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만다 녹스… 설령 직접 찌르고 불 지르진 않았대도 그녀가 죽는 걸 방치한 건 룸메이트다

2017.12.01 17:40 입력 2017.12.01 17:52 수정
도진기 변호사

평행이론 - 한국의 아만다 녹스

넷플릭스 다큐 <아만다 녹스>의 한 장면.

넷플릭스 다큐 <아만다 녹스>의 한 장면.

한때 살인범으로 28년형을 받았던 미국인 아만다 녹스는 지금 세계적인 유명인물이다. 넷플릭스에 그녀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될 만큼이다. 2007년 이탈리아에서 유학 중이던 녹스는 돌연 체포됐다. 집단섹스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영국 출신 룸메이트 메러디스 커처를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혐의였다. 커처의 브래지어 끈과 살해 무기로 추정되는 흉기 손잡이에서 녹스의 DNA가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엽기성과 다국적성, 녹스의 미모가 겹쳐져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녹스는 1심 재판에서 징역 26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파견한 법의학 전문의가 이탈리아 경찰이 발표한 DNA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했고, 녹스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런데 대법원이 파기환송했고 고등법원은 녹스에게 다시 28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이번에는 하급심의 유죄 판결을 모두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장장 9년간의 재판은 마침표를 찍었다. 녹스는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마녀로 비난을 받았지만 미국에선 셀럽이 되었다. 남자친구와 약혼하고, 400만달러의 자서전 출판계약을 했으며, 프리랜서 기자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2011년 서울 역삼동의 한 원룸 1층에서 화재가 났다. 자욱한 연기 안에 입주민 정현아(가명)가 쓰러져 있었는데 목이 두 군데 흉기에 찔린 채였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16일 만에 숨졌다. 룸메이트 박가영(가명)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 흉기로 피해자의 목을 찔렀고, 라이터 기름통과 시너를 주문해 불을 지른 다음 현장을 떠났다는 혐의였다. 박가영은 법정에서 ‘피해자가 자신에게 4700만원의 빚을 졌고, 이를 갚기 힘들 것 같자 흉기를 들고 자해하려 했고, 자신이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목 부위가 흉기에 찔리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불을 지른 사람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박가영을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동기는 시샘과 증오라고 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두 여성은 유흥업소에 다녔는데 피해자는 평소 대인관계가 좋고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아 박가영이 부러워했고, 반면 피해자는 남자관계가 복잡한 박가영을 못마땅하게 여겨 갈등이 쌓여갔다. 사건 전에 이상 징후들이 있었는데, 1심은 이를 박가영의 짓으로 보았다. 피해자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멀쩡하던 강아지가 갑자기 눈이 풀리고 침을 흘리면서 숨을 쉬지 못했다. 박가영에게 물어보니 “난 몰라, 이불 속에서 잘 놀던데”라고만 답했다. 결국 피해자는 울며 강아지를 안락사시켜야 했다. 하루는 박가영이 음료수를 건네주어 피해자가 마셨는데 눈이 풀리고 충혈된 채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같이 살던 피해자의 동생 정은비(가명)가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박가영이 말렸다. 자신이 의심받게 되자 같은 음료수를 사서는 한 모금 마시고서 방바닥을 엉금엉금 기었고, 화장실로 들어가 구역질한 뒤 어지럽다며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 원룸에서 한 달간 같이 살던 피해자의 친구 한서영(가명)은 군산으로 내려갔다가 피해자로부터 “앞으로 연락하지 말자. 남은 짐은 박가영한테 말해서 가져가라”는 절교 문자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서영이 놀라 전화를 했지만 피해자는 받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메시지는 피해자가 보낸 게 아니었다. 박가영으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사건이 있던 날 아침, 피해자는 박가영의 휴대전화에서 우연히 자신의 주민등록증 사진이 저장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 둘은 다투게 된다. 피해자는 오후에 병원에 들러 치료를 받았는데, 멀쩡한 모습이 목격된 마지막이었다. 이웃 주민이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 여자의 비명소리를 3회 들었다. 판결문은 이때 피해자가 흉기에 찔렸을 것으로 추측했다.

