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내기 딱 좋은 나인데'…김동현이 포착한 '시니어 스트리트 패션피플'

2022.04.01 14:22 입력 2022.04.01 22:52 수정

‘디오르 어머님.’ 동묘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님이다. 만날 때마다 매번 명품을 멋있게 매치하셨다. 처음 어머님을 만났을 때 나는 코코 샤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김동현 제공

‘디오르 어머님.’ 동묘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님이다. 만날 때마다 매번 명품을 멋있게 매치하셨다. 처음 어머님을 만났을 때 나는 코코 샤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김동현 제공

“블랙 레터링이 장식된 화이트셔츠에 블랙 버킷햇과 선글라스, 브랜드 로고 장식의 블랙 클러치를 매칭해 완벽한 블랙&화이트룩을 선보인 그는 손에 든 패션 매거진마저도 하나의 액세서리로 보이게 한다.”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패션잡지 화보의 설명이 아니다. 사진작가 김동현씨(30)가 서울 동묘에서 포착한 ‘시니어 패션피플’의 사진을 보고 패션에디터가 직접 쓴 설명이다. 김씨는 2019년부터 서울의 멋있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스트리트 패션 사진을 촬영해오고 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나이든 분들이 이렇게 잘 입는지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어른들은 추레하게 입을 거라는 생각, 젊은 사람들이 더 잘 입을 거라는 생각에 어른들의 패션 세계를 몰라본 것”이라고 말한다.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일본이나 유럽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냐”는 것이다. 길어야 몇 개월 가는 유행 따위 살포시 즈려밟은, 저마다의 개성이 담긴 패션 덕이다. 라이더재킷에 샤넬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가죽모자를 쓰기도 하고, 칼하트의 오버롤즈(멜빵바지)를 너끈히 소화하며 꽃무늬 워커에 핫핑크 패딩을 마다하지 않는 어르신들의 경계 없는 패션을 보다보면 뭔가 속이 뻥 뚫리는 해방감마저 전해온다.

‘서병구 교수님.’ 코트의 소매를 잘라 베스트로 만들어 입을 정도로 패션에 대한 열정과 스타일이 확고한 분. 만날 때마다 센스에 놀란다. <캣츠> <스타가 될 거야> <명성황후> 등의 안무를 만든 유명 안무가다. 김동현 제공

‘서병구 교수님.’ 코트의 소매를 잘라 베스트로 만들어 입을 정도로 패션에 대한 열정과 스타일이 확고한 분. 만날 때마다 센스에 놀란다. <캣츠> <스타가 될 거야> <명성황후> 등의 안무를 만든 유명 안무가다. 김동현 제공

“본인이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나와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 있어요. 20·30대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자신과 스타일이 혼연일치된 분들이 존재하거든요. 저는 그게 멋있어요.”

김씨의 캐스팅 원칙은 젊은 세대도 공감할 만한 패션, 그리고 ‘자신감’이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반면 마음에 드는 날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경쾌하다. 그런 대상을 발견하면 “깜빡이 켜고 들어가듯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가서” 촬영을 제안한다. 그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놓은 인스타그램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좀 멋있지? 이 친구가 멋을 좀 아네”라거나 “여기에 재킷을 걸쳐볼까”하는 분을 만나기도 한다. 쑥스럽다며 거절하는 분들도 많다. 하루에 3~4명 촬영이 성사되면 운이 좋은 날. 한 장도 못 찍고 오는 날도 있다.

‘필카 ’를 사랑하는 남자. 김동현씨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서울 시내를 누빈다. 멋쟁이 어르신을 많이 만나는 운좋은 날이면 36장 필름 한 롤에 3~4명의 모습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필카 ’를 사랑하는 남자. 김동현씨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서울 시내를 누빈다. 멋쟁이 어르신을 많이 만나는 운좋은 날이면 36장 필름 한 롤에 3~4명의 모습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김동현씨는 필름 카메라를 고집한다. 촬영 즉시 보여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삭제하는 디지털이 편할 법도 하지만,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고 인화와 현상에 소요되는 아날로그의 시간을 어르신들은 기꺼이 받아준다. 그들의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사진의 색감은 그렇게 완성됐다.

