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러·영·아이누 등 ‘북방’과의 충돌·교섭 속 ‘군국주의’ 싹트다

2016.08.05 20:55 입력 2016.08.05 21:08 수정
글·사진 김시덕 ㅣ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북방 열국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제작된 <북방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이라는 어린이 연극 대본. 러시아 군함이 대포를 쏘고 러시아 군인들이 총으로 위협해도 ‘당당한 일본 남아’ 다카다야를 그렸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제작된 <북방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이라는 어린이 연극 대본. 러시아 군함이 대포를 쏘고 러시아 군인들이 총으로 위협해도 ‘당당한 일본 남아’ 다카다야를 그렸다.

1800년, 정조가 사망했다. 이듬해 1801년에는 신유박해라 불리는 가톨릭 탄압 사건이 일어나 주문모 신부, 이승훈, 정약용의 형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다. 가톨릭교도 황사영은, 서양의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조선의 가톨릭교도들을 구해달라고 교황에게 탄원하는 편지를 썼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1811년에는 홍경래가 평안도에서 봉기했다. 봉기군은 예언서 <정감록>에 보이는 정도령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바다를 건너와 조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백성을 구원한다는 정도령. 19세기 초의 조선에는, 서양세력이든 정도령이든 그 누구든 바다를 건너와서 조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일본 에도시대 어학 천재 바바 사주로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준 러시아 해군 골로브닌

일본 에도시대 어학 천재 바바 사주로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준 러시아 해군 골로브닌

이처럼 조선 백성들은 외부세력이 세상을 뒤집는 꿈을 꾸었다. 같은 시기, 일본인들은 실제로 외부세력과 접촉하고 군사적으로 충돌해서 패배를 경험한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을 배운다는 ‘난학(蘭學)’도 의학에서 지리학과 군사학 연구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더 나아가 난학만으로는 대책을 마련하는 데 한계를 느낀 일본인들은 러시아어와 영어를 배우고 이들 국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해군 제독 표트르 리코르드

러시아 해군 제독 표트르 리코르드

바바 사주로와 같은 천재가 이러한 움직임의 선봉에 섰다.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던 바바는 러시아 세력이 일본에 접근하자 만주어와 러시아어 문헌을 번역했다.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준 선생은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黑屋光太夫)라는 일본인 선장과 골로브닌(Василий Головнин)이라는 러시아 해군이었다.

그 시작은 1782년이다. 서일본 이세 지역의 선장이었던 다이코쿠야는 에도(오늘날의 도쿄)로 향하던 중 표류해서 북태평양의 알래스카 알류샨열도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알래스카는 러시아 세력하에 놓여 있었다. 러시아 상인들은 그곳의 원주민들을 학대하고 모피를 모은 뒤 우랄산맥 서쪽에 팔아 큰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이들은 다이코쿠야 일행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려갔다. 예카테리나 2세는 일본과 무역관계를 수립하는 데 이들 일본 표류민을 이용하기로 했다. 육군 중위 아담 락스만(Адам Лаксман)이 이끄는 러시아 사절단은 1792년에 홋카이도 동쪽 끝 네무로에 도착했다.

도쿠가와 막부 관리였던 곤도 주조의 석상. 쿠릴열도로 가기 전에, 외적 러시아에 맞서 일본의 이익을 지키는 무사로서 갑주를 갖춰 입은 모습을 새긴 것이라고 전한다. 도쿄의 쇼주인(正受院)이라는 절에 모셔져 있다.

도쿠가와 막부 관리였던 곤도 주조의 석상. 쿠릴열도로 가기 전에, 외적 러시아에 맞서 일본의 이익을 지키는 무사로서 갑주를 갖춰 입은 모습을 새긴 것이라고 전한다. 도쿄의 쇼주인(正受院)이라는 절에 모셔져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자국 표류민을 정중히 송환해준 것에는 감사를 표했지만, 무역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러시아 측의 요청은 거부했다. 유럽 국가 중에는 네덜란드와만 교역을 하는 것이 막부의 대원칙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교섭한 것이 처음이다보니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서로간에 오해가 생겼다. 양측 간에 오고간 문서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측은 일본 측이 자신들과의 무역관계 수립에 동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개국을 해서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 방침을 지켜 러시아를 물리칠 것인지로 여론이 갈라졌다. 그러는 사이 다카다야 가헤이(高田屋嘉兵衛)라는 서일본 상인이 쿠릴열도 남부까지 영업망을 확대했고, 곤도 주조(近藤重)라는 막부의 관리가 쿠릴열도 남부 이투루프섬으로 건너가 “에토로후섬은 대일본의 영토임(大日本惠土呂府)”이라는 표식을 세웠다. 오늘날 기업과 국가가 협력해서 해외 사업에 참여하는 것처럼, 다카다야와 곤도는 쿠릴열도 남부의 아이누인들을 어르고 협박해서 일본화시킴으로써 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다. 그리고 1799년, 막부는 홋카이도와 쿠릴열도를 막부의 직할통치령으로 선언하고 막부가 직접 러시아의 접근에 대응하기로 방침을 확정한다.

알래스카가 러시아 영토임을 보여주는 지도.

알래스카가 러시아 영토임을 보여주는 지도.

