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하루 만에 땅 개간하라”…소년, 농경으로 바뀐 사회 시험대에 서다

2018.05.17 21:37 입력 2018.05.17 22:00 수정

티베트 원숭이와 청보리술

신후를 유혹하는 나찰녀가 그려진 티베트 민족기원도.

신후를 유혹하는 나찰녀가 그려진 티베트 민족기원도.

지난 세기말 라싸에서 시가체에 이르는 티베트 고원을 답사한 적이 있다. 청두(成都)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라싸 공항에 착륙했을 때 별다른 느낌이 없었기에 별거 아니라고 나는 고산병을 괄시했다. 그러나 버스로 20여분을 달리다가 마애불을 만나려고 잠시 하차했을 때 문워킹을 하는 듯한 이상한 감각을 경험했다. 그날 밤 나는 감기몸살 비슷한 고산병을 호되게 앓았다.

호된 신고식 덕분인지 다음날부터 몸이 가벼웠다. 가이드는 술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날부터 쉬지 않고 술과 벗하여 답사를 이어갔다. 그때 ‘줄창’ 먹어댄 술이 칭커주(靑과酒)였다. 칭커, 곧 티베트 사람들의 주식인 청보리를 원료로 만든 바이주(白酒)였다. 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아마 원숭이도 이 술을 먹고 사람이 되었을 거야, 농담을 하곤 했다. 칭커주는 티베트의 원숭이 신화를 호출하는 맑은 술이다.

그런데 티베트 원숭이를 호출하기 전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다. 티베트 곡물기원신화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원숭이가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청보리가 이 신화에 먼저 등장하기 때문이다.

천지가 개벽한 뒤 아직 곡식 종자가 없었을 때 사람들은 사냥을 하면서 동굴에서 살았다. 그때 티베트 어느 지방에 아홉 형제가 살았는데, 막내는 새의 말을 알아들었다. 막내는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까치의 제안을 받는다. ‘사슴고기를 주면 좋은 정보를 주지!’ 까치의 말은 놀라웠다. 태양이 9개나 떠오르는 대재난이 닥칠 테니 이러저러한 준비를 하라는 것! 하지만 말은 알아듣는 이에게만 가치가 있다. 아홉 길 되는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내장을 파낸 젖소를 넣고, 그 위에 가시나무 아홉 층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돌판 아홉 층을 덮은 뒤 노루·말·개미 한 마리씩과 방망이 하나를 들고 젖소의 배 속에 들어가 숨으라는 것. 형들은 미친놈이라고 했고, 결국 타죽었다. 형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9개의 태양열에 인류가 다 타죽었고, 새의 말을 알아들은 막내만 살아남는다.

■인간 분투로 얻어낸 곡물

자연재해 이후 유일한 생존자
천신의 막내딸 얻기 위해 분투
당대 최신 기술 ‘경작’ 시험 후
부부, 씨앗 훔쳐 땅으로 내려와

막내가 숨은 구덩이 속의 소의 배 속은 ‘노아의 방주’와 비슷하다. 이 신화가 홍수신화의 변형판이란 뜻이다. 물의 심판이 아니라 불의 심판이란 차이가 있을 뿐. 하지만 이 불의 재앙은 인류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하고는 무관하다. 9개의 태양이라는 신화소가 알려주듯이 가혹한 자연재해일 뿐이다. 재난을 피하려면 신의 음성을 듣지 말고 새의 말, 곧 자연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홍수신화에는 크게 두 유형이 있다. 하나가 오누이가 살아남아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남매혼(혹은 근친혼) 유형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내 혼자만 살아남아 어쩔 수 없이 짝을 찾아 천상에 올라가 천신의 딸과 결혼하는 인신혼(人神婚) 유형이다. 이 티베트 신화에 변형된 홍수신화의 화소가 스며들어 있다면 막내의 다음 이야기는 짝을 찾아 떠나는 것이어야 한다. 과연 그렇다. 소의 배 속에서 나와 폐허의 대지를 확인한 막내는 물을 찾아 세상의 끝까지 여행한다. 거기서 마침내 찾아낸 샘물이 하늘샘(天泉)이고, 이 샘이 천신의 세 딸이 삼년에 한번 물을 길러 오는 샘이라는 정보를 이번에는 ‘붉은 새’한테서 듣는다.

