖아요. 사실 사건을 만날 수 없도록 철저히 노력해요. 불안하고 보호본능이 과하게 인플레이션된 것 같아요.”

그는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오랫동안 교육받지만, 정작 그것들만으로 만날 수 없는 세상의 풍경들이 있다는 건 배울 기회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대로 다 각별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전형적 패턴 속에 있어요. 친한 후배가 커피집을 하는데 오는 손님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한대요. ‘커피가 맛있네요. 제가 이태리 여행 때 마신 커피하고 너무 비슷해요.’ 다들 인정투쟁을 하듯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들이 가득하죠. 그래서 대화하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되는구나란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여행 작가들 프로필을 보면 이런 식이잖아요. 광고회사 몇 년 다니다가 멋지게 때려치우고 자유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전 그게 거만한 소리인 것 같아요. 여행마저도 자기 선택과 의지로 하려 한다는 거죠. 지리산에 와서도 풍류만 빨리 배우고 너무 도시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배경만 지리산인 거죠. 그런 사람들이 여행을 가면 그냥 나인 채로 배경만 여행지인 거죠. 전 제가 너무 답답하거든요. 정말 바깥으로 너무 나가보고 싶은 거죠. 여행을 해도 사람들이 너무 자기답게 해요. 여행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좋은 기회잖아요. 아주 소심한 사람이 연극적으로 대범하게 행동해 볼 수도 있고요. 모든 곳에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생활에서는 나답지 않게 다르게 살아보려 해도 그게 쉽지가 않잖아요. 사람들이 책을 내밀면 이렇게 쓰곤 했어요. 나를 줄이면 당신의 환한 바깥.”

■ 세속적으로 행복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예전에는 담담한 척하는 제스처를 아는 인간이었다면, 이제는 좀 담담한 인간이 된 것 같아요.

나는 ‘여행을 생활처럼, 생활을 여행처럼’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세상 것 다 가지고 있는 문화권력들이 참 쉽게 할 수 있는 말 같아요. 감히 생활하지 못하고 여행 쪽을 보는 거고, 감히 여행하지 못하고 생활 쪽을 보는 거고. 여행할 때 허방한 내 삶의 구석에 죄의식을 느끼니까 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거고, 생활할 때는 내 삶의 너머를 생각하니까 생활여행을 얘기하는 거고요. 히말라야가 왜 아름다운지 가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사람이 살 수 없고, 생활이 없어요. 그러니까 경이롭고 신적인 느낌을 받는 거예요. 하지만 히말라야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기서 산다면 아름답다고 느끼진 않을 거예요. 히말라야에 지친 사람들은 생활에 내려올 수 있어야 하고,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히말라야에 오를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통로가 넓게 열려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 것 같아요. 너무 명확한 금기로 구획되어 있는 게 싫어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게 왜 직업이 될 수 없냐고 하는 장정일은 이제 악이니까.”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생활을 여행처럼, 여행을 생활처럼’이란 말이 익숙한 곳이지만 낯선 곳을 여행하듯 호기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고, 낯선 곳이지만 익숙한 곳을 산책하듯 두려워 말고 경험하란 얘기가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글쎄요. 전 그게 아주 자본주의적인 모습인 거 같아요. 남들에게 불편한 밥이 되려는 게 아니라 최대한 먹기 편한 밥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 같아서 불편해요. 물론 좋은 의도와 선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조차 악도 선도 아닌 에너지 덩어리일 뿐인데, 아이들에게 읽히는 동화조차도 완전히 실용적이잖아요. 안데르센 동화 같은 건 세상적이지 않다는 거죠. 어찌 보면 그게 균형감 있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어요. 인간적인 것 너머의 것이 아주 많잖아요. 공원을 만드는 것도 자연조차 인간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나서서 벌이는 일 같아요. 자기 존재감은 과대 포장되어 있고, 인간적인 것이 아닌 것은 죄가 되고. 안데르센 동화와 실용동화의 차이 정도가 내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불편함인 거 같아요. 선의를 의심하진 않지만 선의가 전부는 아니라는 거죠.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긍정성과 희망이 아니라, 그늘져 있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자기를 좀 버려두고 줄이고 걸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심지어 여행 가서 길도 올레길 둘레길을 걸어야 하고, 완주까지 해야 한다는 게 희한해요.”

백화점 1층에서 인공적인 화장품 냄새에 매혹을 느끼는 나 같은 도시 여자는 세상과 불화하는 이 남자에게 작업실 앞 호수공원의 잘 정돈된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을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가 앉으면 의자, 쓰면 책상이 되듯 마구 굴러다니고 싶어 ‘맹물’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말할 때, 그 맹물이 ‘물’이 아니라 ‘물건’이라는 걸 알고 당황스러웠다.

“책이라는 게 한 번 써내면 다시 안볼뿐더러, 그 시절을 마감할 수 있어서 좋은 거 같아요. 제게 그 시절은 이제 보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물건이 되는 것 같아 좋고요. 과거에는 반추 전문가였어요. 예전에는 담담한 척하는 제스처를 아는 담담하지 않은 인간이었다면, 이제는 좀 담담한 인간이 된 것 같아요. 지금 모습이 좋긴 해요. 예전에 비해서.”

