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천상의 분류법’과 구글의 페이지랭크 그리고 인간의 종말

2014.04.25 18:32 입력 2014.04.25 22:30 수정
백욱인 |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진짜 나, 검색된 나

보르헤스는 1942년에 발표한 짧은 소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에서 중국의 한 백과사전인 <은혜로운 지식의 하늘 창고(celestial emporium of benevolent knowledge)>에 나오는 인간 분류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인간(동물)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황제(구글)에 예속된 인간, ⓑ박제된(구글링된) 인간,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훈련된 인간, ⓓ돼지, ⓔ인어, ⓕ전설의 인간, ⓖ떠돌이 노숙자, ⓗ이 분류에 포함되는 인간, ⓘ미친 듯이 날뛰는 인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 ⓚ섬세한 낙타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인간, ⓛ기타, ⓜ방금 핸드폰을 깬 인간, ⓝ멀리서 보면 파리로 보이는 인간. 푸코는 종횡을 가로지르는 이런 분류가 매우 경이롭다고 보았다. 중국 백과사전의 분류는 말과 사물의 재현관계를 뒤집어버린다. 분류의 척도가 뒤죽박죽이면 사물을 나누거나 분류하여 배치할 수 없다. 은혜로운 지식을 담고 있는 하늘의 창고인 중국 백과사전은 열네 개의 다른 척도로 이용하여 인간을 분류하였다. 이것은 균질함의 단일 척도를 허용하지 않는 14차원 분류법이다. 이런 방식을 이용하면 인간은 질서 있게 분류되지 않는 대신에 과거와 다르게 사유될 수 있다. 오늘은 보르헤스의 지식을 빌려 인터넷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분류되고 개체화되고 필터링되는지 살펴보자.

1. 인터넷 세상의 분류법

세상을 분류하는 행위치고 ‘임의 전횡’이 아닌 게 없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세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알지는 못하지만 무엇을 하려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인간의 속성이다. 움직이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임의적이지만 자신의 체계를 확립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보르헤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인간이 ‘사물의 체계’를 확립하려는 이유는 좀 더 효율적으로 자신을 위한 사물의 배치를 만들려는 데 있다. 자연사에서 출발하여 자연과학의 성과를 이룬 인간은 생명체와 인간과학으로 개입의 폭을 넓혔다.

사물의 체계를 완성한 인간은 이제 ‘인간의 체계’를 세웠다. 정치학과 역사학을 거쳐 정치경제학을 만들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인공물에 관한 정보가 디지털로 전환, 인터넷 세상에 집적되기 시작하자 인간은 이제 ‘정보의 체계’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구글은 페이지랭크를 통해 인터넷에 존재하는 웹페이지들의 체계를 만들었다. 웹페이지는 인터넷 세상을 구성하는 사물이고 검색 결과는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체계이다. 래리 페이지는 웹페이지의 질서를 부여한 인터넷 세상의 린네이다. 그는 웹페이지에 자신의 이름 페이지를 넣은 ‘페이지랭크’를 통해 서열(랭크)과 질서를 부여하였다. 페이지랭크는 서로 연결된 주고받음의 링크로 서열화되어 있다. 린네는 <자연의 체계>에서 이명법을 이용하여 세상만물을 동물 4400종, 식물 7700종으로 분류하였다. 구글의 분류는 린네분류학의 종점인 종에서 출발한다. 구글은 인간의 검색어를 분석하여 인간을 세세하게 재분류한다. 그리고 웹페이지를 주고받는 링크들에 따라 배열한다. 말과 사물은 동일 공간에서 재현되고 일치되는 방식을 더 이상 택하지 않는다. 검색어(말)를 포함한 웹 문서는 말과 말의 배열을 배열한다. 사물과 말의 일치는 애당초 사라졌고 검색어를 포함한 문서와의 일치만 존재한다. 말과 문서의 일치가 쉽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디지털 기호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재현을 거부하는 사물을 기호(말)로 바꾸고 그것을 다시 디지털로 전환하면 사물과 말은 쉽게 일치될 수 있다.

사물과 말의 일치를 완성한 검색 왕국은 이제 그것을 이용하여 인간의 체계를 다시 짜려는 거대한 기획에 착수하였다. 사물과 인간과 정보를 하나의 축으로 꿰면 정보를 통해 인간을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질서 체제 속에 편입할 수 있다. 사물과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추출된 정보가 그 일을 해낸다. 이제 사물과 인간 활동에서 추출된 정보가 인간과 사물을 배치하고 분류하고 기획하고 조종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존재의 명칭 속에 그 존재의 운명과 과거와 미래가 포함된 그런 언어를 고안해 낸다는 게 이론적으로 보자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보르헤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구글의 ‘페이지랭크’(PageRank)와 페이스북의 ‘엣지랭크’(EdgeRank)는 그런 언어로 쓰여진 알고리즘들이다.

