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행정 바꾸지 않으면 ‘여운형 암살’ 밝히는 건 불가능하다”
암살 이틀 후 작성된 문서에
여운형 노린 세력들 드러나
경찰행정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 김두한이 언급된 ‘경찰과 여운형’이라는 문서는 여운형이 암살되고 이틀 후 작성되었다.(버치문서 박스 1) 여기에는 그동안 여운형의 암살을 노렸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친일 밀정 이종형, 실패 후 체포
이승만이 보증금 30만엔 내줘
이종형은 대표적인 친일 밀정 중 하나였다.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정재가 열연했던 인물은 이종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적산 불법 처분과 수해 의연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이 있는 이종형과 함께 여운형의 생명을 위협한 것은 경찰이었다.
“친일경찰 출신 권리 제한하자”
입법의원에 법안 상정된 후
경찰 ‘제거 캠페인’ 대상 인사에
의장 김규식 거론은 이해되지만
여운형 포함된 건 정치적 목적
미군정 하에서 조직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 우익 인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 3월5일 부일협력자와 민족반역자를 규정하는 법률을 상정했다.(경향신문 1947년 3월5일자) 이 법안에는 친일 경력이 있는 경찰들의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친일 경력의 경찰들이 입법의원 의장이었던 김규식과 남조선과도정부 수반인 안재홍을 위협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여운형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법안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암살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방 피신 과정서 숨진 여운형
경찰, 그의 적 대신 친구만 체포
범인 쫓던 경호원 제지하기도
여운형이 암살되기 직전에 미군정 고위 관리와 장택상 경기도 경찰청장으로부터 암살 위협의 경고를 받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7월17일 김규식, 홍명희, 윔스 등 주요 인사들과의 모임에서도 여운형은 장택상이 서울을 떠나라는 경고를 했다고 말했다. (‘김규식과 다른 사람들과의 모임’, 1947년 7월17일자, 버치문서 박스 1)
여운형은 이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고, 지방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피신하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암살당했다. ‘경찰과 여운형’ 제하의 문서에서는 여운형의 암살에 경찰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운형이 암살되었던 시기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놓여 있는 시기였다. 반탁운동 세력들은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를 위하여 네 개의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종형, 명제세, 최규설 등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이승만의 행동’, 1947년 7월11일자, 버치문서 박스 2) 이승만의 주장에 따라 미소공위가 실패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졌다.(‘언론보도에 대한 대응’, 1947년 7월17일자, 버치문서 박스2).
반면 3상협정 결정안에 찬성하는 세력들은 1947년 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면서 결정안에 규정되어 있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임시조선정부’의 수립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반탁운동에 참여했던 한국민주당 역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통합위원회에 의한 선언’ 1947년 7월15일자, 버치문서 박스 2)
그래서 이를 반대했던 극우테러리스트들에 의한 테러 관련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었고, 김규식은 자신과 식솔들을 지키기 위하여 무기 소지를 허용해 달라고 미군정에 요청했고,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하지 장군의 지시로 3정의 권총을 지급받았다.(‘무장에 대한 김규식의 요청’, 1947년 7월8일자)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버치는 암살의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메모 중에는 김구를 왜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메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버치는 수사가 진행되면서 곧 생각을 바꾸었다. 배후는 김구가 아니었다. 경찰은 암살이 발생할 때마다 김구가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실상 문제는 당시의 경찰이었다. 그들은 모든 혐의를 김구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 암살범을 수사한다는 명분으로 여운형의 경호원과 운전사를 체포, 구금하고, 암살범을 체포하려고 쫓아갔던 사람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하지는 여운형의 경호원과 운전사를 풀어주라고 했지만, 그 명령은 무시되었다.(‘여운형 케이스’, 1947년 7월22일자, 버치문서 박스 1) 그러나 하지는 다시 버치에게 경찰 일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여운형 케이스’, 1947년 7월26일자, 버치문서 박스 1)
버치는 박성복이라는 경호원을 조사했다. 그는 사건 몇일 전 ‘반공투쟁회(?)’로 부터 온 여운형 암살을 암시하는 편지를 군 첩보대에 넘겼다. 편지는 빨간색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는 사건 직후 암살자를 뒤쫓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총을 쏠 수는 없었다. 추격 중 경찰이 이를 막기도 했다. 13살 정도의 소년이 암살자가 들어간 골목의 끝에 있는 집을 지목했고, 그 집은 유명한 임정 요인과 관련 있는 집으로 알려져 있었다. 골목에서 암살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자 4~5명 정도의 경찰이 있었는데, 그들은 암살자를 쫓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주변의 전화는 모두 고장 나 있었다.
이 인터뷰 문서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박성복 인터뷰’, 1947년 7월27일자, 버치문서 박스 1)
현직 경찰 최능진 작성한 문서
“친일경찰 노덕술 계획대로
임정 요인 집서 체포된 한지근
암살범 아냐…신XX가 진범”
버치 문서군에는 날자가 미상인 또 다른 문서가 있다. 이 문서는 경찰서장들의 모임에서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의 암살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암살을 막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암살을 하기 위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문서에 의하면 여운형의 암살자는 23세의 신××이라고 한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19세의 한지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지근은 박성복의 인터뷰에 나오는 임정 요인의 집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준비된 것이었으며, 그 뒤에는 친일경찰 노덕술이 있었다. 문서 작성자는 다음 희생자는 김규식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문서 작성자는 친일 경찰을 비판하고 이승만에게 직접 대항했던 최능진이었다. 그는 경찰이었고, 대구 사건의 원인이 친일 경찰에 있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최능진이 작성한 문서는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암살범은 검거되었지만, 검거된 이들이 진짜 암살자인지 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71년 동안이 암살 사건과 관련된 사실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묻혀 버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운형의 암살로 인해 더 이상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지도자들을 내세우려고 했던 버치의 계획은 모두 무산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버치에게는 김규식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여운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김규식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끌고 가기는 쉽지 않았다. 여운형의 조직은 그가 죽자마자 바로 분열되었다. 좌우합작의 실패는 곧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의미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한국인들은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인물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