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사람을 안 돕고 지나쳐서 생긴 일, 누구의 책임인가

2018.04.08 20:51 입력 2018.04.08 20:52 수정

‘착한 사마리아인 법’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은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행 법은 형사처벌이 어렵다고 보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강제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법’은 국내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린아이가 벤치 위에 잠들어 있는 노숙인의 모금함 통에 돈을 넣고 있는 모습이다.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은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행 법은 형사처벌이 어렵다고 보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강제하는 ‘착한 사마리아인법’은 국내에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린아이가 벤치 위에 잠들어 있는 노숙인의 모금함 통에 돈을 넣고 있는 모습이다.

체감 영하 10도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취 상태의 노숙인이 쓰러졌다

공익요원은 서울역 직원의 지시로

노숙인을 서울역 밖으로 옮겼다

숨진 채로 발견된 노숙인 사인은

동사가 아닌 흉부 고도손상이었고

두 사람은 유기죄로 기소됐다

법원은 이 행동이 도덕 위반일 뿐

법 위반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우린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없고

보호할 ‘의무’ 있어야 유기죄니까

남을 돕는 건 좋은 일이다. 돕지 않는다면 그저 그럴 뿐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남이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다면 어떨까. 이런 때까지 나몰라라 돕지 않는다면 나빠 보인다. 그렇다면, 돕지 않은 이 ‘나쁜 행동’을 법으로 처벌까지 하는 건 어떨까. ‘나쁜 행동’과 ‘범죄’ 사이. 여기 그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0년 1월15일 오전 7시30분 서울역 대합실, 체감온도 영하 10도의 추위 속에 노숙인이 만취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순찰을 돌던 서울역 직원 이대성(가명)은 동행했던 공익근무요원에게 “노숙인을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공익근무요원은 노숙인 뒤에서 양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일으켜 붙잡고 그곳에서 20m 떨어진 대합실 2번 출구 앞으로 데리고 가 대리석 바닥에 놓아두었다. 잠시 후 또 다른 공익근무요원 송기원(가명)이 ‘2번 출구 앞에 노숙인이 쓰러져 있으니 확인하라’는 무전을 받게 된다. 송기원이 가보니, 노숙인이 만취해서 바지가 엉덩이까지 내려간 채로 움직이지 못하였고 의사표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노숙인을 일으켜 휠체어에 태우고 장애인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옆 구석진 곳에 내려놓으려 했다. 마침 그때 청소 중이던 아주머니가 거기에 놓으면 안된다고 하여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가 광장 중앙계단 기둥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비원이 거기 내놓으면 얼어죽을 수 있으니 다른 데로 옮기라고 말했고, 송기원은 다시 노숙인을 휠체어에 태운 다음 서울역 1층 광장 중앙계단에서 약 200m 떨어진 구름다리(과선교) 아래에 옮겨놓았다. 그날 낮 12시에 노숙인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부검결과 혈중알코올농도가 0.157%인 만취상태였는데, 사인은 동사가 아니라 흉부의 고도손상(갈비뼈의 다발성 골절, 오른쪽 폐 파열)이었다. 결국 노숙인은 제때 부상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것이었다.

검찰은 서울역 직원 이대성과 공익요원 송기원 두 사람을 유기죄로 기소했다. 유기죄는 “질병 등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호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가 유기한” 죄다.

판결결과는 무죄였다. 재판의 쟁점은 서두에서 언급한 그것이었다.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은 사람을 법으로 처벌할 것인가, 말 것인가. 법원은 부정했다. 병자를 돕지 않은 이들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형법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도덕 위반이지 법 위반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 형법상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지 않았을 때 처벌하는 소위 ‘착한 사마리아인법’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성경 속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길에 강도를 만나 큰 상처를 입고 길에 버려졌다. 모두 모른 척 지나쳤는데, 당시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 지나다가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남을 도우는 좋은 사람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건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법으로 옮겨오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인을 돕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착한 사마리아인법’이라고 한다. 이런 법을 두는지 여부는 그 나라의 입법정책에 달려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등에는 있다. 반면 개인주의적 성격이 짙은 미국, 영국에는 없다. 우리나라에도 없다. 그래서 이번 사건에서 무죄를 받은 것이다.

