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논설위원 주요한 - 경향 폐간 부른 ‘여적 필화’ 당사자…시인·언론인·정치인 ‘족적’

2016.01.22 21:08 입력 2016.01.22 21:19 수정

논설위원 주요한

주요한은 1900년 평양에서 목사인 아버지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설가 주요섭이 그의 동생이다. 주요한은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1925년 중국 상하이(上海) 후장대를 졸업했다. 수필가 피천득도 주요한의 주선으로 같은 대학을 나왔다. 그가 1919년 발표한 ‘불놀이’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자유시로 알려져 있지만 김억의 ‘봄은 간다’(1918)나 한용운의 ‘심’(1918)이 먼저라는 견해도 있다. 주요한은 언론인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1959년 ‘여적 필화사건’ 당시 그는 민의원이었다. 이듬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월 열린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재선됐고, 장면의 제2공화국 정권에 입각해 부흥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여적 필화 사건’ 당시 여적을 쓴 주요한은 경찰이 여적 필자를 찾기 위해 경향신문 편집국을 압수수색한 후 며칠 뒤 국회기자실에 나타나 자신이 여적 칼럼을 썼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적 필화 사건’ 당시 여적을 쓴 주요한은 경찰이 여적 필자를 찾기 위해 경향신문 편집국을 압수수색한 후 며칠 뒤 국회기자실에 나타나 자신이 여적 칼럼을 썼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주요한은 장면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장면을 회고하는 글에서 “1952년 여름 서울 환도 후 나는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일 보고 있었는데, 그 당시 야인인 장 박사(장면)는 역시 경향신문사 고문이란 이름으로 신문사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만나뵙게 되고, 때로는 주필인 이관구씨와 나를 같이 점심 먹자고 하여 삼화빌딩 뒤채 2층에서 밥을 먹으면서 정치담을 나눈 일도 있었다”고 썼다. 주요한이 민주당 소속으로 민의원이 되고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던 무렵부터는 “장 박사로부터 가끔 무슨 성명서 등의 초안을 부탁받아 써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 부탁은 언제나 경향신문 논설위원실로 전해 왔던 것이다”라면서 자신이 장면의 부통령 개인성명을 도맡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향신문 폐간의 도화선이 된 1959년 2월4일자 주요한의 ‘여적’칼럼.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폐간의 도화선이 된 1959년 2월4일자 주요한의 ‘여적’칼럼. 경향신문 자료사진

주요한은 한국 근현대사에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주요한의 정체성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그는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이었다.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다. 이름에 해당하는 ‘紘一’(굉일)은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일본서기>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20세기 초부터는 일본 군국주의의 슬로건처럼 쓰였고, 태평양전쟁 때는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1941년 주요한은 ‘삼천리’ 잡지에 ‘팔굉일우’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한때 임시정부 기관지 편집을 맡기도 했던 주요한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변절했고, 이후 그의 친일 활동은 ‘눈부셨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듬해인 1942년 주요한은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해방성전의 용사 되기를 맹서하고 있다”고 썼다. 1943년에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반도개병가’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아 ‘우리는 제국 군인’ 등을 당선작으로 선발했다. 광복을 불과 3개월 앞둔 1945년 5월에도 그는 ‘전 국민이 육탄으로’라는 글을 발표해 일제가 조선에서 조직하려 했던 ‘국민의용대’를 선전했다. 계간 ‘실천문학’은 2002년 친일문학 작품 명단을 정리·발표했는데, 주요한의 글은 모두 43편으로 이광수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일제강점기 대표적 친일 활동 장면 최측근으로 장관 역임

시인 주요한(1900~1979)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많은 문인들이 그랬듯 언론인 역할을 겸했다. 192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맡았고, 해방 후 1950년대에는 경향신문에서 논설위원으로 글을 썼다. 1959년 그가 쓴 원고지 5장 분량의 짤막한 글 한 편은 제1공화국 최대 언론 탄압으로 꼽히는 경향신문 폐간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해 2월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여적’ 칼럼이 문제였다. 칼럼이 나가고 2개월 뒤인 4월30일,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여적 등 기사 5건을 문제 삼아 경향신문을 폐간 조치했다. 이른바 ‘여적 필화 사건’이다.

주요한이 해운업에 종사하던 시절 부인 최선복씨와 함께 다정한 한때를 보내고있다.<br />경향신문 자료사진

주요한이 해운업에 종사하던 시절 부인 최선복씨와 함께 다정한 한때를 보내고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이 폐간령에 대해 행정처분취소 가처분신청을 내 승소하자 정부는 무기발행정지 행정처분으로 응수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같은 해 4월27일 온전한 복간이 이뤄지기까지 경향신문은 꼬박 361일을 기다려야 했다.

