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박정희가 친분 이용해 경향신문 경영 맡기려 했지만 휘둘리지 않다

2016.01.29 21:36 입력 2016.01.30 11:00 수정

논설위원 구상

프랑스가 뽑은 ‘세계 200대 문인’

“그 신문사 일 어떻게 되었어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을 쓰는 것밖엔 없나 봅니다.”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어요.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주시죠. 그렇듯 당하고만 가만히 계실 거예요?”

“그럼 어쩝니까? 예수가 오른쪽 뺨을 치면 왼뺨을 내 대라고 가르치셨는데야!”

“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

“그게 천주학의 어려운 점이지요!”

“천주학이라!”

육명심 사진작가가 1970년 초 구상 시인을 직접 찾아가 촬영한 사진. 육 작가가 2007년 낸 문인사진첩 <문인의 초상>에 실려 있다.

육명심 사진작가가 1970년 초 구상 시인을 직접 찾아가 촬영한 사진. 육 작가가 2007년 낸 문인사진첩 <문인의 초상>에 실려 있다.

50여년 전 박정희 대통령과 구상 시인 간에 있었던 대화이다. 시인은 이를 자전 연작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66>에 가감 없이 담아 놓았다. 그가 평생 가슴에 묻고자 했던 비화를 이렇게 시로나마 일부 드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은 명예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좀 강박적이라 느껴질 만큼 평생 애써 지키며 살았다. 경향신문과의 인연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맨 처음 떠오른 것이 그 비화였다. 하지만 나 역시 아버지가 묻으려 했던 사실을 새삼 들추어내는 일이 선친에 대한 불충이기도 하거니와 공연한 구설을 만들 거란 생각에 저어해 그저 경향신문과의 일반적인 관계만을 찾아 이것저것 자료를 뒤적였다. 그런데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의 경향신문 강제매각 의혹사건 조사결과에 대한 보도 자료들을 접하면서 의아심이 생겼다.

과거사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5·16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평소 자신과 친분이 돈독하고 천주교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시인 구상을 내세워 경향신문을 인수토록 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1962년 당시 성우산업 대표 이준구씨가 경찰국장 출신 인척인 홍병희씨를 내세워 경향신문을 인수하게 됐다. 이 과정에 이준구씨는 천주교 재단 이사회로부터 손에 넣은 ‘백지 위임장을 편법으로 사용하였는데’(한홍구, 한겨레21, 2005년 7월26일자), 이 대목이 구상 시인이 죽을 때까지 발설하지 않았던 비화가 들어있는 부분이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회고하던 집안 여자 어른들의 말로는 집 주변에 사복 경찰들이 몇 주간이나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후 ‘수완 있는 사업가’로서 1년 만에 경향신문 경영을 정상화시킨 이준구 사장은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젊은 기자들의 비판적인 기사를 적극 후원해 정론지로서의 경향신문 존재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는 1965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경향신문은 경매에 부쳐져 1966년 기아산업 김철수 사장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배후엔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의 경영권을 장악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읽고 알아서 받든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있었다고 과거사 위원회에서 밝힌 바 있다.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정권친화적이 아니었던 이준구 사장을 그토록 견제하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어째서 시인 구상에게 신문사 경영을 맡기려 했던 것일까? 단지 그가 천주교의 신망을 얻고 있는 인물이라 천주교 재단과의 교섭이 용이하리라 생각해서? 그렇다면 구상을 통해 경영권을 장악한 후에 비협력적일 경우 토사구팽하면 되리라 생각한 걸까? 내가 아는 아버지 구상 시인은 결코 어떤 독재정권에도 협력적일 수가 없는 사람일 뿐 아니라 그가 평생 개인적 우의를 지켰던 박 대통령과도 정의의 대원칙을 거스르는 입장 차이에서라면 뼈아픈 결렬도 마다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그러한 구상 시인의 기질을 박정희 대통령이 친구로서 모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또 다른 천주교 인물 양한모씨를 통해 경향신문 인수를 시도한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자금력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구상 시인을 통해 하려 했던 사실이 왠지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1962년 봄, 시인 구상은 경향신문 사태 이후로도 몇 차례 제안받은 중책의 ‘자리’들을 사양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명목상으론 경향신문 도쿄지국장을 자청해 떠난 출행이었으나 실은 자신을 곤혹스러운 입장으로 몰고 가는 당시 정치·사회 현실에서 떨어져 있으려는 의중 외에 이미 대수술을 감행하지 않고는 치유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고질병 폐결핵을 치료받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떠나기 며칠 전 구상 시인과 박정희 장군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62>)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 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이 같은 대화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은 형이상학의 세계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평생 추구했기에 그 이후로도 권력 시스템과 연관된 어떠한 지위나 직책도 지닌 적이 없다. 그는 북에서 퇴폐주의, 악마주의, 부르주아적, 반역사적, 반인민적 등 일곱 가지의 반동적 죄목의 딱지가 붙어 처형되기 직전에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 남하한 자유주의자이고,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불온한 저술(사회평론집 <민주고발> 등)로 찍혀 조작된 이적혐의를 뒤집어쓰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반년여에 걸친 옥살이를 한 반골이었다.