이제 지상의 유일한 생존자가 천신의 막내딸과 결혼해야 하는 힘든 여정이 시작된다. 새의 가이드에 따라 막내는 반지를 나무에 걸어놓는데, 반지는 천신의 막내딸에게만 보인다. 제 눈에 안경이다. 막내딸한테 청혼한 막내는 천신의 허락을 얻기 위해 하늘로 올라간다. <종자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구전신화는 승천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고통을 길게 구술한다. 그러나 이 승천통(昇天痛)은 허혼에 이르는 고난의 예고편일 뿐이다.

“왜 이리 늦었느냐?” 솔직한 막내딸의 이실직고는 천신의 분노를 부른다. 지상의 모든 아빠들이 그렇듯이 천신은 ‘사위 될 놈’을 경계한다. 딸을 주지 않으려고 감당할 수 없는 시험문제를 낸다. 첫째 문제, 하루 만에 네 말의 청보리 씨앗을 뿌릴 만큼 넓은 땅을 개간하라!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막내는 막내딸이 일러준 주술로 신을 불러내어 땅을 개간한다. 그러나 딸을 안 주기로 작심한 천신이 호락호락 물러설 리가 없다. 자네가 개간한 땅을 하루 만에 혼자서 갈아놓지 않으면 결혼 못하네. 막내는 두 번째 문제도 같은 주술로 해결해 버린다. 문제는 이어진다. 세 번째는 유채씨 네 말을 하루에 다 뿌리라고 했다가, 네 번째는 그것을 다 회수하라고 한다. 천신의 심통이 보통이 아니지만 문제는 해결되고 둘은 부부가 된다.

그런데 또 다른 분란이 발생한다. 사위가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 장인은 천구(天狗)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주면서 ‘신어서 찢어지면 지상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조건을 건다. 물론 조건에는 함정이 있었다. 그 ‘특수신발’은 찢어져도 바로 복원되는 ‘엑스맨 같은’ 신발이었다. 그러니 찢어질 때까지 종일 뛰어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 기댈 곳은 한 군데뿐! 하지만 이번에는 막내딸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막내딸도 내심은 친정에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낙심한 막내 앞에 천신을 위해 숯을 굽는 노인이 나타난다. 숯구이노인은 찢어진 신발이 원상복구되지 못하게 하는 비법을 알려준다. 천기누설!

■신의 은총으로서의 곡물

불교 들어오며 이야기도 변형
원숭이·나찰녀 부부의 자식들
청보리·콩·메밀 등 가져다준
관자재보살 덕에 굶주림 면해

마침내 승리한 막내에게 천신은 마지막 바리케이드를 친다. “설령 딸이 자네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식량은 한 톨도 못 가져가네!” 천신은 막내딸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막내딸은 아비의 소망과 달리 남편을 따라 지상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한다. 이제 남은 희망마저 버린 천신은 딸과 사위를 단호히 추방한다. 딸은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엄마랑 언니들하고 작별인사만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딸을 이기는 아빠는 없다. 결국은 맨몸으로 들어갔다 맨몸으로 나오라는 조건을 달아 허락한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지상으로 시집가는 딸이 걱정되어 온갖 좋은 곡물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맨몸으로 나가야 하니 방법이 없다. 막내딸은 아버지 몰래 청보리와 밀 한 톨씩은 입안에, 완두콩 한 톨은 콧구멍에, 메밀 한 톨은 손톱 밑에 감추고, 제비콩 두 알은 귀고리처럼 두 귀에 걸고 어머니·언니들과 작별인사를 한다. 천신의 확인을 거친 뒤 마침내 둘은 지상으로 내려온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 농사가 시작되었고, 농사로 인해 인류의 생활은 점점 나아졌다. 아직 긴 후일담이 더 남았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티베트의 설산처럼 막아선 신화의 산을 넘으려면 숨이 가빠도 질문을 접을 수는 없다. 두 가지는 꼭 물어야 한다. 왜 천신은 지상에서 온 소년에게 그토록 가혹한 과제를 부과했을까? 천신은 왜, 천상의 곡물종자가 지상으로 반출되는 것을 그렇게 꺼렸을까?

인신혼 홍수신화에는 두 가지 문화적 변곡점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가 결혼제도의 변화라면 다른 하나는 생산양식의 변화다. 족내혼에서 족외혼으로의 변동, 수렵에서 농경으로의 전환이다. 소년이 짝이 없어 천상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씨족 외부로 신부를 구하러 갔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랑다루기’ 민속처럼 심한 시험을 겪은 것이다. 동시에 시험 과제가 경작이었던 까닭은 사위의 농경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농경이야말로 당대의 최신기술이었으니까. 최신기술의 유출을 꺼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천신의 막내딸은 문익점처럼 곡물의 종자를 밀반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곡물기원담 속 사회 변곡점

수렵에서 농경으로의 이행
족외혼으로 결혼 제도 변화

그런데 또 하나의 변곡점이 있다. 티베트 고원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곡물기원신화는 아주 달라진다. 이전에 없던 원숭이와 관세음보살에 나찰녀까지 등장한다. 1388년에 샤카 쇠남걀첸이 쓴 <서장왕통기(西藏王統記)>의 민족기원신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곡물기원담은 민족기원신화 안에 포함되어 있다.

