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진상규명조사위 잘 마무리하려면
5·18 조사위 국힘 추천 위원 3명
“국군에 성폭력 가해자 낙인”
100페이지 소수의견 작성
전문가 “피해자 중심 원칙 흔들어”
내달 26일 5.18 조사위 활동 종료
남성 피해자 등 이야기도 들어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의 조사 기한이 막바지에 다다른 지난해 9월, 피해자 A씨는 1980년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 등에게 연행된 후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털어놨다. 상무대로 끌려간 뒤 폭압적인 조사를 받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나오려는 순간 한 병사가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자신을 강간했다는 것이다.
40년이 훌쩍 지난 일에 대한 진술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화장실에 둘이 있을 때 벌어진 데다가, 너무 오래 전이라 다른 증거가 없었다. 이에 조사위는 A씨의 진술 중에서 번복되거나 바뀌지 않는 ‘핵심 진술’과 신체 깊숙이 각인된 소리, 냄새 등 ‘감각 기억’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활용했다. 이 분석을 통해 A씨 피해가 ‘강간’과 ‘성고문’, ‘성적 모욕 및 학대’에 해당한다고 봤고, 지난해 12월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조사위 내 ‘소수의견’이다. 조사위원 총 9명 중 국민의힘 추천 위원인 이종협·이동욱·차기환 위원은 약 1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소수의견을 작성하고, 전체 조사 보고서가 공개되기 전에 관련 보도자료를 별도로 배포했다. 소수의견의 요점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추정만으로 대한민국 국군을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히게 하는 보고서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사위는 다수결로 총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는데, 소수의견을 낸 위원들은 A씨 사건을 포함한 8건에 대해 반대했다.
‘구체적 증거’ 강조하는 소수의견…
해외선 “증언에 대해선 확증 필요 없어”
A씨 사례에 대해 위원 3명은 “피해자 본인 진술만 있고 사건 현장 목격자나 피해 내용을 알고 있는 참고인이 전혀 없는 등 사실을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이들은 ‘구체적인 증거’를 강조하며 “계엄군에게 스스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입증 책임을 부여하고, 입증하지 못할 경우 계엄군을 성폭력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하는 것은 형사사법 절차상 범죄 입증 책임과도 맞지 않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 소수의견이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라는 조사위의 원칙부터 뒤흔들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본다. 이재일 전 국회입법조사처 성폭력 전담 조사관은 “성범죄 특성상 범죄가 가해자와 피해자만 존재하는 곳에서 발생해 목격자 등이 없고, 피해자 진술 이외에 객관적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이를 위해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5·18 성폭력 피해는 40여년이 지나 현재 사건보다도 조사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조사하기 어렵다는 말이 곧 피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한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낙인은 피해자가 수십년간 침묵할 수밖에 없게 했다. A씨의 경우 1998년 보상 신청과 2020년 조사 과정에서도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신혼 초 자꾸 악몽을 꾸자 남편이 이유를 물어봐서 처음 피해 사실에 대해 꺼냈지만 결혼 생활 내내 그 사실이 약점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조사위에 “너무 후회스러워 다시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 사실에 대해 꺼낼 수 있었던 이유를 ‘답을 끌어내준 질문’에서 찾았다. “원래 조사에선 ‘심한 욕설을 듣고 엉덩이, 종아리, 가슴을 걷어차여 수치심이 들었다’ 정도로 말했는데, 뭔가 더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사위에서 얘기를 잘 끌어내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외국의 과거사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화위) 사례들은 피해자 중심적으로 접근하고, 이들의 진술을 청취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샤프빌 대학살’이 발생한 1960년부터 1994년까지의 인권 침해 사실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성 피해자들이 사회적 낙인과 불이익을 우려해 제대로 진술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여성단체들은 여성위원 앞에서 비공개로 여성 특별 청문회를 열거나 젠더 감수성에 기초한 조사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고 진화위는 이 내용을 반영했다.
국제 형사재판인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역시 국가폭력 안에서의 성폭력 범죄에서는 “피해자 증언에 대해서는 확증이나 보완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는 증거 규칙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 진술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신빙성을 요구하면서 피해 자체를 부정해 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조사위는 ‘진상규명’ 목적…
‘사건 진위’보다 ‘피해 양상’ 살펴야
동티모르 등 해외 국가폭력 진화위
‘확증 불필요’ 등 별도 규정 만들어
보고서에 구체적 해결방안 제시도
조사위는 행정 기구다. 새로운 사실을 밝히거나 특정 가해자를 처벌하는 형사 재판이 아니다. 침묵된 사실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조사위는 출범하며 ‘단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도록 진상조사를 추진한다’, ‘사건 후 피해자와 가족이 겪은 신체적·정신적·사회관계적 2차 피해 실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치유와 명예 회복을 위한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를 도출한다’고 기구 목적을 밝혔다.
