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아이 낳는 기계가 아니다

2024.06.03 14:27 입력 2024.06.03 17:11 수정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12월 ‘여성의 몸, 그리고 저출산’이라는 칼럼을 썼다. 당시 두 대학에서 열린 ‘저출산 극복을 위한 생식(生殖)건강 증진대회’와 ‘행복한 출산, 부강한 미래’란 행사를 비판적으로 다뤘다. 저출산 문제는 여성의 선택을 압박하거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썼다. 여성권한척도가 높은 양성평등 사회일수록 출산율이 안정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당시 합계출산율(2009년)은 1.15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꿈 같은’ 수준이다. 통계청은 올해 합계출산율이 0.68명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15년 사이 거의 반토막이 난 셈이다. 왜?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서다. 여성이 결혼·출산을 꺼리는 이유는 듣지 않으면서, 책임만 여성에게 미뤄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조세연)의 연구자가 저출생 해결을 위해 ‘여성을 1년 조기 입학시키자’고 해 논란이 됐다. 조세연이 펴내는 <재정포럼> 5월호에 실린 ‘생산가능인구 비중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정책 방향에 대한 제언’에서다. 보고서는 저출생 문제의 핵심을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압축하고 출산 관련 의사결정 단계별로 정책을 제언했다.

이 중 ‘교제 성공 지원 정책’ 항목에 “남성의 발달 정도가 여성의 발달 정도보다 느리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들은 1년 조기 입학시키는 것도 향후 적령기 남녀가 서로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발달이 빠른 여아가 또래를 이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연하녀·연상남 조합을 만들어주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5세녀와 6세남이 함께 학교 다니는 게, 성인이 된 후 교제 성공률과 무슨 관계가 있나. 조혼(早婚)이라도 부활시키자는 건가.

아동 발달 과정에서 취학은 통과의례에 그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학교생활을 시작하는가는 아동의 지적·정신적·신체적 성장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윤석열 정부가 ‘취학연령 5세 하향’ 방침을 밝혔다가 거센 반발에 직면해 교육부 장관을 경질해야 했던 것도 그래서다.

취학연령까지 낮춰가며 다섯 살 아이를 국가 인구정책의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발상이 두렵다. 조세연은 “필자 개인 의견”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연구원 공식 간행물에 이런 글이 실린 경위는 파악해야 할 것이다.

세종시 소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세종시 소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돌이켜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지난 10여년 간 보수·리버럴 정권을 불문하고 여성을 도구화하는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때인 2016년 12월 행정자치부는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공개했다. 시·군·구별로 20~44세 가임기 여성 수를 써넣은 지도는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2017년에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여성들의 불필요한 ‘고스펙’을 줄여 초혼 연령을 앞당기고 배우자 눈높이를 낮추자는 취지의 보고서를 공개해 논란을 빚었다.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8년엔 보사연의 ‘전국 출산력 조사’가 조사 대상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부재 중인 여성 집 문앞에 ‘1968~1998년(생) 해당자입니다’라는 메모를 붙였기 때문이다. 범죄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비판이 나왔다. 2020년 국토교통부는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신혼부부 가구를 “혼인한 지 7년 이하이면서, 여성 배우자 연령이 만 49세 이하인 가구”라고 정의했다. 여성 연령만 제한해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인간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자체로 존엄하다. 아무리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라도 수단이나 도구는 될 수 없다. 인간이 수단·도구화된 세상에서 아이를 낳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 아이가 대를 이어 수단·도구로 전락할 텐데. 인간의 존엄을 전제하지 않는 저출생 대책은 모두 실패한다.

15년째 같은 이야기를 써야 하는 처지가 난감하고 민망하다. ‘동어반복’은 듣는 이에게는 물론 말하는 이에게도 고통이다. 그래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 여성들이 왜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지 궁금한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23 한국의 성인지 통계> 로 짚어드리겠다.

한국 여성의 고용률은 25~29세 73.9%로 생애 최고에 이르지만, 30세가 넘어서면 하락해 35~39세엔 60.5%로 뚝 떨어진다. 같은 시기 남성 고용률은 91.2%다.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육아휴직제도 이용자(2021년 신규수급자) 중 남성은 4분의1(26.3%)에 불과하고,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 사용자(2022년) 중 여성은 90.6%에 이른다. ‘독박 육아’의 현실이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31.2%(2022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압도적 1위다. 남녀간 임금 격차가 30%를 넘는 나라는 한국 외에 없다. 한국 여성의 45.1%가 범죄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남성은 33.0%이다.

종합 점수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젠더격차지수에서 한국 순위는 146개국 중 105위(2023년)다. 이코노미스트가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평가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12년 연속 꼴찌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공직자와 정책 연구자들에게 부탁한다. 출산이든 육아든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는 일이다. 저출생 정책을 내놓는다며 여성만 호출하지 말라. 여성은 오로지 아이를 낳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여러분이 ‘뻘짓’을 하면 할수록 국가소멸은 앞당겨진다.

여성의 몸 대신, 여성의 꿈과 일과 삶에 관심을 가져달라. 여성이 마음껏 꿈을 꾸고, 일에서 보람을 얻고, 삶에서 안전과 행복을 누릴 때 아이도 낳고 싶어진다는 걸 왜 모르나. 이해가 안 가면, 그냥 외우시라.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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