촬영 시 초상권 사용 허가 및 출판에 대한 동의를 받는 것도 철칙이다. 촬영 이후라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 사진은 폐기한다. 사진은 현상해서 선물하거나, 카카오톡으로 파일을 보내드린다. 그렇게 그의 휴대전화에는 ‘힙스터 아버님’ ‘디오르 어머님’ 등으로 저장된 연락처가 수두룩하다. “행복하세요”와 같은 덕담이 담긴 GIF 이미지 파일을 받는 것도 일상이 됐다. 가끔 본인이 잘 꾸몄다고 생각하는 날에는 ‘언제 나오냐’ 연락도 하신다. 어르신들의 반응은 저세상 칭찬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사진이 흡족하면 “영정사진으로 써도 되겠다”라고 말하는 식으로.

‘힙스터 아버님.’ 옛날 컨트리 음악을 커버해 유튜브에 올리는 현직 크리에이터. 이 시대의 진정한 힙스터다. 김동현 제공

‘힙스터 아버님.’ 옛날 컨트리 음악을 커버해 유튜브에 올리는 현직 크리에이터. 이 시대의 진정한 힙스터다. 김동현 제공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에 대한 김씨의 관심은 50년 넘게 옷가게를 운영한 할머니로부터 비롯됐다. 할머니는 “교통비를 아끼려 2㎞를 걸어 다니더라도 고급 퍼 코트는 살 줄 아는 분”이자 “자신의 패션을 개척해나간 첫 사람”이었다. 워킹홀리데이 심사에서 탈락한 뒤 떠난 폴란드 여행에서 처음 스트리트 패션 촬영을 해본 김씨는 이후 패션전문학교에 진학해 패션비즈니스를 전공했다. 취업이 원활하지 않자 동묘의 가구숍에 취직했고 여유 시간에 촬영에 나섰다가 ‘멋있는 할아버지’를 만나 다시금 가슴이 뛰는 경험을 했다. 보통의 패션학도처럼 서울패션위크 현장에서 젊은 멋쟁이들을 촬영하던 때와는 다른 설렘이었다. 그렇게 2019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어르신들의 스트리트 패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동묘는 어르신들의 ‘열린 문화센터’ 같은 곳이에요. 젊은이들의 더현대서울 같은 곳이죠. 어르신들이 주말이면 놀 곳이 사라지고 있잖아요. 동묘에서는 보물찾기를 할 수 있거든요. 2만원이면 벼룩시장에서 바지와 셔츠 몇 벌을 살 수 있고, 빈티지 시계도 구할 수 있고요. 또 저렴하게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죠.”

‘류화자 어머님.’ 어린 시절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으셨다. 학창 시절 멋을 내기 위해 감자를 갈아 나오는 녹말을 발라 교복 깃을 빳빳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5년 전에는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에 입상할 정도로 여전히 패션에 진심이신 분. 김동현 제공

‘류화자 어머님.’ 어린 시절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으셨다. 학창 시절 멋을 내기 위해 감자를 갈아 나오는 녹말을 발라 교복 깃을 빳빳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5년 전에는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에 입상할 정도로 여전히 패션에 진심이신 분. 김동현 제공

한때 패션잡지마다 옷 잘 입는 일반인 사진을 싣는 ‘스트리트 패션’ 코너가 있던 시절, 압구정 로데오거리, 홍대입구, 명동, 이대입구는 단골 촬영지였다. 김동현씨가 자주 찾는 시니어들의 핫플레이스는 동묘, 남대문 인근, 인사동이다. 동네마다 스타일도 조금씩 다르다.