티베트인들의 삶과 신화의 젖줄, 야루장부강.

티베트인들의 삶과 신화의 젖줄, 야루장부강.

신이한 원숭이(神후) 한 마리가 구족계를 받으려고 티베트 설산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바위산의 나찰녀가 와서 유혹한다. 원숭이가 계율을 깰 수 없다며 거절하자 나찰녀는 하루에 만령(萬靈)을 상하게 하고 일천의 생명을 먹어치우겠다고 위협한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신후는 포탈라산의 관자재보살을 찾아 길을 구한다. 답은 간단했다. 부부가 되라! 둘이 부부가 된 뒤 육도(六道), 곧 지옥도·아귀도·축생도·아수라도·인간도·천상도의 정(情)이 태에 들어와 여섯 마리의 새끼 원숭이로 태어난다. 육도에서 왔으므로 여섯의 천성은 각각이었다.

신후는 새끼 여섯을 얄룽 계곡의 새들이 모이는 삼림으로 보내 3년 동안 살게 했다. 3년 만에 갔더니 500마리로 늘어나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비참한 상황이었다. 신후는 순식간에 포탈라산의 관자재보살을 찾아가 구원을 요청한다. 보살은 “네 후예들은 내가 돌볼 것이야”라고 하면서 수미산 틈새에서 청보리·콩·메밀·보리를 가져와 지상에 뿌렸다. 땅 위에는 곧 씨를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향기로운 곡식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아버지 신후는 새끼들을 이끌고 그 땅에 이르러 곡식들을 먹으라고 한다. 그래서 땅의 이름이 쩨탕강뽀리산이 되었다.

새끼 원숭이들은 곡식을 먹으면서 아주 만족해했다. 원숭이들은 곡식을 먹으면서 털이 점점 짧아지고 꼬리가 줄어들더니 말까지 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람이 된다. 그들은 향기로운 곡식을 먹으면서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고 살았다.

일반적인 민족기원신화(시조신화)처럼 이 신화도 동물기원담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원숭이와 나찰녀의 결합으로 설역(雪域)의 민족, 곧 티베트인들이 비롯되었으니까. 그런데 불교의 외투를 걸치고 있어 간단치가 않다. 원숭이는 힌두신화의 원숭이 신 하누만을 염두에 둔다면 설역의 여러 민족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토템동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찰은 힌두신화의 락샤사이고, 불교에서는 악귀로 수용된 존재지만 바위산에 거주하는 존재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암석신앙과 결합된 티베트 샤머니즘, 다시 말해 뵌뽀의 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의 결합이 관자재보살의 기획 작품이라는 신화적 사실이다. 관자재보살은 누구인가? 관자재보살은 티베트 불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이다. 관자재보살은 포탈라산에 있고, 그의 현신인 달라이라마는 지상의 포탈라궁에 거주한다. 티베트인들에게 곡물이라는 천상의 선물을 주어 사람으로 만들고, 설산 아래 야루장부강 유역에 살게 해준 존재도 관자재보살이다. 따라서 티베트 사람들은 조상인 신후가 설산에서 수행했듯이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이 불교신화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티베트에는 두 가지 곡물기원신화가 있는 셈이다. 새의 말을 알아들어 대재난을 피한 지상의 유일한 소년이 온갖 고생 끝에 천상에서 훔쳐온 곡물 이야기가 하나라면 관자재보살의 뜻으로 결혼한 원숭이와 나찰녀의 자식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원하고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관자재보살이 수미산에서 가져온 곡물 이야기가 다른 하나다. 전자가 인간의 분투를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신의 은총을 말하고 있다.

신화적인 곡물인 칭커를 수확하는 티베트 사람들.

신화적인 곡물인 칭커를 수확하는 티베트 사람들.

생각해 보니 그때 라싸의 뒷골목에서 놓친 것이 있었다. 칭커주를 마시면서 원숭이만 호출했지 새의 말을 알아듣는 소년은 불러내지 못했다. 그 소년을 찾아 다시 설산으로 가야겠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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