일본이 홋카이도와 쿠릴열도의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던 시기, 1799년에 러시아도 알래스카에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n Company)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공동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였다. 그는 1804년에 사절단을 이끌고 나가사키에 도착해서, 러시아와 일본의 교역을 다시 한 번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와 교류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막부는 레자노프 일행을 감금하고 냉대했다. 분노한 레자노프는 부하들을 시켜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 남부 이투루프섬에 거주하던 일본인·아이누인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러시아 학자들의 요청을 받고 다이코쿠야 고다유가 그려준 일본 지도.

러시아 학자들의 요청을 받고 다이코쿠야 고다유가 그려준 일본 지도.

1806년 9월과 1807년 4월에 러시아 측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군 다수가 전사하고 일부는 캄차카반도로 끌려갔다. 13세기에 몽골·고려의 침략을 무찔렀다고 자부하던 일본인들에게 이 사건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을 다룬 <북해이담(北海異談)>이라는 소설이 1808년에 나왔는데, 국방 현안을 논했다는 이유로 저자가 처형당했다. 일본은 전시상황이었다.

1808년, 영국 군함 패톤호(HMS Phaeton)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해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합병되자 영국은 전 세계의 네덜란드 식민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인들이 거주하던 데지마 역시 영국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때도 일본군은 변변히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 열도의 북쪽과 남쪽에 나타난 러시아와 영국.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막부는 바바 등 네덜란드어 통역관들에게 목숨을 걸고 러시아어와 영어를 배우라고 명한다. 외국어 공부가 곧 애국인 시기가 도래했다.

쿠릴열도 지도. 점선은 러시아령이 된 연도를 가리킨다.

쿠릴열도 지도. 점선은 러시아령이 된 연도를 가리킨다.

이처럼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일본은 외국어 공부에 힘을 쏟는 한편 바깥으로 나가 국제정세를 살폈다. 1809년 마미야 린조(間宮林藏)라는 탐험가가 사할린을 거쳐 연해주로 건너가 아무르강 연안을 탐험했다. 그곳에서 마미야는 청나라, 러시아, 일본, 아이누 등의 원주민이 뒤얽혀 교섭하고 충돌하는 ‘북방 열국지’를 목격했다.

이처럼 러시아는 일본을 긴장시켰지만 정작 러시아는 그런 인식을 하지 못했다. 레자노프의 부하들은 국가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고 무력을 썼다는 이유로 해적으로 간주되어 처벌받기도 했다. 1807년 세계일주를 시작한 골로브닌도 아무런 긴장감 없이 쿠릴열도로 항해했다가 1811년 쿠나쉬르섬에서 막부군에 체포돼 하코다테에 억류된다. 그때 바바 사주로와 마미야 린조가 골로브닌에게 러시아어를 배운다. 참으로 역사는 얄궂고 기이한 인연으로 이어져간다. 골로브닌이 일본에 억류되자 러시아의 해군 제독 표트르 리코르드(Пётр Рикорд)는 그 보복으로 1812년에 다카다야 가헤이를 납치해서 캄차카에 억류했다.

필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제작된 <북방에서 울부짖는 사람들(北洋に咆える人>이라는 어린이 연극 대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대본에는 이른바 ‘대일본제국’ 내에 팽배해 있던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대본의 몇 장면을 소개하면 이렇다.

러시아 군함이 대포를 쏘며 다카다야 일행을 공격한다. 러시아 군인들이 총을 들이밀어도 ‘당당한 일본 남아’인 다카다야는 겁먹지 않는다. 리코르드는 그러한 다카다야의 모습에 감탄해서 그를 정중하게 대한다.

실제로도 다카다야는 상인다운 싹싹함과 친밀함으로 러시아 측을 감탄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본에서는 다카다야가 상인이기보다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인들에게 강요되던 ‘당당한 일본 남아’, 즉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다카다야 일행이 캄차카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어떤 이들은 죽어서 그곳에 묻혔다.

억류 이듬해인 1813년, 다카다야는 1806년과 1807년의 전쟁이 러시아 본국의 의사가 아니라는 뜻을 일본 측에 전하면 막부도 골로브닌을 돌려보낼 것이라고 리코르드를 설득한다. 그리고 러시아인들과 함께 쿠나쉬르섬에 도착한 다카다야는 양국의 교섭을 성공시킨다. <북방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은, 귀국하는 다카다야를 태우고 오호츠크해 유빙을 뚫고 오는 러시아 군함과 함께 ‘그의 영혼이 지금도 오호츠크해에서 일본인을 지켜주고 있다’는 대사로 끝난다. 다카다야의 영혼이 그 힘을 다한 탓인지 1945년 8~9월 사이에 소련은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했다.

19세기 초의 일본은 1840~1860년의 아편전쟁보다, 그리고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방일보다 앞서 서구세력의 무력을 경험했다. 19세기 초 일본의 경험은, 과연 같은 시기에 가톨릭과 민란을 통해 탈출구를 모색하던 조선 백성들이 생각하던 그런 것이었을까?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지되는 것이 조선 지배집단에게는 당연히 이익이지만, 백성들이 그 이익을 공유했을지는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는 2016년 현재 중동과 유럽에서 보듯이 국가를 잃은 난민들이 받는 차별 역시 참혹하다. 필자는 아직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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