“동묘는 홍대와 비슷해요. 개성이 뚜렷하고 다른 곳과 달리 조금 과한 스타일도 허락되는 곳이죠. 진짜 스트리트 스타일부터 클래식한 정장까지 20대도 선호할 만한 패션도 있어요. 인사동은 예술가 집단이 많다보니 아방가르드하기도 하고 동묘보다는 차분하고 정제된 느낌이 있어요. 남대문은 장사하는 분들이 많아서 반짝반짝 화려해요. 외국 멋쟁이 할머니들의 느낌이랄까요.”

그동안 미디어 속 노년층은 <전원일기> 의상을 물려 입은 듯 패션에 대한 감각이나 열정이 퇴화된 존재거나,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기괴한 ‘패션광’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김씨가 마주한 어르신들은 달랐다. 빨간색 나이키 로고 운동화는 특별한 축에도 못 낀다. 미드솔(중창)에 불꽃무늬가 들어간 운동화, 어디서 구했나 싶은 독특한 벨트 버클까지 어르신들의 아이템은 상상을 초월한다.

‘부족장 아버님.’ 지팡이를 든 모습이 마치 족장같아 ‘부족장 아버님’이라 부른다. 매번 스타일이 바뀌는데, 하나같이 멋지다. 그날 옷차림에 따라 집에 수집한 지팡이 100여개 중에서 선택하신다고 한다. 김동현 제공

‘부족장 아버님.’ 지팡이를 든 모습이 마치 족장같아 ‘부족장 아버님’이라 부른다. 매번 스타일이 바뀌는데, 하나같이 멋지다. 그날 옷차림에 따라 집에 수집한 지팡이 100여개 중에서 선택하신다고 한다. 김동현 제공

“제가 ‘부족장 아버님’이라 부르는 어르신은 84세 정도 되는데 진짜 패션센스가 상당해요. 볼 때마다 다른 지팡이를 들고 다니시는데, 집에 100개 정도의 지팡이를 가지고 계세요. 지팡이도 패션 아이템처럼 스타일링하시는 거예요. 인사동 어디 가면 지팡이 전문숍이 있대요.”

군 관련 아이템으로 멋을 내는 일명 ‘밀리터리 크루’도 있다. 그중 ‘내가 제일 잘 입어’라며 자웅을 겨루는 두 멤버가 있다. 한 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밀리터리룩을 선호하고, 또 다른 어르신은 와펜부터 액세서리까지 화려한 스타일을 즐긴다. 벼룩시장으로 유명한 동묘에도 ‘명품족’은 있다. 세계적인 브랜드 로고의 총 집합이라 할 만한 패션을 구사하는 분들도 있다. 김씨는 “어르신들이라고 브랜드에 무지하지 않다”고 말했다.

“동묘 패션 하면 당연히 ‘짝퉁’을 입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진짜만 입는다’ 말하는 분도 있어요. 진품이냐, 가품이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판단할 것도 아니고요. 본인 눈에 예쁘고 마음에 들면 그만인 거예요.”

‘밀리터리 크루.’ 동묘 밀리터리 크루의 멤버 독일군복 아버님과 맥아더 아버님은 각자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독일군복 아버님(왼쪽 사진)은 밀리터리의 정석이라면, 맥아더 아버님은 와펜·패치 등을 많이 사용한 스타일을 즐기신다. 김동현 제공

‘밀리터리 크루.’ 동묘 밀리터리 크루의 멤버 독일군복 아버님과 맥아더 아버님은 각자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독일군복 아버님(왼쪽 사진)은 밀리터리의 정석이라면, 맥아더 아버님은 와펜·패치 등을 많이 사용한 스타일을 즐기신다. 김동현 제공

어르신들의 패션 원칙은 ‘어떻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한테 어울리니까, 이렇게 입으면 내 기분이 좋아지니까’에 방점이 찍힌다. 인스타그램에 데일리룩을 올리기 위해 입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어르신들은 지금보다 패션에 대한 기회가 현저하게 적었을 시기에도 오늘의 내 모습을 꾸미기 위해 노력한 분들이거든요.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도했기에 지금의 모습이 있는 거죠. 어떤 분야에 있어 숙련된 분들을 우리는 장인이라고 부르는데, 패션 신에서는 유독 그게 배제되고 있어요. 젊음이 곧 멋있는 거라고 말하는 사회가 좀 이상한 거 아닌가요.”