밤 8시경, 피해자 동생은 ‘중요한 손님이 오니 밖에서 자고 오라’는 언니의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 있는 일이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그러겠다고 답장했다. 피해자 친구인 안지희(가명)는 자정 무렵 피해자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고 40분가량 문자로 대화를 나누었다. 룸메이트 박가영한테 5000만원의 빚을 졌다는 얘기여서 안지희는 깜짝 놀랐다. 안지희가 전화를 걸었지만 피해자는 받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박가영은 심부름센터에 전화를 걸어 거즈와 택배 상자를 주문했다. 한편 인근 편의점에 피해자의 휴대전화로 라이터 기름통을 배달해달라는 전화가 걸려왔고, 배달된 라이터는 박가영이 수령했다. 박가영은 새벽 6시 보험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피해자 명의로 회원가입을 하고서 보험내역을 확인했다. 이어 아침 9시경 근처에 있는 세탁소에 전화를 걸어 피가 묻은 베갯잇과 이불의 세탁을 의뢰했고, 세탁소 주인은 빌라로 와서 박가영한테서 이불을 받아갔다. 박가영은 콜기사 이영준(가명)에게 전화해 대전까지 운행을 부탁했고, 이영준이 집으로 와 짐을 실어날랐다. 이때 피해자는 매트리스 위에 얼굴까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는 게 이영준의 증언이다. 아침 10시경 피해자의 지인인 콜기사 하일권(가명)은 피해자 번호로 전화를 받았는데 시너를 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일권이 시너를 구해 빌라 앞으로 가져다주었는데, 박가영이 나와 “정현아가 샤워 중이어서 대신 나왔다”고 말하며 받아갔다. 11시20분에는 피해자 동생 정은비에게 피해자 번호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는데, “박가영이 서류를 들고 갈 테니 사인 좀 해줘”라는 내용이었다.

오전 11시30분 박가영은 빌라에서 30m 떨어진 곳에 콜기사 이영준을 대기시켰고, 차량에 올랐다. 빌라를 지나면서 박가영은 “정현아가 시너를 들고 뿌리길래 말리고 나왔다. 정현아가 자신한테 빌린 돈이 있는데 지금 차용증을 받았다. 동생한테 보증인 지장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빌라에서 연기가 나는 걸 봤지만 박가영은 차를 그냥 출발시켰다. 200m쯤 가다가 다시 현장으로 되돌아왔는데, 이때 연기가 많이 나고, 주민이 몇 명 나와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원룸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현관 입구에서 라이터가 발견되었다. 방 안 매트리스의 머리 부분이 연소되어 있었다(감식 결과 이 부위에서 인화성 물질이 검출되었고, 여기에 불을 붙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바닥 장판에는 그을음에 찍힌 발자국이 있었는데 박가영의 것이었다. 피해자는 욕실 바닥에 머리를 문 쪽으로, 발을 안쪽으로 두고 쓰러져 있었다. 목 두 곳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였다. 피해자 몸에 그을음이 내려앉아 있었고, 몸으로 덮은 바닥에는 그을음이 없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무언가에 묶였던 흔적이 있었다. 피해자는 응급실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은 없었다. 혈액에서 프로사이클리딘과 클로르페니라민이 검출되었는데, 구토 증상과 졸음을 유발하는 성분이었다. 피해자는 16일 만에 사망했다.

1심이 박가영을 범인으로 본 근거는 이렇다. 우선 4700만원의 빚부터가 사실이 아니라고 봤다. 늘 솔직하게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피해자가 주변에 단 한 번도 이 채무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 박가영이 다른 친구에게 900만원을 빌려줄 때는 차용증에 인감증명서까지 받았으면서 이것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증서도 받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이유였다. 또, 피해자는 수입이 넉넉했던 반면 박가영은 생활보호대상자였고 당시 일을 그만두어 소득이 없는 상태였다. 동생을 아꼈던 피해자가 동생을 채무의 연대보증인으로 올린 후 자살하려 했다는 것에도 납득을 하지 못했다. 또, 박가영이 컴퓨터로 ‘각성제, 에탄올, 클로로포름, 복어알’ 같은 단어를 검색했고, 피해자의 혈액에서 졸음을 유발하는 약물이 검출되었으며, 피해자는 화상환자임에도 연기 흡입보다는 쇼크나 약물 증상이 나타났다는 의사의 증언, 박가영의 진술이 계속 번복된 점 등을 들어 박가영이 피해자에게 약물을 먹인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자해하는 걸 말리려다 흉기에 찔렸다는 주장도 믿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자해의 경우에 동반되는 주저흔이 없었고, 박가영에게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는 이유였다.

