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갑신정변처럼…일본인들 강대국 견제하려 필리핀 정치개입

2017.02.17 21:01 입력 2017.02.17 21:13 수정
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필리핀 독립운동

필리핀 독립운동가인 호세 리살, 마르셀로 필라르, 마리아노 폰세(왼쪽부터).

필리핀 독립운동가인 호세 리살, 마르셀로 필라르, 마리아노 폰세(왼쪽부터).

1899년 7월21일. 무기를 가득 싣고 필리핀으로 향하던 일본의 누노비키마루 배가 상하이 먼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배에 실린 무기는 일본이 동부 유라시아 일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누카이 쓰요시와 미야자키 도텐, 그리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중국의 손문 등의 도움을 얻어 필리핀 정치가 마리아노 폰세가 입수한 것이었다.

1899년 필리핀 독립 혁명정부를 세운 에밀리오 아기날도.

1899년 필리핀 독립 혁명정부를 세운 에밀리오 아기날도.

같은 해 1월 필리핀에는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대통령인 필리핀 공화국이 수립됐다. 이 신생 공화국을 무너뜨리려 한 세력은 에스파냐와 미국이었다. 1565년부터 필리핀에서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을 시작한 에스파냐는 미국-에스파냐 전쟁에서 패하자 1898년에 2000만달러를 받고 필리핀을 미국에 넘겼다. 당초 에스파냐에 대한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아기날도의 필리핀 독립세력은 이에 반발했다. 그리하여 신생 필리핀 공화국은 미국이라는 떠오르는 열강과 전쟁을 벌였고, 거의 20여만명의 사망자를 낸 게릴라전 끝에 결국 항복했다.

당시 일본의 정·관계, 군부, 민간에는 ‘아시아주의자’라 불리는 세력이 존재했다. 서구 세력에 맞서 아시아가 힘을 합쳐야 하고, 그 중심은 일본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깨닫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1884년 10월17일 갑신정변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 등을 후원했다.

일본 국내에서 정부의 탄압 때문에 자유민권운동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일부 아시아주의자들은 조선으로 건너가 개화파를 지원함으로써 일본 국내의 개혁을 촉진하려 했다. 이들은 폭탄을 제조하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1885년에 발각돼 139명이 체포됐다. 오사카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그로부터 14년 뒤에 일어날 누노비키마루 사건과 여러가지 측면에서 닮았다.

1882년, 마르셀로 필라르가 ‘타갈로그 신문’을 창간했다. 1887년에는 호세 리살이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소설을 출간해 서구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신문과 소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저명한 책에서 주장한 국민국가 탄생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 이상으로 흥미로운 저서인 <세 깃발 아래에서 :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에서 호세 리살의 소설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소설가로 전향하여 1887년 <놀리 메 탕헤레>를, 1891년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출판했는데 이 작품들은 아마도 19세기 아시아인에 의해 창작된 유일한 ‘세계적 수준’의 소설들이었을 것이다.”

일본 정치소설 <설중매> 작가인 스에히로 뎃초.

일본 정치소설 <설중매> 작가인 스에히로 뎃초.

리살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1888년에는 도쿄에 머물기도 했다. 리살은 친분을 쌓은 일본인과 함께 서양을 여행하기도 했는데, 그 일본인이 바로 자유민권운동가이자 정치소설 <설중매(雪中梅)>(1886)의 저자 스에히로 뎃초였다. 리살과의 서양 여행에서 돌아온 스에히로는 리살을 모델로 한 일본계 필리핀인 다카야마 다카시를 주인공 삼아, 에스파냐에 대한 필리핀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쓴 정치소설 <남양의 대파란>을 1891년에 출판했다.

<남양의 대파란>은 1614년 일본에서 추방돼 마닐라에 도착했다가 40일 만에 죽은 가톨릭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의 후손이 바로 다카야마 다카시라는 설정이다. 그러한 핏줄을 자각한 다카시가 일본과 협력해 필리핀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성공하고, 필리핀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같은 시기, 조선을 비롯한 동부 유라시아 각지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하던 이른바 ‘대륙 낭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소설로서 흥미롭다.

미국과 필리핀의 전쟁을 그린 그림.

미국과 필리핀의 전쟁을 그린 그림.

이들 대륙 낭인은 조선인, 필리핀인, 만주인, 몽골인 등이 청나라나 에스파냐 같은 강대국의 억압으로부터 자립한다는 것과, “우호적이고 자비로운” 아시아의 대표선수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이 전혀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스에히로 뎃초는 일본 최초의 아시아주의 단체인 흥아회의 간사로서 활동하고, <남양의 대파란>이 간행된 1년 뒤인 1892년에는 조선, 청나라, 연해주를 시찰하기도 했다.

