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실험 이후 찜찜해진 ‘유죄’ 파기환송 2심도 “남편은 무죄”

2018.06.03 21:04 입력 2018.06.03 21:05 수정

치과 의사 모녀 사건 ‘핑퐁 재판’

형사재판은 엄격한 증거를 요구한다. 불이 난 집 욕조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의 경우 대법원은 간접 증거가 개별적으로 완벽하지 않지만 전체 증거를 종합해보면 남편의 범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한 고법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고법 재판부는 화재실험을 실시했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와는 다른 결과가 나와 파기환송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대법원도 이례적으로 고법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형사재판은 엄격한 증거를 요구한다. 불이 난 집 욕조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의 경우 대법원은 간접 증거가 개별적으로 완벽하지 않지만 전체 증거를 종합해보면 남편의 범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한 고법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고법 재판부는 화재실험을 실시했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와는 다른 결과가 나와 파기환송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대법원도 이례적으로 고법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대결’은 항상 시선을 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요즘에는 이 요소가 없는 TV쇼가 거의 없는 것 같다. 노래는 물론 스포츠, 요리, 여행까지. 재판도 이 ‘대결’ 때문에 더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살인사건 재판에서 벌어진 한국 법의학자들과 스위스 법의학자의 대결이었는데, ‘치과의사 모녀 살인’으로 알려진 사건에서였다. 결론적으로, 스위스 학자의 승리였다. 한국 법의학자들의 결론에 따르면 유죄였지만, ‘꼭 그렇지 않다’는 스위스 학자의 의견을 법원은 받아들였다.

모녀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내 안지혜(가명)와 딸(1세)이 끈 같은 것으로 목이 졸려 죽은 채 더운 욕조물에 담겨 있었다. 범인은 안방 장롱에 불을 놓았고, 아파트 경비원이 오전 8시40분경 새어나오는 연기를 발견했다. 남편 박주영(가명)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치과의사 부부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사망시간이 관건이었다. 안지혜는 전날 밤 10시30분에 언니와 통화를 했다. 박주영은 다음날 오전 7시에 집을 나섰다. 만약 안지혜의 사망시간이 오전 7시 이전이라면 범인은 박주영이 확실하다. 그 이후라면 오전 7시부터 경비가 발견한 오전 8시40분 사이 외부인의 침입에 의한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

1심서 국내 법의학자들 조언 참고
‘사망시각’ 등 추정하며 사형선고

1심은 박주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결정적 증거는 역시 사망시간이었다. 국과수 법의학자, 서울대·고려대 의대 교수 등 내로라하는 국내 법의학자 3인이 입을 모아 사망시간은 오전 7시 이전이라고 진술했다. 근거는 시반(죽은 후 나타나는 시신의 반점), 시강(시신 경직), 위장 내용물이었는데, 이런 추론이다. ①시반: 안지혜에게는 시신을 뒤집을 때 만들어지는 양측성 시반이 나타났는데, 안지혜는 11시30분 검안을 하며 시신을 뒤집었고, 시반은 사후 6~8시간 이후에 생성되므로, 역산하면 사망시간은 7시 이전일 수밖에 없다. ②시강: 재강직이 발현되지 않은 점에서 11시30분 검안 당시 사후 7~8시간이 경과된 것으로 보이며, 사망시간은 3시30분~4시30분이 된다. ③위장 내용물: 위에서 발견된 음식물의 종류로 보아 저녁식사로 추정되고, 상태를 보면 안지혜가 저녁을 먹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시간 외에 의심스러운 정황도 많았다. 부부는 시댁, 성격 차이 등의 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안지혜는 인테리어 업자와 외도 중이었다. 박주영은 사건 당일 안지혜가 아침으로 콩나물국을 먹었다고 했으나 그 증적이 없었고, 샤워를 했다고 했지만 역시 흔적이 없었다. 박주영의 팔 상부에는 손톱자국이 있었다. 자기 스스로 꽉 잡아 생긴 상처라고 해명했지만, 뒤에서 앞으로 굽은 모양으로 자신의 손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박주영의 다른 진술도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모조리 거짓 반응이 나왔다. 범인은 장롱의 옷에 불을 붙이고 안방 문을 닫아놓았다. 이 상태에서 연소가 진행되었는데, 불은 천장의 합판을 그슬리기만 한 채 산소 부족으로 자연 진화되던 중 발견된 ‘훈화현상’으로 판단되었다. 여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연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경비원이 발견한 오전 8시40분보다 훨씬 이전에 방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해자드1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오전 6시40분~7시10분경으로, 거의 박주영이 집에 있었던 때이다. 아파트 1층에는 경비원이 상주해 제3자가 침입하는 건 대단히 어렵다. 전자레인지 안에서 한약 봉지가 발견되었는데, 아침을 안 먹은 상태에서 약만 먹으려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우므로 이 또한 저녁식사 후 약 먹기 전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베란다 커튼 끈이 잘려나가 있었는데, 안지혜의 목에 난 졸린 자국과 폭이 유사했다. 박주영은 사건 전 <위험한 독신녀> 비디오를 2번 빌려 보았다. 거기에는 남자를 죽여 욕조에 담그고, 옷을 불태워 없애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박주영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 가지 박주영에게 유리한 사실은, 안지혜가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침에 세수를 한 후 콘택트렌즈를 낀 다음에 사망한 게 아닐까 하는 추론도 가능케 한다. 하지만 1심은 이것이 무죄의 증거까지는 못된다고 판단했다.

