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소공동 시절 최일남 작가

2016.01.03 22:16 입력 2016.01.03 22:25 수정

문화면, 구색용서 탈피 ‘변화의 바람’…지면 경쟁에 발품 더 팔아

70년 생일잔치에, 과객 축에도 들지 못할 나를 ‘경향 사람들’에 끼워줘 고맙다. 경향신문에는 1962년 봄에 들어갔다가 1963년 봄에 나왔다. 송건호 선생 주선으로 서울 소공동 사옥에서 딱 1년을 보냈는데 입사 당시의 직함은 문화부 차장이었다. 타사(민국일보)의 문화부장을 데려오는 마당에 안 됐지만, 반년 후에는 꼭 부장 발령을 내겠다는 약속을 들은 끝이다. 민국일보 논설위원에서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보다 먼저 자리를 옮긴 송 선생은 그걸 “조직체 일반의 자존 의식”으로 설명했다.

[경향사람들] (2) 나의 소공동 시절  최일남 작가

그 이전의 언론계 입문이 애초에 난데없어서도 당자인 나는 기분이 언짢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노는 방죽만 다를 뿐, 하는 일이 같고 경험 또한 일천했던 터라서. 당시 이진섭 경향신문 문화부장은 여러 통신사 신문사 기자로 시작하여, 시나리오와 방송 드라마 작가로 이미 유명세를 탄 분이었다. 워낙 다재다능하여 문화의 어떤 테두리에 한정시키기 어려울 만큼 활동 영역이 넓었다. 샹송을 잘 불렀다.

박인환 작사, 이진섭 작곡인 ‘세월이 가면’도 그만한 내력에서 나온 노래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노랫말의 처음과 후렴으로 깔아 척박한 시대의 우수(憂愁)를 달래기 알맞았다. 박인환 시인 또한 경향신문 기자를 일찍이(1949년) 거쳤다. 김광주 소설가는 매우 오랫동안 문화부장(1947~1954년)을 역임했다(권영민편 <한국현대문학 대사전>).

이진섭 부장 시절의 문화부 기자는 모두 다섯이었다. 연예 담당의 김진찬은 노래 솜씨도 좋았다. 큰 몸집에서 나오는 미성(美聲)이 아주 고왔다. 수줍음을 잘 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최종률의 글은 그때 벌써 출중했다. 미구에 중앙일보 ‘분수대’ 집필을 맡아 성가를 높이고, 그 신문의 몇몇 중역을 역임하다가 다시 경향신문으로 돌아가 사장 자리에 올랐다.

지금은 옛 건물의 흔적마저 사라졌지만, 소공동 때의 경향신문 사옥은 장안의 번화가로 더할 나위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길 건너 명동은 더구나 문화부 기자들의 출입처로 제격이었다. 문인이다, 화가다, 음악가다 하는 예술가들의 집산지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고픈 배를 커피와 막걸리로 때우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을 만나자면 불가불 들러야 할 곳이었다. 그래서도 ‘명동 시장(市長)’이니 ‘명동 남작(男爵)’이니 소리를 듣던 이봉구 소설가가 <그리운 이름 따라 명동 20년>이라는 책(유신문화사, 1966)을 내면서 실토했을 게다. “이 책은 명동거리에서 늙어온 나의 회상기다”라고.

하지만 자신이 쓴 이야기를 ‘회상기’라고 밝혔듯이 내가 말하는 명동 역시 기자의 처지에서 본 지난날의 한 정황에 불과하다. 날로 달로 변하는 세상은, 외부 필자의 ‘단상(斷想)’류로 지면을 메우던 문화면 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은근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무렵에 쓴 졸문의 한 대목을 들어 당시 상황을 잠깐 설명하자면 이렇다.

1996년 1월 최일남 작가(오른쪽)가 강원 원주에 있는 박경리 선생 자택 앞에서 박 선생과 경향신문 신년대담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6년 1월 최일남 작가(오른쪽)가 강원 원주에 있는 박경리 선생 자택 앞에서 박 선생과 경향신문 신년대담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석간 4면씩 하루에 8면을 내던 신문이 6면으로 줄어든 후에도, 그중 한 면은 꼬박꼬박 문화면으로 메꾸어진다. 6분의 1 분량이 되는 셈이다. 말이 6분의 1이지 광고가 허리(사람으로 치면)를 바짝 졸라맨 데에다(8~9단) 연재소설이 또 2단을 차지하고, 만화, 바둑, 라디오 프로 등 고정 칼럼을 배치하고 나면 기껏 두서너가지 기사나 실을 둥 말 둥 할까? 그래도 우리나라 형편으로는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분량의 다과야 어떻든, 수년 전까지만 해도 좀 심하게 말하면 신문의 구색이나 갖추기 위해 있는 것 같은 문화면이 근래에 와서는 그러한 인상을 지양하고, 제각기 문화면의 향상을 위하여 독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문 문화면의 구실과 제작 태도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가해지고 있음은 관심 있는 사람들의 주목할 바라 하겠다(<신문연구>, 1962년 봄호).”