앞서 말한 ‘유기죄’가 비슷한 거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유기죄는 범죄 주체에 제한이 있다. 병자를 보호할 법률상 혹은 계약상 책임이 있는 사람이 유기한(내버려 둔)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돼 있다. 다시 말하면 ‘의무 있는 자’가 ‘내팽개친’ 죄다. 예를 들면 노부모를 부양하는 자녀, 환자를 돌보는 의료인,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승객을 태우고 가는 배의 선장 등이다. ‘지나가던 낯선 사람’은 의무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대로 지나갔다고 해서 죄는 안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역무원이면 공무원 아닌가. 공공의 복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데, 노숙인을 도울 법적 의무가 있는 거 아닌가. 검찰도 이런 논리로 그들에게 긴급구호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공무원이라고 해서 모든 공공업무를 관장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교통사고 운전자가 있다고 하자, 경찰관이 이를 발견했으면 법률상 보호의무가 있다. 하지만 세무공무원이 이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런 의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서울역 직원이나 공익요원은 노숙인을 보호할 법률상 의무가 없었기에 유기죄도 성립하지 않는다. 해당 서울역 직원은 공익요원을 지도 감독하는 업무를 담당했고, 주목적은 철도안전이었다. 역에서 노숙행위는 금지돼 있고, 철도안전법상 철도 직원은 노숙인 등을 밖으로 퇴거시킬 수 있다고 정해져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유기죄의 핵심은 ‘법률상 혹은 계약상 돌볼 책임’이다. 얼마 전 있었던 다른 사건 또한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택시기사가 손님을 태우고 운전하다가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졌다. 그런데 승객들은 비행기를 타야 한다면서 기사를 내버려두고 119에 연락을 해주지도 않은 채 트렁크에서 골프백을 챙겨 공항으로 떠나버렸다. 결국 택시기사는 제때에 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승객들에게 도덕적 비난이 높았지만, 이들 역시 유기죄 처벌은 받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심장마비가 죽였지, 승객들이 죽이지 않았다. 승객이 택시기사를 보호할 법률상 책임 있는 사람은 아니고, 택시기사를 돌봐야 할 계약상 의무가 인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오히려 거꾸로라고 할 수 있다. 택시기사가 승객을 돌봐야 할 계약상 의무를 지는 쪽이다).

여기서 다시 근원적인 물음으로 돌아간다. 우리나라에는 왜 ‘착한 사마리아인법’이 없는 것일까. 도덕과 법의 경계가 흐릿하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세한 우리나라 사회이고 보면 이 부분 도덕적 영역을 치즈 자르듯 법에서 깨끗하게 잘라 내 처벌 외로 두는 건 다소 의외의 입법정책이라고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연유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형법을 적용했는데, 이때는 ‘착한 사마리아인법’이 있었다. 그러다 1953년 우리 고유의 형법이 제정될 때 사라졌다.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바가 컸다. 그 무렵은 6·25 전쟁으로 극심한 사회적·경제적 궁핍상태였고, 아사자와 병자가 속출하던 때였다. 자기 한 목숨 살기도 급급한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범죄시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었다.

지금은 다른 이유인 것 같다. 일단 도와주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려 해도 그 범위 특정에 애로점이 있다. 누군가 크게 다쳐 거리에 버려졌다고 치자. 그것을 보고 지나친 사람들을 처벌하려 들 때 어디까지 포함시킬 건지 난점이 있다. 주변에 있던 이들 중 어느 범위까지, 어느 정도 거리에 있던 사람까지 처벌할 것인가. 더 근본적으로는 시민의 정서다. ‘난 해를 끼치지 않았다. 내 인생 열심히 살고 내 길을 갔다. 그가 위험에 빠진 건 안된 일이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었나. 왜 내가 처벌까지 받아야 하는가.’ 도덕과 법의 경계선상에 있는 모호한 문제다. 절도, 폭행처럼 남한테 해를 입힌 정통 범죄가 아니다. 그저 도와주지 않은 잘못인데, 이걸 처벌하려면 국민적 합의나 공감대가 필요하다. 거기에 도달해 있진 않은 것 같다.

근엄하게 당위만 내세우기도 힘들다. 중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2006년 난징(南京)에서 발생한 이른바 ‘펑위(彭宇) 사건’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인파에 밀려 한 할머니가 넘어졌다. 사람들 발에 밟히고 다쳤다. 다 그냥 지나쳤는데, 당시 일용직 노동자이던 펑위가 나서서 할머니를 구해내고 할머니를 부축해 병원까지 모셔다 드렸다. 그런데 오히려 할머니 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섰다. 다른 행인들은 다 사라지고 없으니 펑위를 걸고 넘어진 것이었다(사건 직후엔 할머니가 고맙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는데도). 법원은 펑위에게 할머니 치료비의 40%인 4만위안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했다. 이 사건이 보도된 후 판결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남의 일에 괜히 나서지 말라’는 풍조가 중국에 널리 퍼졌다(보다 못한 중국 정부는 곤경에 처한 이를 도우려다 뜻하지 않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더라도 민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도록 하는 법을 얼마 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런 사례를 보면 또 무작정 남을 도와라 하고 법으로 선뜻 강요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형법상 범죄는 안된다 하더라도 노숙인의 죽음은 참으로 딱하다. 서울역 직원이 그를 밖으로 내보내기 15분 전에 누군가가 신고를 해서 112 경찰관과 119 구급대원이 왔었다. 이땐 생체리듬이 정상이었고, 노숙인은 괜찮다는 의사표시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상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그런데 그를 밖으로 내다 버림으로써 사망한 것이다.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 그래서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무죄를 선고하지만 도덕적인 비난은 면치 못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이례적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법은 ‘바람직한 인간’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을 가정해야 한다. 남을 돕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곧장 범죄인 취급하는 건 성급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남을 돕는 일에 이익이 있는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남을 도왔다가 오히려 해를 입지는 않을까. 번거로운 일에 말려들지는 않을까. 하다못해 고맙다는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돕지 않은 사람에 대한 처벌은 천천히 논의하더라도 우선은 남을 도운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말아야겠다.

■필자 도진기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위태로운 사람을 안 돕고 지나쳐서 생긴 일, 누구의 책임인가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8년 동안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면서 10여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공직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작품으로는 <정신자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순서의 문제> <모래 바람> 등이 있고, 2014년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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