2심엔 ‘정확한 추정 불가능’ 무죄
대법서 다시 뒤집히며 파기환송

하지만 이어 열린 2심은 이 결론을 뒤집고 박주영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은 60쪽에 이르지만, 핵심은 법의학자들의 사망시간 추정이 확실치 않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2심 판결은 대법원에 가서 다시 뒤집혔다. 대법원은 유죄로 보이니 다시 재판하라는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간접증거가 개별적으로는 완전한 증명력을 갖지 못하더라도, 전체 증거를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종합적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범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법리를 내세웠다. 말하자면, 사망시간에 관한 법의학 증거, 발화시간 추정, 외도, 거짓말들, 손톱자국, 커튼 끈, 한약 봉지, 비디오 등 하나하나 개별로 보면 유죄의 증거로는 약하더라도, 다 모아보면 유죄로 보이지 않느냐는 뜻이다.

스위스 법의학자·한국 측 대결서
재상고심 ‘무죄’에 대법원도 확정

말 안 듣는 하급심에 못마땅해도
‘화재실험’ 결과 무시 어려웠을 것

환송된 2심에서 그 유명한 대결이 있었다. 스위스 법의학자 L이 한국에 건너와 법정에 섰다. 그는 스위스에서는 위 내용물에 의한 사망시간 추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가장 정확한 방법은 직장부분 온도를 측정하는 것인데 본건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추정이 불가능하다며 일침을 가했다. 결국 시반과 시강에 의해 사망시간 추정을 해보더라도 우리나라 법의학자들의 추정처럼 안지혜가 오전 7시 이후에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없다는 견해에는 찬성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2심은 우리나라 법의학자들의 감정의견을 버리고 L의 입장을 채택했다. 우리 법의학자들은 제3자인 반면, L은 변호인 측이 초빙한 학자란 측면에서 색안경을 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담으로, 한국과 스위스 법의학자들의 대결에서 이땐 한국이 참패했지만 훗날 소위 ‘만삭 의사 부인 살인 사건’에서는 캐나다 법의학자를 상대로 설욕을 한다. 서래마을 영아 유기 사건에서는 프랑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중에게는 이 법의학자들 간의 대결 요소가 흥미를 끌었겠지만, 실은 이것이 결정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스위스 법의학자 L도 결국 오전 7시 이후의 사망이 가능하다는 정도의 입장이어서, 여기에 7시 이전이라는 다른 법의학자들의 다수 의견을 참고하고, 여타 보강증거들의 신빙성이 인정되면 유죄가 충분히 가능했다.