나이가 드니 살아가는 게 좀 느슨해지고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사는데 내 가족들은 세속적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고 하는 이중적인 잣대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요. 세속적으로 행복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언젠간 끝나니까 최대한 시간을 잘 깊게 누리는 거. 고통이 오면 밀어내려 하지 말고 행복이 오면 받아들이고 다 좋은 체험이니까, 처음 만나 인터뷰하느라 느끼는 이 어색함도 좋은 체험이고요.”

사랑이 적극적인 방식의 소통이라고 하는데, 억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제게 사랑이란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거든요.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많이 받은 남자에게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냉소일 것이다. 성욕 없는 평온한 삶을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 한 영화감독의 얘기는 섹스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말과 묘하게 겹쳐졌다. <여행생활자> <생활여행자> <다방기행문>처럼 딱 다섯 글자로 된 책만 쓰던 그가 쓴 가장 긴 제목의 책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사랑>이다. 그의 책 <여행생활자>가 소리 없이 많이 팔렸다면, 그건 길 위를 걸으며 풍기는 어쩔 수 없는 그리운 사랑의 냄새 때문이라는 생각을 나는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잊기 위해 첫 여행을 떠난 거였어요. 그때 내가 몽중몽이라는 말을 떠올렸어요. 내 여행이 꿈속의 꿈 같았거든요. 고작 3, 4일짜리 레저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렇게 될 거예요. 나와 다른 사람들, 생활들을 보면서 돌아보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현실은 현실이지만 이중의 현실이기 때문에 아득한 거죠. 우리는 우리 현실이 아득하진 않잖아요. 뭔가 애틋하고 그리운 사람이 있긴 한데, 막상 보고 싶진 않아요. 그걸 간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 만나서 그 변한 시간을 회복하려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하고 잘 만났을 텐데, 사랑 때문에 100을 가진 그 사람의 10도 못 본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보통 사랑이 적극적인 방식의 소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전 합법적인 쌍방 스토킹 같단 생각도 들고. 왜냐하면 제겐 사랑이 자유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 저리 가고 싶다면 당연히 저리 가게 해야 되는 거죠.”

영화 <클로저(closer)>에서 사랑하는 주인공들 사이의 거리를 재다가 친밀함을 뜻하는 closer가 ‘문 닫는 자’라는 말을 기어이 찾아내고, 순정이란 연약한 마음이 아니라 제 속의 이유로 그 사람을 독점하려는 닫힌 욕망의 체계이며, 사랑과 상처 사이에 기생하며 꿈틀대는 증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그에게 연봉 400만원으로 사는 일에 대해 묻는다면, ‘가난하게 산다는 건 신세진 일이 없어도 끊임없이 충고를 들으며 살아야 하는 일’이란 말이 날아올 것이다.

“예전에는 버는 돈이 얼마 안되다 보니 돈 쓰는 걸 아끼지 않았어요. 담배나 사고, 기름이나 넣고, 있는 만큼, 되는 대로 썼어요. 근데 돈을 버니까 돈을 아껴 써야 되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몇 만원짜리 밥을 친구들이랑 먹으면서도 굉장히 아끼게 돼요. 오히려 고정수입이 생길수록 돈에 대해 꼼꼼해지고 더 집중하게 되죠. 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았는데, 불편해도 참아야 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EBS <테마기행>을 하다가 최근 <6시 내고향>을 진행하거든요.”

■ 여행자의 시선 담는 ‘6시 내고향’ 방송진행 재밌어요

나는 <6시 내고향>이 맞느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6시 내고향>은 한국의 독특한 장르영화 같아요. 묻는 스타일, 대답하는 스타일이 구축된 거죠. 찍는 방식도 너무 다르고, 뭐가 옳고 그르다보다 낯설어요. 그리고 견주어보게 되는 거예요. 여행자의 시선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요. 바깥에 있다가 돌아왔잖아요. 이게 내가 사는 유일한 공간인데 마치 두 군데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 전 그게 재밌어요.”

돈에 대한 얘길 묻다가 알게 된 이 남자의 놀라운 반전 뒤에는 <6시 내고향>이 있었다. 나는 그의 눈가에 난 주름 몇 개를 바라보았다. 유성용의 책에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비문법이 있다. ‘바닷바람에 불리우면서’ 나는 왠지 이 구절이 각별하다. 세상 사는 일 중에, 기다리거나 의도하거나 나서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그 구절에 다 있는 듯 들린다”란 말이 있다. 아마도 그에게 전국 고향을 돌아다니며 여행 리포터로 참가하는 그 방송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시인 유하는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헤비메탈을 부르다 뽕짝으로 창법 바꿔 부르는 그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제 뽕짝을 부르는 누군가의 얼굴에서 역설적이게도 삶이라는 진짜 시를 읽는다. 지구에서 담배 피우기 가장 좋다는 서울성곽 아래 그의 집 앞마당을 바라봤다. 새삼스레,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 한 대가 피고 싶어졌다. “인터뷰는 그냥 지어서 써주세요. 소설처럼. 어차피 다 날 오해할 텐데”라고 말하며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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