멋쟁이 어르신들을 찾아 서울 곳곳에서 6천장의 스트리트 패션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김동현씨. 그중 엄선한 400여 장의 사진을 담은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권도현 기자

멋쟁이 어르신들을 찾아 서울 곳곳에서 6천장의 스트리트 패션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김동현씨. 그중 엄선한 400여 장의 사진을 담은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권도현 기자

김씨는 “지금보다 폐쇄적인 시대에 튀는 패션을 입고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을 분들”이 그 시기를 견디어 이제는 한껏 개성을 뿜어내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 ‘재미’에 빠져 평일에는 동대문 야간창고나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고 주말에는 서울 시내를 돌며 촬영하고 있다. 또래들이 정장을 입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회의가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의 사진에 대한 많은 분들의 응원에 근사한 결과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현재 김씨는 지금까지 촬영한 사진 6000장 중 400여장을 엄선한 시니어 패션 아카이빙 책 출간을 위해 텀블벅에서 크라우드펀딩을 진행 중이다. 불과 3일 만에 목표의 300%를 넘어설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세계적인 사진가 스콧 슈만이 2010년 펴낸 스트리트 패션 사진집 <사토리얼리스트>의 한국판, 그것도 시니어 패션 사진집이 곧 출간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채명희 어머님.’ 1980년부터 40년간 여성복 디자이너로 일하셨다. 최근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하고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셨다. 김동현 제공

‘채명희 어머님.’ 1980년부터 40년간 여성복 디자이너로 일하셨다. 최근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하고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셨다. 김동현 제공

필름 현상소 사장의 제안으로 2019년 12월 ‘멋-동묘: 멋쟁이들의 기록’ 전시를 열었던 김씨는 이듬해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 제안도 받았다. “딱 200번만 거절당해보자”는 심산으로 두 달간 공들여 탄생시킨 보그 2021년 5월호 화보는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을 즐기는 어르신이 많다는 걸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포토제닉한 포즈와 남다른 아우라로 메인 컷을 장식했던 채명희 어르신은 이후 시니어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핑크 크록스 어머님.’ 삼천포에서 오랫동안 미용실을 운영 중인 헤어 디자이너이다. 거의 모든 색의 머리를 해봐서 이번엔 핑크색으로 염색했다고 한다. 김동현 제공

‘핑크 크록스 어머님.’ 삼천포에서 오랫동안 미용실을 운영 중인 헤어 디자이너이다. 거의 모든 색의 머리를 해봐서 이번엔 핑크색으로 염색했다고 한다. 김동현 제공

2016년 대구 서문시장 화재 이후 옷가게를 접은 김씨의 할머니는 손자가 카메라를 들면 옷장에서 주섬주섬 옷을 고른 뒤 “다리를 이렇게 꼬고 있으면 되느냐”고 할 정도로 능숙한 모델이 됐다. 한국의 독보적인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2년쯤 뒤에는 어르신들의 ‘헤어북’을 내고 싶다는 계획을 전했다. 그의 노트북 파일에는 보라색, 핑크색은 물론 3가지색으로 물들인 머리며, 꽃문양으로 땋아 올린 어르신들의 헤어스타일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무조건 뽀글이 파마를 하고 꽃무늬만 좋아한다고 믿는 당신, 고개를 들어 동묘를 바라보라. 진정한 패션피플의 ‘바이브’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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