1976년 소설가 정을병의 창작소설집 <성>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최일남 작가(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소설가 백시종(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출판인 윤형두(세번째), 소설가 정을병(네번째), 문학평론가 임헌영(여섯번째), 이광훈 전 경향신문 논설고문(앞줄 왼쪽)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6년 소설가 정을병의 창작소설집 <성>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최일남 작가(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소설가 백시종(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출판인 윤형두(세번째), 소설가 정을병(네번째), 문학평론가 임헌영(여섯번째), 이광훈 전 경향신문 논설고문(앞줄 왼쪽)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종래의 수동적 자세를 능동적 취재로 바꾼 데 대한 자화자찬이었던 셈이다. 앉아서 되작거리느니 발로 뛰어 취재원의 확대 재생산을 꾀하자는 취지를 누가 마다하리. 미국식 신문용어를 빌려 관청 출입 따위를 ‘커버한다’고 일컫던 때다. 문화부 기자는 그런 게 없을지언정 눈썰미 따라 머리만 잘 굴리면 문제가 없으려니 자위했다. 아니 영화담당 기자는 개봉관이 곧 출입처나 다름없었다. 영화도 거저 보고 이니셜 기명(記名)으로 평까지 썼다. 이 때문에 시니어들 차지가 항례였다.

아무튼 바람직한 변화였다. 좀처럼 문화면을 기웃거리지 않던 독자들도, 교육 수준의 상승 확대와 더불어 그쪽에 눈을 주는 효과를 거두었으니까. 다만 귀에 거슬리는 역설이 우습지도 않았다. ‘이제부터는 문화면끼리의 경쟁이다’라는 말로 군사정권의 언론 탄압을 누그러뜨리듯 미리 주저앉는 발상이 듣기 싫었다.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서로 간의 경쟁이야 늘 있는 것이로되, 자유를 먹고 사는 문화를 바라보는 의식이 고작 그 정도인가 싶었다. 제 허물은 어디에 두고 이러는가 스스로 부끄럽지만, 납(鉛)냄새 속에서 그 시절을 때운 자의 생각은 그랬다.

이런 옛일을 되짚으며 요번에 찾아간 소공동의 경향신문 사옥은 물론 온데간데없었다. 원래의 땅을 높고 낮은 건물들로 쪼갰는가. 술집, 편의점, 병원 등의 간판이 즐비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는 무심히 스쳐 지난 길을 이번에는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를 틈타 소공동까지 발품을 팔았을 따름이다.

아, 내친김에 그리고 경향신문 창간의 쌍벽이었던 정지용 시인과 염상섭 작가를 불현듯 떠올렸다. 두 분은 주필과 편집국장을 각각 맡아 1년 가까이 있다가 사임했는데, 정지용 시인은 ‘여적(餘滴)’을 특히 많이 쓴 것 같다(김학동, <정지용 연구>, 1987년 11월, 민음사).

이 단평(短評)란은 후배 논설위원들이 지금껏 잘 이어오고 있다. 오랫동안 무기명이었던 관례를 기명으로 바꿨거늘 지금은 모든 신문이 죄 그렇다.

한때는 나도 사외 필진의 일원으로 경향신문과 자매지 ‘뉴스 메이커’ 등에 칼럼을 많이 썼다. 이참에 대강대강 들춰 본 어느 해 여름(1997년 8월22일)의 글은 제목이 마침 ‘색깔론 시비’였다. 저절로 웃음이 나와 혼자 픽 웃었다. 내용이나 동기를 길게 설명할 겨를이 없어 편집자가 단 중간 제목이나 옮겨야겠다.

“밑져야 본전의 변죽 울리기” “음습한 소모전에 신물이 난다” “제발 사건 진상·진실만 말하자”

경향신문은 오늘이 있기까지 무던히 권세에 시달리면서 군사정권의 탄압을 직통으로 받았다. 그걸 어찌 다 말하랴. 하나 사원들의 굳건한 노력과 단결로 이제는 저렇게 우뚝하다. 고생이 여간 심하겠지만, 더더욱 건강한 독립언론의 본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최일남 작가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최일남 작가를 ‘예지와 통찰의 칼럼니스트’라고 했다. 소설가 고종석씨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글과 행동으로 지식인의 모범을 보이고, 나서지 않으면서 물러서지도 않는, 온유하되 대범한 선비”로 표현했다.

전주사범학교와 서울대 국문과를 나온 그는 1956년 현대문학에 소설 <파양>으로 등단한 이후 <진달래> <동행> <탄생>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1959년 민국일보 문화부장으로 일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62년 경향신문으로 옮겨 문화부장을 지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과 편집부국장을 지낸 그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됐다. 당시 그는 ‘동서문명의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기 위해 일본·미국·멕시코·페루 등지에서 취재하고 있던 중이었다. 신군부는 해외취재 중이던 그에게 해직통보를 한 것이다. 해직 이후 창작활동에 전념한 그는 <고향에 갔더란다> <거룩한 응달> <서울의 초상>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84년 동아일보에 논설위원으로 복직한 이후에는 ‘최일남 칼럼’을 통해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경향신문에 ‘최일남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던 그의 글은 기자들의 ‘글쓰기 전범(典範)’으로 일컬어졌다. 1988년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을 지낸 그는 <그리고 흔들리는 배> <만년필과 파피루스> 등을 발표했고, 월탄문학상, 이상문학상, 위암 장지연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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