법률가, 특히 판사 마인드로 판결을 읽어본 결과, 유무죄를 가른 핵심 요소는 따로 있었다. 파기환송 2심에서는 화재 실험을 했다. 판사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건 분명 이것이었다. 학교 운동장에 현장인 안방 구조물을 그대로 재현해 불을 놓는 실험을 한 것이었다. 발화 5, 6분 만에 하얀 연기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8분 후부터 자연 감소되었다. 공기가 부족해지면서 불완전연소로 연기의 색깔이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1심에서 인정한 것처럼 화재가 지연된 ‘훈화현상’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오전 8시40분 경비원이 발견했을 때 흰 연기가 현관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화는 그 몇 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화재는 박주영이 출근한 이후라는 얘기다.

여기에 대해 검찰은, 아파트 전체가 아닌 안방만을 재현한 실험이었고, 연기 색깔은 물건 재질, 온도, 산소 등에 따라 차이가 있기에 흰 연기라고 하여 화재 초기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현장엔 거실이 끼어 있었고, 화재경보기가 눌러붙은 것으로 보아 화재의 지속시간이 길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결국 검찰의 이론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화재 실험의 벽을 넘지 못했다.

훈화현상, 즉 화재의 지연현상이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깨진 것이다. 검찰 주장에 따르면 박주영이 오전 7시 출근 전 불을 놓은 후 1시간40분이나 지나서 발화되도록 하는 특수 장치를 하였거나 자연적인 인과와 달리 진행된 우연한 사정이 있었다고 해야 하는데, 증거 없이 이런 걸 우기기는 힘들다. 실험 결과는 박주영이 안 했다고 확신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오전 7시 이후 외부인이 침입해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남아 있는 한 법리적으로 유죄는 난망이다.

파기환송 2심 판결문은 자그마치 106쪽에 이르렀다. 이번엔 대법원도 무죄를 수긍했다. 핑퐁 재판은 하급심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건 이례적이다. 대법원이 파기환송했다는 건 결론을 바꾸란 뜻이고, 하급심은 대체로 이에 따른다. 다르게 해봤자 대법원에 가서 어차피 또 깨질 테니까. 그런데 이 사건에선 하급심이 대법원의 방침과 다르게 다시 무죄로 했고, 대법원도 자신의 결정을 들이받은 그 결론을 받아들였다. 왜 그랬을까.

역시 파기환송심에서 있었던 화재 실험이 컸다. 이것이 대법관들을 움직였으리라. 그 마음의 얼개를 들여다보면 ‘무죄의 확신’보단 ‘찜찜함’이다. 사형, 즉 인간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하급심이 말 안 듣고 치받아 못마땅하지만, 화재 실험이라는 엄연한 결과가 유죄로 가려는 발걸음 뒤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었으리라.

또, 이런 면도 있었을 것이다. 1심 3인은 유죄 판단이었다. 2심 재판에서는 무죄가 났으니 3인 중 최소 2인이 무죄 판단이었다. 파기환송 2심에서도 3인 중 최소 2인이 무죄 판단이었다.

만약 1심이 2 대 1 합의였고, 2심 모두 3 대 0 합의였다면 무죄 판단을 한 판사는 7인이 된다. 대법원 자신을 제외하고 보면, 하급심 9인의 판사 중 최소 4명에서 최대 7인의 판사가 무죄일지도 모르는 ‘합리적 의심’이 있다고 했다. 대법관들이 생각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그 판단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자신들은 합리적 의심이 없다고 판단했더라도, 사건을 심리한 다른 판사 중 9분의 4 이상이 유죄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무죄로 하는 건 비교적 마음이 편하다. 억울한 사람을 처벌하는 위험은 어쨌든 없으니까.

하지만 무죄의 가능성을 끈질기게 제기당하면서 유죄로 선언하는 일은 상당히 불편하다. 무고한 사람을 집어넣는 위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법률가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일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에서 외부인이 침입해서 범행했을 가능성이란 게 기껏해야 이론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없어 보이는데, 그걸 이유로 합리적 의심 운운하면서 무죄를 한다는 게 합당한가?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타당한 항의다.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어렵다.

다음번에는, 이 외부인 침입 가능성이라는,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틈새에 집착하는 판사들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한 번 써보겠다.

■필자 도진기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화재실험 이후 찜찜해진 ‘유죄’ 파기환송 2심도 “남편은 무죄”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8년 동안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면서 10여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공직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작품으로는 <정신자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순서의 문제> <모래 바람> 등이 있고, 2014년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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