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력욕의 산물 일본 천황 신화, 유지시키는 바탕은 지진 아닐까

2018.07.26 20:58 입력 2018.07.26 21:12 수정

지진과 천황과 신화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 아마테라스오미카미다. 본래 한 씨족의 조상신이었지만 신화와 의례의 재편과정을 거쳐 일본 전역의 최고신이 됐으며, 근대 천황제 국가의 신화로 재탄생했다. 사진은 동굴에서 나오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 제국 일본의 욱일기는 이 형상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 아마테라스오미카미다. 본래 한 씨족의 조상신이었지만 신화와 의례의 재편과정을 거쳐 일본 전역의 최고신이 됐으며, 근대 천황제 국가의 신화로 재탄생했다. 사진은 동굴에서 나오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 제국 일본의 욱일기는 이 형상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조카 살해 황위 계승한 덴무
정통성 세우려 신화 만들기
가상의 천황 창안하게 기획
고사기·일본서기에 형상화

천황가 조상신 아마테라스
탄생 전에 여러 신들이 출현
재편 거쳐 일본 최고신 상승
불교 전래 후 부처와 동일시

근대엔 천황제 국가의 신화로
800만 신국 ‘천황’ 비판하지만
자연재해 많아 집단 불안의식
신화가 없다면 버틸 수 있을까


7월 초에 도쿄 문학관 답사를 다녀왔다. 저녁에 와세다대학 앞에서 저녁을 먹다가 지진을 겪었다. 집이 흔들리자 작은 이자카야 주인은 후다닥 문을 열어 놓고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였다. 당황한 일행들이 “어어” 하는 사이 흔들흔들하던 지진은 잦아들었다. 진앙은 도쿄 인근 바다, 진도 6.0이었다. 걱정하며 떠난 답사 여행지에서 지진국의 실체를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날 낮 와세다대학 지하철역을 나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보살상이었다. 길 모퉁이에 낙마지장존(落馬地藏尊)을 모신 작은 성소가 있었다. 에도 막부의 3대 쇼군이 이곳을 지나가다 말이 화들짝 놀라 떨어졌는데, 이상해서 살펴보았더니 흙다리 밑에서 이 보살상이 나와 두려워서 모셨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는 동지 마쓰리와 부적으로 유명한 아나하치만궁(穴八幡宮)이라는 신사도 있었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모신 신사다. 바로 옆에는 방생사라는 절도 있다. 일본은 800만 신들의 나라다. 문득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신들의 나라는 지진의 나라와 무관할까?

800만 신국(神國)의 중심에 천황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가 있다. 그런데 <고사기(古事記)>(712)와 <일본서기(日本書紀)>(720)에 형상화되어 있는 아마테라스의 모습에는 이상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신화적 역사서라 할 만한 <고사기>를 보면 태양신 아마테라스가 탄생하기 전에 여러 신들이 출현한다. 천지가 생성된 뒤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天地御中主神)를 비롯한 천신 다섯이 출현했고, 신세칠대(神世七代)라고 하는 열두 신이 출현한다. 이 신세칠대 가운데 마지막에 출현한 남녀신, 이자나기노카미(伊耶那岐神)와 이자나미노카미(伊耶那美神)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이 결혼하여 많은 섬을 낳고 국토를 낳고 신들을 낳기 때문이다.

한데 여신 이자나미는 불의 신을 낳다가 음부에 화상을 입어 죽음에 이른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고사기>에는 없고 <일본서기>에만 보인다. 이자나미는 죽었기 때문에 황천국, 곧 저승으로 갔고 이자나기는 아내를 데려오고 싶어 그곳으로 간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저승의 밥을 먹은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지 저승신과 상의하겠다고 들어가면서 금기를 준다. “안에 있는 동안 절대로 내 모습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금기는 위반을 위해 존재하는 법, 기다림에 지친 이자나기는 왼쪽 머리에 꽂았던 빗의 굵은 살 하나를 떼어 불을 붙여 안을 들여다본다. 아뿔싸, 거기에는 구더기가 들끓는 아내의 시신이 있었다!

이자나기는 두려워 도망쳤고, 이자나미는 ‘욕을 보였다’며 그를 추격한다. 황천국의 귀녀(鬼女)·뇌신(雷神)·군사들로 하여금 쫓게 하다가 마지막엔 직접 쫓는다. 그러자 이자나기는 거대한 천인석(千引石)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세워 가로막는다. 이 천인석을 사이에 두고 부부신은 서로 고별사를 주고받는다.

이자나미: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여, 이와 같이 하시면 당신 나라 사람을 하루에 1000명씩 교살할 것입니다.

이자나기: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당신이 정녕 그렇게 한다면 나는 하루에 1500개의 산실(産室)을 세우겠소.

