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에필로그 - 人터넷 세상을 위하여!

2014.06.13 21:02 입력 2014.06.13 22:36 수정
백욱인 |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아, 그러면 나는 눈물 나리라.
한줄기 냇가를 거슬러 오르는 잔 고기떼도 만나고
그저 뜨는 마른 풀 잎새도 만나리라.
아, 그러면 나는 눈물 나리라.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도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오늘도 젖은 짚단을 태우고
저물 수도 없는 강에
흙도 묻지 않은
삽을 씻는다.

(고은의 ‘눈물’,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합성 변형)

<b>오래된 친구와의 한잔 같은… 시린 마음 녹이는 국밥 같은…</b> 1977년 초하. 영동 신사동 집 앞 사천 중국요리집 이층에서 스무살 두 친구가 빼갈 한 도쿠리를 나눈다. 서른세살이 되면 후지산 분화구에 뛰어들어 죽자고 다짐한다. 그런데 오늘도 살아 국밥을 먹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삶아, 존재야!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안녕, 내 사랑, 잘 가세. 사요나라, 마이 러브! | 백욱인 제공

오래된 친구와의 한잔 같은… 시린 마음 녹이는 국밥 같은… 1977년 초하. 영동 신사동 집 앞 사천 중국요리집 이층에서 스무살 두 친구가 빼갈 한 도쿠리를 나눈다. 서른세살이 되면 후지산 분화구에 뛰어들어 죽자고 다짐한다. 그런데 오늘도 살아 국밥을 먹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삶아, 존재야!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안녕, 내 사랑, 잘 가세. 사요나라, 마이 러브! | 백욱인 제공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감각으로 현실을 지각하고 자기화한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현실을 재생산하는 감각 자체가 사회와 역사의 산물’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인터넷은 그런 감각인가?

“인간의 감각은 ‘자연의 소산’이다. 그러나 감각이 지각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정서와 감정, 의식,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감각은 ‘인공의 소산’으로 변화한다. 미디어와 기술은 인간의 감각 비율 자체를 변화시킨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현대의 미디어 환경은 ‘인공의 소산’이지만 ‘자연의 소산’만큼 선천적인 환경이 되고 있다.”

-인간의 새로운 감각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몸과 기억의 외부화, 혹은 상실, 부재와 의미의 결핍이 우리 감각의 한가운데 있다. 나는 이 시리즈를 쓰면서 몸과 기억이 사라지거나 외부로 이전되는 ‘감각변혁기’에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고 싶었다. 인터넷과 개인의 일상적 삶을 대조하고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충돌시키려 했다.”

-이 시리즈는 인터넷 일상의 오디세이인가? 그렇다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돌아온 것인가? 여정을 통해 당신과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패러디와 페스티시로 엮어 떠나본 인터넷 오디세이다. 나는 반동의 길을 선택했다. 현실의 반동을 느끼고 싶었고, 그에 대한 나의 반동도 필요했다. 아주 먼 옛날이나 오지 않은 미래와 현재를 충돌시켜 여행을 위한 길을 냈다. 그리고 발걸음의 리듬과 템포를 정했다. 지그재그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중구난방으로 현실을 치받고, 그 반동을 느끼고 싶었다. 현실과 가상을 엮어보고, 오래된 것과 새것을 섞어보기도 하고, 시와 소설과 희곡과 심포지엄과 평론을 반죽했다. 불분명한 일상에서 출발해서 다시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가짜 글쓰기 여행이 늘 그렇듯이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고, 세상도 그렇다. 이후에 여러 면에서 좀 달라지기를 바란다. 세상과 나는 변할 수 있을까?”

-달라진 것이 없다면 당신의 여행은 실패다. 떠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춤만 추지 않았나 묻는 것이다.

“그래. 내가 현재 선 자리에서 말로 춤추며 맴돈 것 맞다. 춤추며 앞으로 간다는 게 간단한 경지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려면 글이 아니라 정말 춤을 추거나 현실에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날 변하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글이기 때문이다. 험한 바다로, 적에게로 나는 한 발짝도 다가서지 않았다. 변변한 출정가 하나 준비하지 않은 상태다. 부끄럽다.”

-인터넷은 정신인가, 상품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사람들은 보통 인터넷을 지식이나 정보와 관련된 것, 글로벌 브레인처럼 뇌와 관련된 것으로 정의한다. 혹은 인터넷을 정보사회의 글로벌 미디어 정도로 설정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터넷은 현대 사회의 신체가 되어버렸다. 인터넷은 뇌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구성된 디지털 ‘레비아탄’의 거대한 신체이다. 그것은 개별 사회 구성원들의 몸을 무력화시키는 거대한 신체다.”

-인터넷이 신체 자체라면 우리는 이미 그것과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인가?