당신은 하루 몇개나 구글이나 네이버를 통해 검색하는가?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하루에 디지털 쿠키를 몇 개나 먹는가? 당신은 당신에 관한 정보 부스러기를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얼마나 남기는가? 감정과 분노와 편가름과 욕을 몇 개나 쏟아 내었는가? “아무도 우리가 개인 줄 모른다”며 마음껏 인터넷 세상을 검색하며 돌아다니던 개들은 더 이상 익명의 개들로 숨어 있을 수 없다. 이제 그들이 어떤 사료를 먹는지, 어떤 상황에서 짖는지, 꼬리는 언제 내리는지, 그래서 그들의 종자가 무엇인지 다 드러난다. “너 꼴통 똥개지? 넌 수입산 푸들, 넌 토종 황구…….” 인터넷의 자동 개 분류 기계들은 당신이 어떤 종자인지 알아내는 수준을 넘어 당신에게 알맞은 사료까지 미리 골라주신다.

[뒤집어 보는 인터넷세상](15) ‘천상의 분류법’과 구글의 페이지랭크 그리고 인간의 종말

2. 개별화되는 이용자와 프라이버시

“알레프의 직경은 2~3㎝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있었다. 나는 내 어두운 피가 순환하는 것을 보았고, 사랑의 톱니바퀴와 죽음으로 인한 변화 과정을 보았으며, 모든 지점에서 알레프를 보았고, 알레프 안에서 지구와 또다시 지구 안에 있는 알레프와 알레프 안에 있는 지구를 보았으며, 내 얼굴과 내장을 보았고, 현기증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보르헤스, <알레프>) 인터넷 세상은 알레프를 닮았다. 거기에는 내 얼굴과 뇌수와 사랑과 죽음이 담겨있다. 구글은 알레프처럼 모든 것을 저장한다. 내가 검색창에 친 단어와 그것을 친 컴퓨터의 아이피 어드레스, 입력 시간, 이제까지 축적된 나의 검색어들이 구글의 빅데이터에 저장되어 있다. 구글은 필요할 때 저장된 기억들을 꺼내 나라는 개체를 세세하게 재구성한다. 아마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가 검색한 책 이름과 구입한 책을 일일이 저장하면서 나를 그들의 장부책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은 들판의 풀잎과 숲속 나뭇잎의 세세한 무늬와 모양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던 푸네스를 연상시킨다. 내가 알던 푸네스는 꿈과 비몽사몽간의 지난 일들을 아주 세세한 것까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의 지각력과 기억력은 너무 완벽하여 어제 일어난 모든 일을 오늘 하루에 걸쳐 똑같이 복원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정원 포도나무 잎사귀들과 가지들과 포도알의 수를 지각할 수 있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기억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어느 여름날 밤 그의 방을 찾아간 내게 말했다. “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 세계가 생긴 이래 모든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기억보다 많을 거예요. … 그런데 내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 같아요.”(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마치 구글의 빅데이터가 하는 말 같지 않은가?

구글은 개별화 서비스를 통한 이용자의 행동 결정에 개입한다. 광고를 최적화하기 위한 알고리즘이 우리의 생각과 생활을 미리 결정한다. 당신의 결정은 과거 행동의 결과가 집적된 데이터를 활용하는 서비스 알고리즘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 당신은 그것을 따를지 아니면 거부할지 선택해야 한다. 계속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한 당신은 그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당신을 믿는 수밖에 없다. 당신은 구글이 제시하는 당신에게 사기당한다. 빅데이터에서 만들어져 제공되는 당신의 습관은 통계로 이루어진 당신을 당신에게 강요한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꼭 들어맞는 세계는 과연 좋은 것인가? 당신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신세계는 실세계가 아니다. 우리를 매혹했던 열린 인터넷은 어느새 닫힌 인터넷으로 변화하여 우리를 자신의 좁은 개별화된 틀에 가두어 놓고 있다. 온라인 광고와 검색이 서로 결합되고, 페이스북에 올린 이야기가 광고의 링크거리가 되고, 트위터에서 만나는 인간이 당신과 같은 정치 성향의 족속들뿐이고, 그것이 여론이라 믿고 서로 팔로하고 팔로잉하며 서로 핥아주면서 세상은 우리 것이라 난리들을 치게 되었다.

모든 기술은 인터페이스를 가진다. 그곳에서 당신은 끝나고 기술이 시작된다. 필터링 서비스는 당신의 일상생활에서 출발한다. 당신이 어떤 서비스를 쓰지 않는 한 당신을 향한 개별화된 서비스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구글 검색을 하지 않는데 당신의 특성에 맞춘 검색 서비스가 주어질 리 없고, 아마존에서 책을 사거나 검색하지 않았는데 ‘당신이라면 구입해야 할 책’ 추천이 들어올 리 없다. 인터넷 시대의 푸네스인 구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제 무엇을 했고 오늘 무엇을 하고 있고 내일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 당신에게 안성맞춤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광고를 전달해야 할지에 대해 광고주에게 당신을 건네준다.”