<고사기>는 이렇게 해서 하루에 1000명이 죽고 1500명이 태어나는 생사의 규례가 설립되었다고 설명한다. 인구절벽의 시대에는 무의미한 규례가 되겠지만. 어쨌든 기기신화(<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통칭)는 이 태초의 사건에 의해 이승과 저승의 세계가 분리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황천국에서 귀환한 이자나기는 부정한 나라에 다녀왔으므로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목욕재계인데, 이를 <고사기>에서는 ‘미소기(계)’라고 했다. 그런데 이 미소기 과정에서 벗어 던진 지팡이·허리띠·모자·저고리·바지·팔찌 등등으로부터 온갖 신들이 생겨난다. 옷을 벗고 몸을 씻는 과정에서도 10명의 신이 출현한다. 우리가 고대하는 아마테라스는 바로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가 왕권을 상징하는 ‘3종의 신기’ 구슬·거울·칼을 들고 내려왔다는 규슈 미야자키현에 있는 다카치호봉.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가 왕권을 상징하는 ‘3종의 신기’ 구슬·거울·칼을 들고 내려왔다는 규슈 미야자키현에 있는 다카치호봉.

남신이 왼쪽 눈을 씻었을 때 태어난 신의 이름은 아마테라스오미카미, 다음에 오른쪽 눈을 씻었을 때 생겨난 신의 이름은 쓰쿠요미노미코토(月讀命), 다음에 코를 씻었을 때 태어난 신의 이름은 다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建速須佐之男命)이다.

이 세 명의 신을 <고사기>는 ‘삼귀자(三貴子)’라고 했다. 이자나기는 셋 가운데 아마테라스에게 자신의 목걸이를 주면서 다카마노하라(高天原)를 다스리라고 명한다. 쓰쿠요미에게는 요루노오스쿠니(夜之食國)를, 다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이하 ‘스사노오’로 약칭)에게는 우나하라(海原)의 통치를 위임한다. 다카마노하라는 천상의 세계이고, 요루노오스쿠니는 밤의 세계다. 아마테라스는 천상의 세계를 다스리는 해신이고, 쓰쿠요미는 밤의 세계를 다스리는 달신인 셈이다. 스사노오가 위임받은 우나하라는 바다의 세계인데, <일본서기>에는 그것이 ‘천하’로 변형되어 있다. 스사노오가 위임받은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울고만 있어 산이 메마르고 강과 바다가 말라버릴 정도였다는 뒷이야기를 참조하면, 스사노오가 위임받은 나라는 아마테라스의 천상과 짝을 이루는 ‘지상세계’일 것이다.

<오운력년기(五運歷年記)>에 실려 있는 반고(盤古)신화에 따르면 창세신 반고가 죽자 그의 사체가 세계를 구성하는데, 왼쪽 눈이 해가 되고 오른쪽 눈이 달이 된다. 기기신화가 기술하고 있는 아마테라스와 이자나기의 왼쪽 눈의 관계는 반고신화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기기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덴무천황(天武·678~686)의 명을 받아 <고사기>를 편찬한 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서문에서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만물을 생성하는 과정을 ‘음양론’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적실한 좌증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陽), 즉 이승에 속하는 이자나기의 좌안(左眼)의 산물인 아마테라스는 어떻게 천황가의 조상신이 되었을까? 이 의문을 해소하려면 먼저 1대 천황인 진무(神武)와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관계를 따져야 한다.

<고사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는, 환웅이 그러했듯이, 지상의 아시하라노나카쓰쿠니(葦原中國)에 관심이 많았다.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국토 헌상을 종용하지만 실패한다. 마침내 스사노오의 후예인 오쿠니누시(大國主神)를 설득하여 땅을 양도받는다. 오쿠니누시는 천황의 궁전처럼 좋은 신전을 만들어달라는 조건만 내걸고 저승으로 숨는다. 이 신전이 음력 10월이면 전국의 신들이 모여든다는 신들의 고향 이즈모대사(出雲大寺)다.

오쿠니누시로부터 양도받은 땅 아시하라노나카쓰쿠니에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邇邇藝命)가 내려와 지배자가 된다. 이른바 천손강림 신화다. 한데 천손강림의 과정이 단군신화나 주몽신화에 비해 꽤나 복잡하다. 니니기노미코토는 지상에 강림할 때 5부의 수장들을 거느리고 내려온다. 5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오카 마사오(岡正雄)처럼 기마민족 정복설을 수용하는 학자들은 고구려나 백제의 5부 조직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니니기노미코토가 강림할 때 휴대한 기물이 아닐까? 그는 왕권을 상징하는 구슬·거울·칼,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가 ‘3종의 신기(神器)’라고 호명한 기물을 가지고 온다. 구슬과 거울은 아마테라스가 남동생 스사노오의 행패를 피해 석굴에 숨어 다카마노하라와 아시하라노나카쓰쿠니, 곧 천지가 모두 어두워졌을 때 아마테라스를 동굴에서 나오게 할 때 사용했던 신물이다. 구사나기노쓰루기라는 칼은 스사노오가 천상계로부터 추방되어 이즈모노쿠니(出雲國)에 내려갔을 때 인신공희를 받는 뱀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이고 그 몸속에서 얻은 것이다. 스사노오는 이 칼을 아마테라스에게 바친다. 그러므로 삼종신기는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지상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인 셈이다. 환웅이 태백산에 강림할 때 휴대했던 천부인 세 개와 상징적으로 동일하다.