“왜냐하면 인터넷은 스스로 지각하고, 스스로 선별하고, 정보라는 에너지를 흡수하고, 이용자들의 활동 결과물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상품으로 바꾸는 신진대사를 하며, 서로 다른 것을 섞으면서 생식하고, 그 결과 비트와 가치를 증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인간 몸과 기억의 상실이 인터넷의 이러한 가짜 신체 구축과 짝을 이루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몸과 기억을 상실하면 인터넷이 그것으로 자신의 신체를 만든다는 뜻인가?

“그런 셈이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에너지와 그것이 자연 대상을 대하면서 만든 활동의 결과물과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기억과 체험을 인터넷이 거두어 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신체 활동 결과물과 비트가 된 기억과 소외된 에너지로 이루어진 인터넷은 자신의 몸을 키운다.”

-인터넷의 세상은 어떤 구성체인가? 그것의 사회적 인간관계는 자본주의적 관계와 다른가? 무엇이 다른가?

“인터넷 세상은 사회 구성체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세계 이용자의 관심과 정서, 감정과 의지, 욕망과 흥분, 그리고 그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집어삼키면서 구성된다. 그것은 현실세상의 반영인 동시에 현실에서 뽑아온 잉여 에너지의 이전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터넷 세상의 사회관계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다.”

-현실세상의 무엇이 어떻게 변해 인터넷 세상을 만드는가?

“인터넷 세상에서는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의 관계가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대체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터넷 세상에서 자본이 축적되는 형태가 이전의 자본주의와 다르다.”

-인터넷은 인간의 내파 현상이다. 정보의 내파는 기계의 외파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을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는가?

“그렇다. 정보 내파는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강력하게 자신의 활동으로부터 자신의 몸과 정신 모두를 소외시킨다. 그것은 모든 친밀한 관계를 사이비 관계로 뒤바꾼다.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를 비트로 교환하여 거둬간다. 그래서 인터넷은 이용자 몸(에너지, 혹은 노동, 활동)과 이용자 활동 결과물 간의 소외를 낳는다. 여기에 정보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소외 기제가 놓여있다.”

-내파의 인간 소외는 어떤 양식으로 진행되는가?

“정보의 과잉 속에서 개인 이용자에게 들어오는 정보는 몸과 생각 안으로 침투하지만 몸의 감각을 우회하고 기억을 요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거대한 디지털 뇌는 죽음과 부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복제의 반복과 조그만 차이의 재현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에게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 세상을 구성할 수 없다.”

-그것의 원인은 정보 기술의 구조에 있는가, 속도에 있는가?

“기술 자체가 갖는 속성이 끼친 영향도 있고, 급격한 폭발과 급작스러운 에너지의 힘, 그리고 압력 차에 의한 흡입도 있을 것이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지구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세 가지 힘, 곧 빛과 전기와 자장이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구의 삶을 움직이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의 계보에서 인터넷의 자리는 어디인가?

“인터넷은 물질을 지배하는 중력의 세계와 그것의 지배를 받는 몸의 세계를 우회한다. 인터넷은 중력이 지배하는 물질의 세계를 탈물질화하거나 그것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에너지의 결과물인 정보를 인터넷 세상으로 이전시킨다. 이전된 정보 에너지와 육체 에너지, 정신 에너지의 결과물이 인터넷 세상을 구성하는 원료로 이용된다. 자본은 이 과정을 한번의 프로그램으로 자동화하여 여기에 투여되는 생산수단을 간소화하고 절약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터넷 세상은 스스로의 힘을 갖는다. 우리는 힘을 잃고, 그들이 대신 그것의 힘을 전유한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에너지로서의 정보이다. 정보를 담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트’는 인간 에너지가 전화된 형태이고 이것 역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현실 세계의 인간 에너지와 여러 다른 에너지가 인터넷 세상으로 이전된다. 그러나 에너지의 총합은 같다. 문제는 두 세계간의 에너지 비율의 역전이 이루어지는 시점일 것이다.”

-에너지 비율의 역전이란 인간이 인터넷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인간을 하는 상황을 뜻하는가?

“이미 증강현실이나 삼차원 프린팅에서 그 단초가 보인다. 현재 에너지는 현실 세상에서 인터넷 세상으로 흐르고 있지만, 이후 어느 시점에서 반대의 흐름이 일어날 것이다. 현실이 조작과 가상을 만드는 모태였지만, 그때가 되면 정보가 현실을 만들어낼 것이다.”

-정보의 수평 공유를 목적으로 개발된 인터넷 기술이 인간관계의 수직 구조를 증강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플랫폼 독점 때문이다. 구글과 페이스북을 보라. 이용자들이 스스로 그 플랫폼을 이용하고 즐기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이면을 보지 못할 뿐이다.”

