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수저계급론

2015.12.24 22:12 입력 2015.12.24 23:02 수정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과

젊은 세대 “신계급사회 헬조선”

보수 “개인 책임을 사회로 돌려”

역사는 하나의 층위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 이 점에 착목해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를 ‘사건의 역사’, ‘국면의 역사’, ‘구조의 역사’로 구분했다. 국면사의 시각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핵심 동력은 ‘97년체제’다. 97년체제에 내재된 세 가지 주요 경향은 세계화, 신자유주의, 사회 양극화다. 외환위기가 일어난 지 20년에 가까운 2015년 현재, 세 경향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중요한 과제다.

세계화가 구조적 상수로서 한국 사회의 경제와 문화의 틀을 바꾸어 왔다면, 신자유주의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구조변동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사회 양극화는 불평등을 강화시킴으로써 사회통합을 작지 않게 훼손시켜 왔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경향들이 의사결정의 최종 영역인 정치사회에 반영돼 왔다는 점이다. 세계화의 불가피성이 2007년 대선에서 선진화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 모델의 모색은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담론을 부상시켰다.

양극화가 대중적 담론으로 구체화된 것이 2015년 ‘수저계급론’이다. 수저계급론이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외환위기 이후 2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 양극화는 일시적 흐름을 넘어선 구조화된 추세로 자리 잡았다. 둘째, 박근혜 정부에서 특히 가시화된 ‘갑을 논란’은 계급 격차에 따른 모멸감과 이에 맞서는 인정 욕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증대시켰다. 광복 70년을 맞이한 올해, 불평등 해소가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됐다.

<b>‘헬조선’을 뒤집자 </b>청년단체 회원들이 지난 10월9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문화공원에서 대한민국 청년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청년불만 스테이지를 열어 ‘헬조선 뒤집기’ 딱지치기를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헬조선’을 뒤집자 청년단체 회원들이 지난 10월9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문화공원에서 대한민국 청년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청년불만 스테이지를 열어 ‘헬조선 뒤집기’ 딱지치기를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헬조선과 수저계급론

수저계급론은 사회적 신분과 불평등에 대한 담론이다. 이 담론은 학계가 아닌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의 현실 풍자에서 비롯됐다. 수저계급론에 따르면 최근 한국 사회에는 네 계급이 존재한다. 금수저·은수저·동수저·흙수저가 그것이다. 금수저가 최상류층이라면 흙수저는 하류층이다. 두 계급은 출발 지점부터 다르다. 영어유치원, 어학연수, 낙하산 취직이 최상류층의 성장 과정이라면, 서민 어린이집, 알바 생활, 자발적 백수가 하류층의 성장 과정이다. 금수저에게 은퇴 이후 해외여행을 포함한 행복한 노후가 보장돼 있다면, 흙수저에겐 쪽방촌에서 안타까운 고독사가 기다리고 있다.

수저계급론의 등장과 연관해 주목할 것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파리경제대 교수·경제학)와 김낙년(동국대 교수·경제학)의 불평등 연구다.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노동소득보다 재산으로부터 얻게 되는 수익이 갈수록 중요해진다고 주장했다면, 김낙년은 우리 사회에서 전체 자산 형성에 기여하는 비중에서 상속·증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견해가 맞다면,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나지 않는, 불평등이 갈수록 공고화되고 구조화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뉴 캐피털리즘>에서 신자유주의가 갖는 그늘의 하나로 능력주의(meritocracy)의 폐해를 지적한 바 있다. 10대의 입시 경쟁, 20~30대의 취업 경쟁, 40대 이후의 ‘퇴출 공포’로 나타나는 생존 경쟁은 신자유주의가 강제한 능력주의의 살벌한 전쟁터를 이룬다. 능력주의와 비교할 때 수저론은 일종의 귀족주의(aristocracy)다. 재능보다는 태생이 중요하다는 게 귀족주의의 핵심이다. 이렇듯 금수저의 강고한 귀족주의와 나머지 수저들의 과도한 능력주의가 기이하게 공존하고 결합돼 있는 게 현재 한국 사회의 민낯이라 할 만하다.