천손 니니기노미코토는 구름을 헤치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창으로 바다를 저어 섬을 창조하던 천부교에서 쓰쿠시(竺紫) 지역 휴가(日向)의 다카치호(高千穗) 봉우리로 내려온다. 이 산은 현재 규슈 미야자키현에 있다. 가고시마현에도 같은 지명이 있어서 논란이 있지만 모두 규슈에 있다. 니니기노미코토는 ‘이곳이 가라쿠니(韓國)를 바라보고 있고, 아침 해와 저녁 해가 비치는 길지’라고 하면서 궁궐을 짓고, 지기(千木·일본 고대 건축양식에서 지붕 위에 X자로 교차시킨 긴 목재)를 높이 올리고 자리를 잡는다. 진무천황은 바로 이 니니기노미코토의 직계다. 아마테라스로부터 따지면 진무는 6대손이다. 고려 건국신화의 왕건이 백두산에서 내려온 성골장군 호경의 6대손인 것처럼.

신들의 고향 이즈모대사의 지기(지붕 위에 X자로 교차시킨 긴 목재)와 신관들.

신들의 고향 이즈모대사의 지기(지붕 위에 X자로 교차시킨 긴 목재)와 신관들.

니니기노미코토가 복잡한 강림과정을 거친 것은 덴무천황의 ‘신화 만들기’ 프로젝트의 결과다. 그는 ‘임신의 난(壬申亂·672)’을 통해 조카를 죽이고 황위를 계승한 뒤 여러 씨족 신화들을 통합, 재편성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다. 물론 살아 있는 동안 기기신화의 완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기기는 그의 정치적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일본 신화학자들이 동의하는 바 이른바 ‘원일본신화’가 있었다는 것. 다카마노하라계, 이즈모계, 휴가계 신화가 그것들이다. 종교학자 무라카미 시게요시(村上重良)는 이를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오가, 다카마노하라에서 추방당해 나카쓰쿠니에 내려와 국토를 열고, 그 자손인 오쿠니누시가 황손에 복속한다는 정치신화를 만듦으로써 야마토(大和) 조정의 전국 지배를 종교적으로 근거지웠다’고 한 문장으로 정리한 바 있다. 본래 한 씨족의 조상신에 불과했던 아마테라스가 신화와 의례의 재편과정을 거쳐 일본 전역의 최고신으로 상승했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덴무의 기획을 실행에 옮긴 오노 야스마로는 덴무천황의 이미지가 투사된 가상의 천황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그가 바로 아마테라스의 6대손인 1대 진무천황이다.

불교 전래 이후 13세기에 이르면 아마테라스는 부처와 동일시된다.

밀교의 본존불인 대일여래(大日如來·Mahavairocana)인데, 태양신 아마테라스는 대일여래와 일체가 되고, 천손인 천황은 대일여래의 화신으로 재해석된다. 법흥왕을 비롯한 신라의 왕들이 전륜성왕으로 불렸듯이 천황 또한 전륜성왕과 동일시된다. 나아가 근대에 이르면 천손강림 신화는 근대 천황제 국가의 신화로 재탄생한다. <일본서기>가 기술하고 있는 바, 아마테라스가 황손에게 내렸다는 신칙(神勅), 곧 ‘천손의 황위는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리라’는 말씀이 실린 메이지 36년(1903)의 국정 역사교과서가 그 물증이다. 제국 일본의 육군기인 욱일기는 동굴을 나서는 아마테라스의 형상을 이미지화한 것이 아니던가. 아마테라스는 제국의 상징으로 비화한다. 진무천황의 즉위일로 설정한 2월11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와세다대학 앞 아나하치만궁 안으로 들어가면 진무천황요배소(神武天皇遙拜所)라는 돌비석이 서 있다. ‘멀리서 진무천황께 절하는 장소’라는 뜻이겠는데, 진무를 모신 나라현의 가시하라신궁(原神宮)을 향해 절하는 곳이라 짐작했다. 고대의 신화든 근대의 신화든 천황의 신화는 일본인들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지진을 체험한 날 밤, 천황의 신화를 만든 것은 권력욕이겠지만 그 신화를 유지시켜 주는 힘은 지진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시로 발생하는 자연재해가 주는 집단적 불안의식 말이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천황제를 비판하지만 800만 신과 신사가 없다면, 신사의 중심에 있는 천황과 그 신화가 없다면 저들은 지진의 나라에서 버틸 수 있을까? 이런 화두를 들고 돌아온 도쿄 기행이었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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