-하나의 시간에 두 개의 동일물이 편재하는 세계, 이것을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이것을 현실이라고 믿는다면 인간 존재는 어떤 변형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그런 현실을 살고 있지 않은가? 인터넷 세상과 현실세계는 일종의 ‘평행우주’다. 나와 나의 비트 반영물, 현실세상의 내 에너지가 끝없이 인터넷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만들어내는 무수한 비트 반영물들이 현실세계와 함께 공존하는 게 현재의 현실이다. 현실세계와 인터넷 세상 사이에도 열역학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봐야 하지 않나? 그 에너지의 흐름이 역전될 때 인류는 엄청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인터넷이 인간의 해골을 깨뜨리고 뇌와 뇌를 직접 연결하면서 인간의 개인성과 유일성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어디서 그것을 되찾을 수 있나?

“못 찾는다. 해골을 깨뜨리고 뇌와 뇌를 직접 연결하는 비트 에너지 시대에는 정보가 몸을 통해 전달되고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개체성조차 지탱하기 힘들어진다. 가장 확실한 개체성의 근거인 자신의 몸과 그에 바탕을 둔 감각과 체험, 기억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명료한 대안은 장치에서 ‘물러서기’이지만 인터넷이 이미 생활의 환경이기 때문에 이것도 쉽지 않다. 뇌에 덮개를 다시 씌워주어야 하는데 묘안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인터넷으로 매개되는 인간의 감각이 노동의 계기를 증발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언어에 의한 언어, 이미지에 의한 이미지의 비실재성이 그 원인인가?

“인터넷으로 매개되는 정보는 인간의 감각을 바꾼다. 인터넷 세상의 정보는 몸의 감각을 통과하지 않은 채 직접 뇌로 전달된다. 실제 세계로부터 감각이 받아들이는 정보와 달리 이것은 비트로 증류된 정보이다. 물질 대상이 사라진 인터넷 세상에서는 이미지가 만든 이미지, 언어가 만든 언어, 기호가 만든 기호를 서로 혼합하는 작업만 이루어진다. 노동의 또 다른 종말이다. 그래서 전통적 의미에서 보는 노동의 계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에너지와 에너지가 만든 비트 결과물은 현실세계에서 인터넷 세상으로 끊임없이 이전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이 시대 축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미분되는 역사성, 창궐하는 사이비 일상과 그것의 박테리아급 번식 속도가 인간의 속도 감각에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가?

“아주 빨리 움직이거나 바깥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속도를 느낄 수 없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바깥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일종의 폐쇄 속도가 적용된다.”

-노동의 기회를 기계와 프로그램에 박탈당한 인간에게 주어진 사이버 자유공간, 자동화와 인터넷의 관계는 인과적인가, 조작적인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자동화 기계보다 인간노동의 결과물을 자동으로 흡수하는 비트 기계가 더 무섭다. 자동화는 인터넷 세상의 조건이다. 인간은 사이버 자유공간의 환상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는 바로 그 시점에 자신의 활동 결과물을 자동으로 전유당한다.”

-자연과 인간관계의 무한 가능성을 상징체계로 뒤바꾼 인터넷 세상은 무엇으로 인간을 유혹하는가? 그 페로몬의 정체는 무엇인가?

“비트 페로몬은 자신의 비트 반영체가 다른 이용자들에 의해 반사될 때 분비된다. 그것은 자기 반영물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강화하여 결국 그곳에 코를 박게 만든다. 코를 처박으면 감각마비에 이른다. 몸을 통한 감각을 상실하고 비트로 반영된 반영물만 지각하는 불구가 된다.”

-존재의 시간성을 증발시키는 인터넷의 동시성, 기억을 쓸모없게 만드는 빅데이터류의 음모, 내용 없는 일상이 조성하는 역사의 불모성에서 삶의 의미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그것에 대항하거나 반동하거나 그것의 영역 바깥으로 탈주하면 반사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실천 자체가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현실과 인터넷 세상의 접점과 경계를 눈에 보이도록 만들고 그 범위를 넓혀나가는 실천이다. 접점의 범위가 확장되는 만큼 우리는 인터넷 세상을 대상화할 수 있다. 그때 인터넷 세상에 대한 주도권을 쥘 수 있지 않을까?”

-가장 빠르게 정지한 공간, 복제에 복제가 거듭되는 만화경의 세계에서 ‘중인환시(衆人環視)’의 십자가 형을 선고받은 데이터 인간은 어떻게 실존할 수 있는가?

“반영과 복제로 이루어지는 만화경 세상에는 죽음이 없다. 그곳에는 영원한 지속과 저장과 축적, 놀이, 소비만 존재한다. 실존하려면 존재의 투기성을 인지하고 죽음과 부재를 직시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구성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먼저 몸을 회복하고 물질의 구체성이 살아있는 현장을 찾아 나서야 하고, 자연의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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