백설공주 시대에 거울이 있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그 거울은 당당하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당신이 아니라 백설공주”라고.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거울은 그리 말해주지 않는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항상 “당신이 제일 예쁘다”고 말한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똑똑하고 현명하고 섹시하다. 개별화된 인터넷 서비스는 모두 당신이 최고라고 치켜세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그 거울 속에서 최고로 멋진 자신과 만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인터넷 거울 속에서 최고다. 분명 이상한 나라다. 사람들은 납작해진 빈대떡처럼 생각의 깊이가 얕아지고, 화덕 위의 반죽모양 평편해지면서 뜨뜻하게 달아오르는 온기에 느긋하게 정신 줄을 놓는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당신이 누구인 줄 알지만 당신은 그들이 당신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 사각 파전으로 지지는지, 오각의 팬케이크로 굽는지, 두께 0.1㎜짜리 납작한 빈대떡으로 부치는지, 덩어리로 그냥 굽는지, 당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당신에 대한 당신의 통제권을 빼앗아간다. 당신 스스로 인터넷 세상을 만든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들이 보여주는 대로 그들이 추천하는 대로 그렇게 당신의 인터넷 세상은 다시 구성된다. 당신이 인터넷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을 만든다. 마치 내가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말하는 것처럼. 구글에서 당신이 스스로 무엇을 찾고 검색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은 구글에서 검색되고 찾아지고 있는 것이다.

온갖 세세한 것들을 일일이 머릿속에 집어넣는 푸네스는 기억하지만 사고할 수 없었다. 나는 푸네스와 마찬가지로 기억의 빅데이터이자 빅브레인인 구글은 사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제쳐 두면서 일반화하고 개념화하는 작업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기억의 세계에는 단지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만 존재한다.”(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그래서 빅데이터와 빅브레인은 사고할 수 없다. 그것은 기억의 기계일 뿐이다. 사고가 없는 기억은 인간을 개별화하고 파편화한다.

3. 이곳에서 빠져 나가라

당신은 인터넷 세상의 개별화된 맞춤 언론이 새롭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짜 이슈와 오락과 게임이 정말 중요한 일들을 가리고 있지 않는가?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라오고 있는 신문사의 피딩과 친구들의 추천이 정말 의미 있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나? 네이버 가판대의 신문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제어를 보라. 그것이 세상을 보여주는가? 페이스북 담벼락을 보다가 친구가 링크해 추천해 놓은 링크를 따라 신문사 기사로 찾아간다. 그나마 볼만한 기사 사이사이로 온갖 똥파리들이 날아다닌다. 움직이는 똥파리떼를 용케 피하면 여기저기 박혀 있는 똥통들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꼬드긴다. 그것을 또 용케 비켜 나가면 어제 온라인 상점에서 검색했던 물건이 어떻게 알고 나타나서 기사를 아래로 스크롤할 때마다 쫓아 내려오면서 이걸 아직 구입하지 않았느냐고 보챈다. 이게 무슨 언론이고 신문이냐? 이런 디지털 똥파리 천국의 똥통 광고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언론이라면 이런 쓰레기 똥파리와 똥통 광고부터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 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는 아주 거만하게 말한다. “여러분은 단 하나의 정체성을 가집니다. 우리 페이스북을 통해서 말이지요. 우리가 당신을 하나로 만들어 줄 겁니다.” 누가 네게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달라고 했는가? 이용자는 데이터 뭉치에서 만들어지는 프로파일링 개별화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고정된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습관과 타성이 맥락이나 상황을 떠나 그 관성을 보여줄지라도 다른 배경과 맥락에 놓여있는 나는 같은 나가 아닌 것이다. 당신은 솔직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항상 하나의 정체성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는가? 초지일관하고 절대 변절불가한 인간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프라이버시는 필요없다. 그러나 당신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당신이 당신을 드러내고 구성한다. 당신은 그것을 구분하고 분리하며 관리하고 유지하고 배치를 바꾸어야만 한다. 이것이 프라이버시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프로파일링이나 개별화로 만들어버릴 때 당신의 프라이버시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글과 페이스북이 제공하는 개별화된 정체성은 당신이 아니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는 투명한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닌 것이다. 자기 관리와 연기로 만들어진 자아는 페이스북의 프로파일링에나 적합한 것이다. 그것은 ‘I’와 ‘me’를 구분하지 못하고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며 아버지인 나와 자식인 나를 통합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러한 개별화에 매몰될 때, 그때가 인간의 얼굴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종말의 시대일 것이다.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에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만약 그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지기에 이른다면,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이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하다고만 예감할 수 있을 뿐이고 지금으로서는 형태가 무엇일지라도,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푸코, <말과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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