수저계급론에 큰 공감을 표한 이들은 특히 젊은 세대다. 이들은 신계급사회로 가는 현실을 ‘헬조선’이라고 풍자했다. 헬조선이란 ‘지옥(hell) 같은 한국(조선)’을 뜻한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지난 70년 동안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모범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사례로 꼽혀 왔지만, 정작 현재의 사회 현실에 불만·불신·불안을 느끼는 국민들은 결코 적지 않다.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은 영광의 과거와 고뇌의 현재가 충돌하는 아이러니를 생생히 보여준다.

■불평등을 넘어서

신계급사회론인 수저계급론에 대해선 보수세력 일각에서 비판이 제기됐다. 그 핵심은 개인적 책임을 모두 사회적 책임으로 돌린다는 논리였다. 자기 능력을 계발하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일방적으로 토로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부자에 대한 시기심과 상대적 박탈감이 수저계급론에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더해 능력주의와 귀족주의의 동시 강화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논리가 동원됐다.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세계화 시대에 불평등이 강화돼온 게 한국 사회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구적 차원에서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 간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개별 나라에서 상층과 하층 간의 불평등은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점점 더 커져 왔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불평등이 강화돼 왔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증대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젊은 세대의 경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게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각종 스펙 쌓기에서 볼 수 있듯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청년실업의 현실이 헬조선 담론과 수저계급론을 탄생시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노오력’을 기울여도 제대로 취업하기 어려운 게 흙수저의 삶이라는 젊은 세대의 주장이 한국 사회 현실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대사회학의 관점에서 기성세대의 ‘노력’과 청년세대의 ‘노오력’ 간 인식의 거리는 한국 사회의 세대 단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계급이동의 사다리가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2015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점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선진국에 도달하기 어렵다.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들은 이미 제시돼 왔다. 하층 계급에게 더 많은 교육 기회를 부여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노동시장을 개혁하며, 소득과 자산, 상속에 대한 전향적인 조세정책을 모색하고, 사회적 패배자들을 위한 패자부활 제도를 마련하는 게 그 대안들이다. 요컨대 불평등을 완화하며 해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고 복지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사라져가는 계급 사다리를 다시 건실하게 만들고, 더 많은 기회, 더 많은 평등, 그리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정의를 성취해 가는 것은 광복 70년을 맞이한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사적 과제이다.

■청년실업 10% 육박…새 인생 문턱 앞서 좌절한 ‘○포 세대’ 유행
최근 청년세대를 지칭하는 말로는 ‘~포 세대’가 있다. ‘삼포(연애·결혼·출산 포기) 세대’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이후 ‘사포(삼포+취업 준비로 인한 인간관계 포기) 세대’, ‘오포(사포+내 집 마련 포기) 세대’라는 말이 유행했고, 요즘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N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다.

<b>‘내일’이 안 보인다 </b>지난해 11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청년 구직자들이 게시판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내일’이 안 보인다 지난해 11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청년 구직자들이 게시판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청년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실업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청년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2배가 넘는 10%에 육박한다.

청년실업의 원인은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고용 없는 성장’ 같은 세계사의 보편적 조건에서부터 과잉 고학력화, 구인·구직자 간의 상이한 눈높이로 인한 ‘잡 미스매치(job mismatch)’ 같은 우리 사회의 특수한 조건에 이르기까지 안팎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있다.

청년세대가 갖는 고통에는 기성세대의 책임이 작지 않다. 세계화 시대에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는 쉽지 않더라도, 다른 나라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 대응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청년세대가 중소기업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상당수 중소기업은 미래 전망이 불확실하고 일부 중소기업은 갑을관계의 횡포가 두드러지는데, 자기 아이들에게 선뜻 권할 부모가 결코 많지는 않을 것이다.

청년실업의 대안으로는 전공을 포함한 대학의 구조조정, 체계적인 직업훈련의 도입과 청년고용 의무할당을 포함한 법·제도의 정비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또 정부와 대기업은 물론 노동조합 등이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사회적 대타협을 맺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스스로 창조해가는 존재다. 이런 자기 창조 활동의 근본이 생산활동으로서의 노동에 있다고 주장한 이는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다. 새로운 인생의 문턱에 있는 청년세대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책무이자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린 과제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