의사는 이 정도의 목 상처면 치명적이며 일상생활이나 말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말을 하고 음료수를 마셨다는 박가영의 말은 믿기 힘들었다. 목을 찔린 피해자가 그 상태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뜬금없이 친구 안지희한테 연락해 박가영의 채무 이야기를 하며 태평하게 40분이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점도 괴이하며, 그 메시지에도 평소 안 쓰던 어투나 이모티콘이 사용되었다. 피해자는 아침에 이미 안지희에게 박가영이 자신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저장해놓은 것에 화가 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메시지에서는 “박가영 휴대폰에 내 신분증 사진이 있길래”라고 마치 처음 말하는 것처럼 표현한 점도 이상하다고 보았다. 또, 피해자는 목이 찔려 매트리스에 겨우 누워 있는 정도였다고 했는데, 라이터 기름통과 시너를 배달 주문하고, 박가영한테 머리를 감겨달라 하는가 하면, 동생한테 서류에 사인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것도 믿기 힘들다고 했다. 결국 그 모든 행동을 한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박가영이라고 보았다(목에 구멍이 난 피해자가 이런 행동들을 했다면 믿기 힘든 수준을 넘어서 거의 오싹한 기분이 든다).

마지막 순간도 그렇다. 피해자가 누워 있던 매트리스 위에서 발화되었는데, 피해자는 그곳에서 떨어진 욕실에 쓰러져 있었고, 몸 아래에는 그을음이 없었다. 그렇다면 치명상을 입은 피해자가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불이 타오르기 전에 라이터를 현관에 던져놓고 욕실로 들어가 누웠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피해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자 박가영은 한숨을 쉬며 “살아 있을 줄이야…”라고 했다.

박가영은 항소했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났다. 재판부는 1심과 의견이 달랐다. 피해자가 박가영한테 4700만원의 빚을 졌을 수도 있고, 그 이유로 자해하다가 흉기에 찔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그 상처가 크지 않았을 수도 있고, 따라서 그날 밤 있었던 행동들을 피해자가 했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시너와 라이터 기름통을 주문한 사람이 피해자일 수도 있고 피해자가 불을 질렀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이유는 길지만 요약하면, 피해자의 자해와 방화가 사건의 진상이라는 박가영의 해명이 성립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는 게 되겠다. 박가영이 범인이라는 점에 ‘합리적 의심’이 드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가영을 무죄로 선언했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유지되었다.

이로써 사건은 미궁으로 떨어졌고, 콜드케이스가 한 건 늘었다. 앞에서 아만다 녹스 사건과 유사하다는 말을 했는데, 역시나 여지없이 한국의 아만다 녹스 사건으로 부르는 이들이 나왔다.

이 판결의 정당성에 관해서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대로 소개했다. 담당 법관이 유죄로 하기에 충분한 믿음이 안 생긴다는데, 믿으라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다. 판사는 두꺼운 수사기록을 읽고 생생한 증언을 들은 사람이다. 그래도 확신을 못 가졌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소설적인 생각이 든다. 박가영은 피해자를 흉기로 찌르고 방화했다는 사실로는 무죄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를 무죄로 한 판결에 의하더라도 피해자의 죽음에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자해하고 방화를 해 빈사 상태인 피해자를 그대로 두고 집을 떠남’으로써 죽음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건 유기치사죄에 해당한다. 박가영을 유기치사로 다시 기소하면 어떨까. 일사부재리에 위반될 것 같기는 하다. 살인과 유기치사의 죄명은 다르지만, 법률상 ‘같은 사건’으로 평가받아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인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에 방화살인과 유기치사는 범행시간이 달라지고, 행위의 모습이 다르며, 범의, 죄질, 처벌의 필요성에 차이가 난다. 그러니 둘을 다른 사건으로 볼 여지도 전혀 없지는 않다. 수사기관, 소추기관은 최종 심판자가 아니다. 법원에서 기각될 위험이 있다고 해도 시민의 법감정이 요구한다면 해볼 가치는 있는 게 아닐까. 그저 과거의 일로 치부하기엔 피해자의 죽음이 너무 애석해 보인다.

▶필자 도진기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한국의 아만다 녹스… 설령 직접 찌르고 불 지르진 않았대도 그녀가 죽는 걸 방치한 건 룸메이트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8년 동안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면서 10여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공직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작품으로는 <정신자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순서의 문제> <모래 바람> 등이 있고, 2014년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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