“문제는 그처럼 투표자가 자유로이 자기 의사를 행사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 인민이 ‘성숙’되지 못하고 또 그 미성숙사태를 이용하여 가장된 다수가 출현된다면 그것은 두말없이 ‘폭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 가장된 다수의 폭정은 실상인즉 틀림없는 ‘소수의 폭정’이라고 단정할 것이 아닌가.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다수결의 원칙이 ‘관용’ ‘아량’ ‘설득’에 기초한다는 정치학적 논리가 문제가 아닌 것이요,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 되느냐의 원시적 요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2월4일자 ‘여적’ 칼럼 일부)

‘여적’이 나간 날 서울시경 사찰과 형사 2명이 경향신문사로 와 편집국장을 연행해 8시간 동안 신문했다. 다음날에는 아예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이 편집국을 이 잡듯 뒤졌다. 여적의 필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주요한은 며칠 후 국회 기자실에 나타나 자신이 ‘여적’ 칼럼을 썼다고 밝혔다. 주요한 스스로 밝힐 때까지 경찰은 끝내 필자를 찾지 못했다. 당시 편집국에 있던 그 누구도 필자를 대지 않았다. ‘여적’ 칼럼 원고는 사진부 암실에 감춰 놓고 내주지 않았다. 논설위원 중 한 사람으로 당시 난리통을 목격했던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훗날 “나는 그때 신문사 사람들의 깊은 동료애와 직업 윤리에 감탄했다”고 회고했다.

주요한은 ‘여적’ 칼럼이 나가고 5일 만인 2월9일 내란죄 등으로 입건됐다. 같은 달 27일에는 경향신문 발행인 한창우 사장과 함께 불구속 기소됐다. 경향신문에 대해서는 ‘미군정령 제88호’를 근거로 삼아 폐간 조치를 내렸다.

주요한이 쓴 ‘여적’ 칼럼은 경향신문이 그해 2월2일부터 석간 지면에 연재하던 미국 노트르담대 정치학 교수 페르디난드 허멘스의 글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에 대한 단평이었다. 허멘스는 그의 글에서 다수결의 전제조건으로 인민이 성숙되어 있어서 스스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주요한은 여기에 공정선거가 시행되지 못한다면 폭력 혁명도 있을 수 있으니 한국의 현실을 이러한 견지에서 관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장 직전 해인 1958년 열린 제4대 총선만 해도 입후보 등록, 선거운동, 투·개표 등 전반적인 선거 과정이 부정으로 얼룩졌으니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러나 당국은 주요한의 글을 “혁명에 의할지라도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폭력을 선동하였다”고 견강부회하고,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동시에 폭동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당초 경향신문과 이승만 정권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해방 정국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떠올랐을 때 경향신문은 우익진영 신문들처럼 적극적인 반탁노선을 취했다. 유엔총회에서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됐을 때도 이를 적극 지지한다는 논설을 썼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경향신문과 이승만 정권의 밀월관계는 파탄났다. 1958년 2·4 보안법 파동 때도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경향신문이 정권의 눈엣가시로 떠오른 셈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두고 준비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언론 통제도 점점 강화돼갔다. ‘여적 필화 사건’은 경향신문과 정부의 악화된 관계, 선거 승리를 위한 정권의 언론 통제 등이 맞물린 결과였다.

경향신문 폐간 조치 이후 국내외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해 경향신문에 연재한 ‘의혹과 진실-재판으로 본 현대사’를 보면 폐간 조치 직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등 언론단체와 대한변호사협회 등 사회단체가 항의 성명을 냈고, 국회에서도 폐간을 주도한 공보실장에 대한 파면 결의안이 나왔다. 주한 미국대사도 “군정법령 제88호는 1946년 당시 한국 치안을 위협하던 공산주의자들의 파괴 선전을 막으려는 것이었으며 언론에 대한 탄압이 언론의 과오를 바로잡는 방책은 되지 못한다”며 정부 조치를 비난했다. AP통신은 5월17일 서울발로 “이번 폐간조치는 내년(1960년)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이 승리하기 위해 취해졌으며, 자유당은 언론의 비판을 침묵시키는 등 가혹한 수단만이 선거 승리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요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창간해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고 있던 월간지 ‘새벽’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나의 붓을 꺾을 자 누구냐, 정간 중인 경향신문 주필의 항변’(이관구 당시 경향신문 주필) ‘경향신문 사건의 판결 비판’(이항녕 당시 경향신문 논설위원) ‘언론 자유는 쟁취해야 하는 것’(홍종인 당시 조선일보 주필) 등의 글이 1959년 ‘새벽’ 11월호에 실렸다.

‘여적 필화 사건’ 이후 불과 1년 만에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주요한은 경향신문 복간 판결 12주년을 맞아 1972년 경향신문 사보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여적’ 사건이 예언처럼 됐다는 것이 당시의 항설이었다고 기억된다. 그것을 쓰는 순간에는 예언이 아니라 경고로 자인했던 것이다. 국민의 다수의사가 선거로 결정될 수 없을 때에는 폭력이 또 하나의 다수의사 결정방법이라고 경고 삼아 쓴 것인데, 이후 1년 만에 4·19 학생궐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일종의 폭력으로 국민의 의사가 결정됐다고 볼 수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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