구연학의 신소설 <설중매>(1908)는 스에히로 뎃초의 <설중매>를 번안한 작품이다. 그런 스에히로가 필리핀이 독립하여 일본의 보호국이 된다는 취지의 소설을 써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필리핀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가 미국에 속아서 다시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구연학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과연 얼마나 깊이 알고 있었을까?

[한국이 모르는 일본] (13) 갑신정변처럼…일본인들 강대국 견제하려 필리핀 정치개입

일제강점기 주사위 놀이판 ‘대동아’에 실린 그림. 일본에 의해 미국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마닐라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는 모습.

일제강점기 주사위 놀이판 ‘대동아’에 실린 그림. 일본에 의해 미국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마닐라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는 모습.

역시 <남양의 대파란>이 간행된 1년 뒤인 1892년, 호세 리살은 유럽에서 필리핀으로 귀국했다가 반역죄로 체포됐다. 에스파냐 당국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이 결성한 비밀결사조직 ‘카티푸난’이 1896년 봉기하자 리살이 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같은 해 12월30일 그를 처형했다. 이후 카티푸난 내에서 보니파시오와 아기날도가 주도권 다툼을 벌여 아기날도가 승리하고, 보니파시오가 이에 저항하자 아기날도는 그를 체포해 처형했다.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노선 투쟁이 일어나 상대방을 죽음으로 모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던 일이다.

1897년, 에스파냐에 맞서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했다. 1898년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쿠바 아바나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 침몰하자 미국은 이를 명분 삼아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해 5월, 미국 함대와 함께 홍콩에서 필리핀으로 귀국한 아기날도는 6월12일 필리핀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협력을 얻기 위해 마리아노 폰세를 일본에 파견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두 달 뒤인 8월13일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당초 약속과 달리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았다. 1899년 7월 일본의 재야인사들이 미국에 대한 필리핀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려 했던 누노비키마루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일본이 필리핀 문제에 개입하려 했다며 일본 측에 항의했다. 이에 좌절한 폰세는 9월에 일본을 떠났다. 아기날도도 1901년 3월에 미군에 생포돼 결국 미국의 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날도가 미군에 생포된 1901년, 폰세가 집필한 필리핀 독립운동사 <남양의 풍운>이 일본어로 번역됐다. 1902년에는 폰세와 교류하던 일본 근대 초기의 저명한 소설가 야마다 비묘가 소설 <아기날도-필리핀 독립전쟁 이야기>를 출간했다.

폰세가 무기를 구입할 때 도움을 준 오시카와 마사요시의 아들인 SF작가 오시카와 슌로도 호세 리살이 1896년에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설정의 모험소설 <무협의 일본>을 1902년에 출간했다. 오시카와 마사요시는 1905년경에 활동한 비밀조직 일한동지조합(日韓同志組合)의 대표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야마다 비묘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에 태어나,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1910년에 죽었다. 참으로 기이한 생몰년이다.

1902년, 미군은 필리핀 독립세력을 완전 제압했다. 1902년 5월5일 ‘뉴욕 저널’에는 “10살 넘은 사람은 모두 죽여라-우리가 필리핀을 차지하기 10년 이전에 태어난 것이 그들의 죄다”라는 캡션을 붙인 삽화가 실렸다. 또, 5월22일 ‘라이프’에는 필리핀인을 물고문하는 미군의 뒤에서 유럽 열강들이 “저 경건한 양키들도 이제는 우리한테 돌을 던지지 못할 거야”라고 비웃는 삽화가 실렸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1905년 7월29일에는 미국의 초대 필리핀 지사 윌리엄 태프트가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회담을 열어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승인하는 태프트·가쓰라 협정을 수립했다. 뒤이어 1908년 11월30일에는 루트·다카히라 협정이 체결돼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왕국 병합 및 필리핀 관리권을 승인하고,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만주 남부를 지배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조선은 멸망했다.

1941년 12월8일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1942년 5월7일 미군이 항복을 선언하자 필리핀 내각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일본은 군정 통치를 거친 뒤 1943년 10월14일에 호세 라우렐의 필리핀 제2공화국을 수립시켰다. 형식적으로나마 일본군에 의한 통치가 끝난 것이다. ‘대동아’ 게임판의 필리핀 부분은 일본에 의해 미국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마닐라 시민들이 환호한다는 프로파간다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인 1941년 12월 필리핀에 있던 미군을 몰아내고 형식적이나마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을 독립시켜 필리핀 정부를 구성토록 하기도 했다. 오늘날 일본의 침략과 점령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반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후 일본이 필리핀에 막대한 공적개발원조를 제공하면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박정현·김동엽·리노 바론의 <한국-필리핀 교류사>) 필리핀인이 한반도 주민들만큼 일본의 식민통치를 증오하지 않는다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현대 한국 시민들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인용문이 낯설게 느껴질 터이다. 그러나, 이는 불편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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