과거사 형사 재판은 가해자가 실제 유죄로 인정되는 사례가 드물고, 피해자 관점에서도 ‘정의 구현’이 됐다고 느끼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형사사법 절차는 피해자의 경험 진술이 아니라 가해자의 범죄 행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국가에 의한 대규모 인권 침해 사건들에서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거나 오래된 기억의 오류로 진술이 일치하지 않으면, 피해자 진술에 대한 신빙성이 오히려 다툼의 대상이 돼 왔다. 이번 조사위 소수의견처럼 2차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때문에 해외의 과거사 진화위에서는 피해자 진술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성폭력 발생의 양상과 유형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도네시아 식민 지배와 군부에 의한 인권 범죄를 규명하기 위해 2002년 꾸려진 동티모르 진화위는 1974년부터 1999년 사이 발생한 성폭력 진술 853건을 듣고 정리했다. 이를 통해 강간이 393건(46.1%)으로 피해 유형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고, 강간 피해는 성희롱 등 다른 형태의 성폭력(27.1%)이나 성 노예화(26.8%)와 함께 이뤄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번 5·18 조사위의 조사보고서에는 소수의견이 함께 수록돼 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조사위의 조사보고서는 해외 위원회들과 달리 확증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해 사실을 부인하는 반대 의견이 함께 수록돼 있다는 점에서 목적이 제대로 달성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위원 3명은 성폭력 조사 방법에 대한 내용 뿐 아니라 5·18 민주화운동이 ‘국가폭력’이라는 정의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나아가 조사위가 국군의 명예를 훼손한다고까지 보고 있다. 이들은 “계엄군부 주도로 일부 반인권적 가해 사실이 존재하지만, 전체주의 국가들과 차이가 크다. 국가폭력 대신 ‘과도한 공권력 행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적절하다”고 했다.
그러나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시민에 대한 폭력 진압은 1997년 대법원도 ‘군사 반란과 내란 행위’로 판시한 바 있다. 차경희 광주여성단체연합 젠더폭력특별대책위원장은 “계엄군도 상명하복 조직 체계에서 피해자일 수 있지만 소수의견은 국군 전체를 계엄군으로 일반화시키는 주장”이라며 “잘못된 행위가 있었으면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게 진상규명 과정이다. 40년이 흘러 국가가 뒤늦게 조사를 했다는 것도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단체 “종합보고서엔 ‘국가폭력’ 인정 않는 소수의견 빠져야”
여성단체들은 오는 6월 발간될 종합보고서에는 소수의견이 들어가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조사보고서에 3명 위원의 소수의견이 병기된 건 국가폭력 현실이 축소·왜곡되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며 “위원회의 목적과 위원으로서의 책무를 명백히 망각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 동티모르 진화위의 최종보고서를 참조할 만하다. 동티모르 진화위는 가부장적 관행이 팽배한 농촌 지역에서 여성 문맹률을 낮추는 것부터 젠더 기반 범죄에서 수사 담당자를 훈련해야 한다는 내용,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낙인을 찍고 배제하는 교회 조직을 점검하고 국제 규범에 따라 여성 차별과 관련된 국내 법규를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까지 최종 보고서에 담았다.
조사위가 발간할 종합보고서에는 ▲5·18 성폭력 사건의 피해 실상을 부인하고 폄훼하려는 의도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에 대해선 단호한 법적 조치를 취하고, ▲복합적 후유증에 부합하는 보상과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지급 기준을 마련하며 ▲조사 거부·사망·자살·정신병 발병 등으로 진술을 청취하지 못한 피해자들을 위해 별도의 조사 기구를 설치하거나 기존 조직이 조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라는 등의 권고안이 실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달 26일 활동을 종료하는 조사위를 대신해 남성 피해자 등 추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환경 역시 마련되어야 한다. 조사위는 이때까지 ‘질문하지 않아서 듣지 못한 피해’가 더 많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앞서 2018년 공동조사단 조사에서 한 남성 피해자는 “여자들에 대한 성추행, 성폭력뿐 아니라 남자들에 대한 성희롱, 성고문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고 진술했다. 이번 조사위에서 그는 처음으로 합수단 수사실에서 받은 성고문 방식에 대해 진술했다.
이 피해자는 오랫동안 성고문 피해 증언을 하지 못한 이유로 “지금까지 여러 조사에서 인권 침해 사례나 피해에 관해서는 관심을 덜 두지 않았나 한다”며 “사실관계 위주로 접근했지, 당시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받았고 그로 인해 현재까지 어떤 피해를 보고 있는지 묻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4년여간 활동한 조사위가 잘 마무리하기 위해선 종합보고서에 제도 개혁안과 남은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잘 담겨야 한다. 장임다혜 연구위원은 “진상규명은 피해자의 명예와 권리 회복을 위한 선언”이라며 “가해자 개인이 아니라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가능하게 했던 법과 제도에 경종을 울리고, 사회 변화를 위한 제도적 개혁안을 권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