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이 낳은 ‘홧김에 폭력’, 정신질환보다 사회적 질환

2017.09.01 21:15 입력 2017.09.01 21:19 수정
김경옥 프로파일러

분노조절장애

[프로파일러 김경옥의 범죄 앤 더 시티]피해의식이 낳은 ‘홧김에 폭력’, 정신질환보다 사회적 질환

이른 아침 지하철을 탔을 때의 일이다. 노곤함에 눈을 감고 부족한 잠을 채우며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누군가 통화를 하나 싶었는데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화를 내며 말하는 모양새였다. 조용한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에 다소 불쾌해져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본 순간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지고 행색이 초라한 한 할머니가 대뜸 ‘웃어, 이 년이 웃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부으며 한 여자 승객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당장이라도 자리에 앉아있던 여성을 때릴 듯이 손을 휘둘렀다. 앞에 서 있던 남성이 할머니를 잡으며 간신히 말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있던 여성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할머니의 주먹질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상황을 보니,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할머니는 여성의 건너편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시비가 일어날 일도 없었다. 화풀이당한 사람도 주변 사람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황을 미루어 추정컨대, 마주 보는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의 위치상 눈이 마주쳤을 수 있다. 혹은 행색이 초라한 할머니를 여성이 흘끔 쳐다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할머니의 분노는 과도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가 없었다면 폭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할머니를 화나게 했을까. 작은 자극에도 과도한 분노를 표출하거나, 혹은 적대적인 단서를 포함하지 않은 자극들을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받아들이고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이러한 현상들은 분노 조절의 문제일까 아니면 좀 더 심각한 정신질환의 결과일까. 단순히 한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로 치부해야 할지 아니면 사회적인 현상으로 간주해야 할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최근 ‘분노 범죄’라는 말이 언론에 종종 다루어진다. 개인의 분노 조절이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에 의하면 해마다 ‘분노조절장애’를 진단받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현상을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맡겨두기보다는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여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늦은 밤 인적이 없는 거리. 두 청년이 골목길의 반대 방향에서 각자 걸어오고 있었다. 한 청년은 술에 취한 듯 걸음걸이가 꽤 비틀거렸다. 두 청년이 가로등 밑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아주 잠깐 말을 주고받은 것 같다. 순간 한 청년의 발이 술에 취한 청년의 머리를 강타했다. 발에 맞은 청년은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다음 날, 머리를 때렸던 청년이 현장에 다시 돌아왔다. 주변을 기웃거리던 그는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한 듯 유유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가 현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 이미 피해자는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진 뒤였다. 경찰은 수사 중 가로등에 설치되어 있던 폐쇄회로(CC)TV를 발견하였다. CCTV에는 그날 밤의 일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하지만 CCTV만으로 알 수 없는 진실이 여전히 남아있다.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설사 두 사람 간에 시비가 발생했다 해도 피해자가 사망할 이유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분노 또한 이해할 수 없고 과도하다.

우발적인 시비로 싸움이 나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단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기분이 나빠 사람을 살해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건의 가해자에게 분노 조절의 문제가 있을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주된 증상이기 때문이다. 분노 조절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 것은 폭력 행동을 수반하여 범죄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하철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할머니의 분노도 단지 분노 조절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경우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가 더 있을 것 같다. 분노의 이면에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피해의식이 강하면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항상 남과 나를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의도와 행동을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누구나 회사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만 따돌린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피해의식의 시작일 수 있다. 단지 한때의 생각으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따돌리는 증거를 찾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면 ‘피해망상’으로 심화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고 그 눈빛을 모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타인의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맞은 편 여성의 눈빛이나 표정을 보고 자신을 무시하고 비아냥거린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면 간혹 혼자 중얼중얼하는 사람, 혼자 화를 내며 의자를 발로 탁탁 치는 사람,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지하철 안을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신질환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정신질환은 그 범주와 원인, 그리고 증상의 수준도 매우 다양해서 이러한 행동들을 단순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행동이 기괴하고 눈에 띄어 이목을 끌기는 하지만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듯이 이들의 행동도 정신질환의 증상에 불과하다고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간혹 할머니처럼 타인에게 위협이 되는 행동들은 범죄로 이어지고 누구나 그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과의 조우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의도치 않게 이유 없는 분노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이성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말을 하든지 적대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같이 흥분하여 말싸움을 이어나가는 것은 상대를 더 분노케 하여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도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스스로 흥분하거나 당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상황은 혼자 해결하기 어려우므로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경우 누군가 쉽게 나서지 못할 수 있으므로 특정 사람을 지목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피해망상적이거나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한 내용들이 나타난다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상대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편, 평소 쉽게 분노하는 성향이라면 내가 다른 사람들의 태도나 반응을 너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다른 사람의 분노를 보며 나는 나의 분노를 잘 간수하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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