그러한 그였으니 설사 경향신문 인수가 성공적으로 이뤄져 사장직에 올랐다 하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이었을 당시 맺어진 친분 때문에 친정권 필봉을 휘둘렀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가 경향신문 경영에 참여했더라면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 이후 수년간 홀로 위령미사를 지내주곤 했던 개인적 우의조차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균열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자명 소설가·구상 시인 딸

구자명 소설가·구상 시인 딸

1993년에 출간된 자서전적 에세이집 <예술가의 삶·9-구상편>에 실린 ‘에토스적 시와 삶’이란 글은 그가 경향신문 사태 이후 자신의 삶에 어떠한 주체적 변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4·19가 나고 또 5·16이 일어나자 나는 행동적 현실 참여에 허탈감을 맛보고 나 스스로의 능력의 한계도 느껴서 문학 본령의 복귀를 위하여 강단으로 전신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오랫동안 나의 시작업의 휴면 상태를 메우기 위하여 <밭일기> 100편의 에스키스를 시작하였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촉발생심(觸發生心)이나 응시소매격(應時小賣格)인 시를 써가지고선 도저히 사물의 실재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존재의 무한한 다면성이나 복합성을 조명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한 제재를 가지고 응시를 거듭함으로써 관입실재해 보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 실존의 본령이라 여긴 문학에 본격적으로 귀의해 <밭일기> 외에도 <강> <까마귀> 등 수백편의 연작시를 남겼고, 신앙인으로서 참 영성의 길을 추구했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사회적 나눔을 이어가는 무좌(無座)의 공인 역할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은 그의 시 제목처럼 ‘홀로와 더불어’ ‘영원 속의 오늘’을 살다가 ‘오늘 속의 영원’으로 떠났다.

■‘삶을 노래하는 구도자’ 현대 시단에 발자취…평론집 ‘민주고발’로 옥고 치러

한국전쟁의 비극과 이를 극복하는 인간애를 담은 ‘초토의 시’ 등으로 현대 시단에 큰 족적은 남긴 구상 시인(1919~2004년)은 ‘삶을 노래하는 구도자’로 불린다. 평생을 기독교적 존재관으로 살아온 그는 시를 통해 견고한 구도의 삶을 이어갔다. 또 필봉을 꺾지 않는 강직한 언론인이었다. 경향신문에서는 1961~1965년 논설위원 겸 도쿄지국장을 지냈다.

구상 시인(앞줄 왼쪽)이 1947년 진주 충렬사 사당 앞에서 문우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br />경향신문 자료사진

구상 시인(앞줄 왼쪽)이 1947년 진주 충렬사 사당 앞에서 문우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난 시인은 네살 때 아버지를 따라 강원 원산시 근교인 덕원으로 갔다. 부친은 원산에서 해성학원을 설립해 원장을 지냈다. 열다섯살에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종교과에 입학해서는 불교·기독교 등 각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배우며 정신적 근원을 다졌다. 1941년 고국으로 돌아와 북한 함흥에서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일했다. ‘원산 문학가 동맹’으로 활동하며 발표한 ‘여명도’ ‘길’ ‘밤’ 등의 필화사건에 휘말려 1947년 월남했다.

1953년엔 그가 발간한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이 판매금지됐고, 반공법 위반죄로 15년을 구형받았다가 무죄로 풀려나기도 했다. 그는 문학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지만 장면 총리, 5·16 직후 박정희 정권 등의 정계 입문 권유가 끊이지 않았다.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은 폐결핵 등 병마와 가난으로 힘겨운 삶을 보냈다. 부인 서영옥 여사가 1993년 타계한 후에는 소설가 딸 자명과 작은 아들의 손녀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리스도 폴의 강> <타버린 땅> <유치찬란>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등 10권이 넘는 시집과 수상집, 수필집 등을 펴냈으며 팔순에 가까운 시기에도 <인류의 맹점>을 발표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돼 읽히고 있다. 프랑스가 뽑은 ‘세계 200대 문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953년부터 1974년까지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한 경북 칠곡군 왜관에는 2002년 구상문학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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